갈등과 반전 이후, 조용한 전환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54년 만의 정권교체가 일으킨 변화 파장

일본 민주당은 2009년 8월 30일 총선에서 308석을 차지하여 창당 16년 만에 집권하였고, 1955년 창당 이후 장기집권을 계속해온 자민당은 야당으로 물러났다. 일본에서 54년 만에 실현된 정권교체는 커다란 변화 파장을 일으켰다.

2009년 9월 9일 일본 국회에서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대표, 사민당 후쿠시마 미즈호(福島瑞惠) 당수, 국민신당 가메이 시즈카(龜井靜香) 대표가 정책 합의서에 서명하였다. 하토야마 정부의 외교노선은 그 정책 합의서에 따라 바뀌기 시작하였다. 외교노선 전환의 요점은, 불평등한 미일동맹을 개선하는 것과 아시아 외교를 중시하는 것이었다.

불안과 우려를 느낀 쪽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다. 하토야마 정부가 출범한 2009년 9월 16일 힐러리 클린턴(Hillary R. Clinton) 국무장관은 워싱턴에서 방글라데쉬 외무장관과 회담한 뒤에 기자들에게 “오바마 정부는 이전 정부의 정책을 변화시켰지만 핵심 가치나 국가안보의 이해와 관련된 것은 다치지 않았다. (일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불안과 우려를 느끼고 있었다.

하토야마 정부의 외교노선 전환을 바라보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불안과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놀라게 한 발언은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외무상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일미동맹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일본의 국익이 있고, 미국의 국익이 있다. 진정한 동맹에서 양측은 각자 자기의 국익을 실현하기 위하여 협의하고 조절할 것이다. (줄임) 지난 시기 일본 외교는 미국이 결정을 내리고 일본은 끌려가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하토야마 정부의 외교노선 전환이 미일관계에서 빚은 갈등양상은 이러했다.

첫째, 하토야마 정부가 일본 정치권에서 금기로 여겨온 미일 군사관계의 조절을 요구하였다는 점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받은 충격은 컸다. 이를테면, 2009년 10월 21일 오카다 외무상은 공개강연에서 “자민당은 유엔보다는 일미 안보공조라는 틀 안에서 자위대를 활용해 왔다. (줄임)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작전에서 벗어나 유엔 주도의 평화구축 활동에 집중하는 쪽으로 초점을 바꿀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한 <로이터(Reuters)> 2009년 10월 21일 보도에 따르면, 기타자와 도시미(北澤俊美) 방위상은 로벗 게이츠(Robert M. Gates) 국방장관과 회담할 때, 일본과 미국이 공동으로 추진해온 미사일방어체계 수립에 대해 언급하면서 “MD 계획의 절반은 완료됐지만 나머지 절반에 대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 지 검토하고 있다. MD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지만 재정 당국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교도뉴스(Kyodo News)> 2009년 10월 26일 보도는, 하토야마 정부가 주일미국군의 법적 지위에 관한 미일 협정을 개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고, 2009년 10월 29일 하토야마 총리는 기자들에게 주일미국군 주둔 경비 가운데 일본이 부담하는 경비를 감축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둘째, 일본 민주당은 집권하기 이전부터 이른바 동아시아공동체를 구상해 왔다. 그들이 구상한 동아시아공동체에는 남측, 중국, 동남아국가연합(ASEAN) 10개 회원국, 인도, 호주, 뉴질랜드 등 16개국이 참가하는데, 미국은 배제된다. 그들의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은, 위의 16개국이 2005년에 미국을 빼놓고 창설한 동아시아정상회의(EAS)를 장차 동아시아안보협의체로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일본 민주당이 미국을 배제한 동아시아공동체 수립을 지향한 것은, 그들이 대미관계보다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의 관계, 특히 대중관계를 확대, 발전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다는 뜻이다.

하토야마 정부가 대중관계를 중시하는 외교노선을 들고 나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충격을 준 사건은 2009년 12월 10일에 일어났다. 당시 일본 정계의 최고 실력자였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민주당 간사장이 참의원 27명과 중의원 116명을 비롯하여 620명으로 구성된 정계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하였다. 전세기 다섯 대에 나눠 타고 중국에 간 사상 최대 규모의 외국 정계 대표단을 중국 정부가 환대한 것은 당연하였다. 국가원수급 예우를 받은 오자와 간사장은 공항에서 인민대회당으로 직행하여,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났으며, 후 주석은 회담에 배석한 일본 의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친근감을 표시하였다. 회담에서 오자와 간사장은 “동아시아 외교 강화를 강조하는 일본 민주당과 중국 공산당의 정당 교류를 한층 더 강화해 두 나라의 미래지향적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고 말하여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자극했다.

셋째, 하토야마 정부는 후텐마(普天間) 미국 해병대 항공기지 이전 문제를 놓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와 갈등을 빚었다. 1995년 이후 14년 동안 끌어온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는 미일동맹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중대 현안이므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그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하토야마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인 2009년 9월 8일에 외교안보관리들을 도쿄에 급파하여 후텐마 기지 이전에 관한 협상을 서둘렀다.

그러나 하토야마 정부의 태도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예상을 넘었다. 그들은 자민당 정부가 미국과 채택하였던 기존 합의를 백지화하고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 밖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그로써 갈등은 더욱 커졌다.

분노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미일관계의 갈등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긴급행동에 나섰다. 2009년 10월 12일 커트 캠벨(Kurt Campbell)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도쿄로 날아가 나가시마 아키히사(長島昭久) 방위성 정무관을 만났다. 캠벨-아키히사 차관보급 회담에서 진전이 없자, 2009년 10월 20일 게이츠 국방장관이 도쿄에 나타났다. 공항에서 자위대 사열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그는 오카다 외무상을 만났고, 이튿날에는 하토야마 총리와 기타자와 방위상을 각각 따로 만났다. 10월 24일에는 마이클 멀린(Michael Mullen) 미국군 합참의장까지 도쿄에 나타났다. 그러나 후텐마 기지 이전에 관한 갈등을 미일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에 해소하려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계획은 벽에 부딪쳤다.

2009년 11월 13일 버락 오바마(Barack H. Obama) 대통령의 도쿄 방문으로 성사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하토야마 총리는 후텐마 기지 이전에 대해 언급하면서 “매우 어려운 문제다. 가능한 조속히 (양국) 각료급 회의에서 결론을 내겠다. 나를 믿어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정상회담 직후, 오바마 대통령이 도쿄에 머물고 있는 동안 하토야마 총리는 아세안(ASEAN)-미국 정상회의에 참석한다면서 오바마 대통령 보다 먼저 싱가포르로 떠나버렸다. 싱가포르에 도착한 하토야마 총리는 기자들에게 “(후텐마 기지 이전에 관한) 일미 합의가 전제라면, (양국) 각료급 회의를 할 필요가 없다. 연말까지 마무리한다고 미국 측에 약속한 바 없다”고 하면서 말을 바꿨다.

하토야마 총리의 태도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분노하였다. 2009년 12월 4일 미일 각료급 회담에 참석한 존 루스(John V. Roos) 주일미국대사는 오카다 외무상, 기타자와 방위상과 따로 만나, 후텐마 합의를 백지화하려는 하토야마 정부에 대해 “본국이 분노하고 있다”고 하면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격앙된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나 하토야마 정부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분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2009년 12월 12일 기타자와 방위상은 나가노(長野)에서 열린 강연에 출연하여 “총리가 목표로 하는 것은 일미 합의에 기초해 후텐마 기지를 나고(名護)시로 이전하는 게 아니라, 오키나와 현민의 의사를 중시한 새로운 안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고, 강연 후 기자들에게 “재시도를 한다. 이 문제(후텐마 문제라는 뜻-옮긴이)에 대한 결론도 유보하기 했으며, 미국에게 새로운 협상의 장을 요구할 것이다. 이 때문에 어젯밤 3당 수뇌회의를 했다”고 말했다.

연립정부를 구성한 3당 대표들이 참가하는 기본정책 각료위원회가 2009년 12월 15일에 결정한 것은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에 대한 결론을 2010년 5월까지 연기하기로 한 것이었는데, 12월 24일 오카다 외무상은 클린턴 국무장관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연기 결정을 전했다. 백악관의 분노는 더 커졌다.

난국에 빠진 미일동맹, 비상조치에 나선 미국

하토야마 정부의 외교노선 전환으로 미일동맹은 난국에 빠져들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비상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 대화 단절 조치를 취했다. 2009년 12월 4일 미일 각료급 회담에 참석한 미국 외교안보관리들은 미일 외교안보회의를 연기한다고 통보하였다. 연기 통보는, 미일 안보조약 개정 50주년이 되는 2010년을 맞아 1996년의 미일 안보공동선언에 이은 새로운 안보공동선언을 채택하려고 한 계획을 실행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2010년 4월 11일 <요미우리신붕(讀賣新聞)>은, 후텐마 기지 이전에 관한 미일 실무협의를 미국이 일방적으로 중지하였음을 오카다 외무상이 4월 10일 기자들에게 밝혔다고 보도하였다. 실무협의 중지 통보를 받은 오카다 외무상은 4월 14일 존 루스 주일미국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실무협의를 계속하자고 요청했으나 루스 대사는 “그럴 필요 없다”는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교도뉴스> 2010년 4월 12일 보도에 따르면, 워싱턴에서 열린 핵안보 정상회의에 참석한 하토야마 총리는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를 담판하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 옆자리에 앉아 비공식 회담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하토야마 총리의 정상회담 요청을 거부한 백악관이 비공식 회담 요청을 받아줄 리 없었다. 백악관은 오바마 대통령의 옆자리에 이명박 대통령을 앉히고 전작권 반환 연기 문제 등을 의논하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하토야마 총리에게 따돌림을 주었다. 만찬 중에 하토야마 총리를 10분 동안 만나 준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11월 미일 정상회담에서) 총리는 ‘나를 믿어달라’고 말했지만 진전된 것이 없지 않나? 마무리할 수 있겠나?”고 따졌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대화를 단절하며 하토야마 정부를 압박했건만, 실효는 없었다. 2010년 4월 19일에 발간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2010년 3월 30일에 하토야마 총리와 진행한 대담을 보도하였는데, 그는 “(지난 시기) 일본은 미국이 말하는 대로 따라가야 했다.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은 서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좀 더 평등한 관계를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토야마 정부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대화 단절 조치에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주일미국군의 존재이유를 일본 국민에게 해설하는 선전활동을 벌였다. 이를테면, 주일미국군사령부는 2009년 11월부터 온라인 방송 <니코 니코 두가(Nico Nico Douga)>를 시작하였다. <합동통신(AP)> 2010년 2월 1일 보도에 따르면, 2010년 1월 하순 로벗 윌러드(Robert Willard) 태평양사령관은 주일미국군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본 국민에게 해설하기 위해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에드워드 라이스(Edward Rice) 주일미국군사령관은 2010년 1월 28일 미국군사령관으로서는 처음으로 <후지 티비(Fuji TV)>에 출연하여 주일미국군이 “일본 국민과 열린 소통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주일미국군사령부 그렉 보트밀러(Gregg Bottemiller) 대변인은 라이스 사령관이 언론 대담이나 대중 강연 등에 출연할 기회가 앞으로 더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2010년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러나 미국군의 선전활동은 오키나와 현민들의 군중집회를 당할 수 없었다. 오키나와 현민들은 10만 명 씩 운집하는 군중대회를 열어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 밖으로 이전하라고 외쳤고, 일본 각계각층도 그에 호응하는 집단행동으로 압박 수위를 높혀갔다.

천안함 사태로 상황이 반전되다

외교압박과 선전활동이 효과를 내지 못하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취할 비상조치는 바닥이 났다. 총리 교체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마이니치신붕(每日新聞)> 2010년 5월 10일 보도에 따르면, 2010년 4월 초순 루스 주일미국대사는 모리오카(盛岡)에서 오자와 민주당 간사장과 비밀회동을 하면서 “하토야마 총리를 믿을 수 없다. 오카다 외상의 말은 결말이 나지 않는다. 기타자와 방위상은 말이 안 통한다”고 말했다. 그 말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하토야마 정부에게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음을 민주당 지도부에 알려주면서 하토야마 총리가 교체되기를 바라고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그러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총리 교체를 암시한다고 해서 하토야마 총리가 스스로 물러나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비밀공작을 벌여 총리를 교체할 수도 없었다. 그처럼 난감해진 상황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바라는 대로 총리가 교체되려면, 일본 정치권에 강력한 외부충격이 가해져 총리 교체 요구가 정치권 안에서 제기되는 길밖에 없었다.

2010년 3월 26일에 일어난 천안함 사태는 일본 정치권을 강타한 외부충격이었다. 강타를 맞은 일본 정치권 분위기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바라던 대로 급속히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북의 위협’과 ‘주변 정세 불안정’에 대처하는 것이 시급하므로 미일동맹 개선을 자제하는 수밖에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으로 되었다.

상황 반전을 노려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천안함 사태로 생겨난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들은 후텐마 합의를 관철하기 위한 외교압박에 총력을 기울였다. 2010년 4월 23일 <요미우리신붕>이 보도한 대담기사에서 커트 캠벨 국무부 차관보는 천안함 사태로 “조선반도 정세의 불투명성이 커지고 있는 만큼 미 해병대의 오키나와 주둔 의의가 커지고 있다”고 강조하고, 4월 27일에 도쿄로 날아갔다. 캠벨 차관보가 도쿄를 방문한 것은 기존 합의를 관철하기 위한 외교압박이었다.

하토야마 정부는 천안함 사태로 반전된 분위기 속에서 뒷걸음질을 쳤다. 2010년 4월 28일 <요미우리신붕>은 하토야마 정부가 기존 합의를 약간 바꾼 수정안을 확정하고 그 수정안을 미국에 전달했다고 보도하였다. 곤경에 처한 하토야마 정부는 기존 합의를 백지화하려던 생각을 접고 기존 합의를 수정하는 선으로 물러선 것이다.

합동조사단이 천안함 침몰원인 ‘조사결과’를 발표한 2010년 5월 20일, 하토야마 총리는 관저에서 기자들에게 “조선반도 정세가 매우 긴박해지고 있다. 일본의 평화를 위해서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를 5월 말까지 결론 내기 위해 마지막으로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합동조사단이 ‘조사결과’를 발표한 이튿날, 클린턴 국무장관은 베이징에 가는 길에 도쿄에 들러 하토야마 총리와 오카다 외무상을 만났다. 클린턴 국무장관은 오카다 외무상과 회담한 직후에 가진 공동기자회견에서 “양국 정부의 목표는 바뀌지 않았다. 우리는 일본의 안전과 역내 안정을 유지하여야 한다”고 말했고, 오카다 외무상은 “현재 안보환경에서 일본의 안전 및 역내 안정과 평화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주일미국군이라는 점을 일본 국민들에게 솔직히 말씀 드리고 싶다. 우리는 이러한 일(천안함 사태를 뜻함-옮긴이)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그런 사건이 일본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고 말했다.

천안함 사태로 불의의 일격을 맞은 하토야마 정부는 외교적 굴복을 감수해야 했다. 클린턴 국무장관이 도쿄를 거쳐 베이징으로 떠난 다음날인 5월 22일 오카다 외무상과 존 루스 주일미국대사는 기존 합의에 따라 작성된 후텐마 기지 이전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하였다. 미국군 소식지 <성조(Stars and Stripes)>가 2010년 5월 23일에 보도한 바에 따르면, 5월 23일 오키나와 나하(那覇)를 방문한 하토야마 총리는 나카이미 히로카즈(仲井眞弘多) 오키나와현 지사를 만나 “일미 양국 정부가 협상한 결과, 미국군이 오키나와 안에서 이전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이러한 결정은 고통스러우나 불가피한 것이었다. 나는 오키나와 현민들이 분노하고 실망할 것임을 잘 안다. 하지만, 조선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현재 안보환경이 매우 불확실하므로, 우리가 미 해병대를 비롯한 주일미국군의 억지력을 훼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미국군 보도국(American Forces Press Service)이 2010년 5월 26일에 발표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5월 26일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방부 청사에서 열린 미일 국방장관 회담의 중심 주제는 천안함 사태였다. 회담에서 게이츠 국방장관은 후텐마 기지 이전에 대해 언급하면서 “아직 중요한 일들이 남았으나 지금까지 진전된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게이츠 국방장관이 기타자와 방위상 앞에서 기뻐한 까닭은,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의도에 맞게 타결되었기 때문이었다.

2010년 5월 24일 <워싱턴 포스트>는 천안함 사태가 “미국과 일본이 8개월 동안 끌어온 논란을 끝내고 미 해병대 기지를 오키나와 안에 재배치하는 계획을 받아들이는 정치적 구실을 일본 정부에게 안겨주었다”고 하면서 미국 정부 고위관리가 한 말을 인용하여 “천안함 사건이 일본 정부에게 매우 위험한 이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미일 동맹과 그 동맹의 일부인 기지 배치가 일본의 안전에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고 보도하였다. <합동통신>도 같은 날 보도에서 주일미국군 기지를 유지시킨 중요한 요인은 천안함 사태로 일어난 긴장이었다고 지적하였다.

<교도뉴스> 2010년 5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외무-국방장관 협의체인 ‘미일 안보협의위원회(SCC)’는 5월 28일에 발표한 성명에서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 헤노코(邊野吉)에 있는 미국군 기지 슈워브(Camp Schwab) 연안부로 옮기기로 한 합의를 공식화하였고, 오바마 대통령과 하토야마 총리는 전화통화에서 그 합의를 확인하였다.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미국과의 갈등에서 패하여 정치적 곤경에 빠진 하토야마 총리는 2010년 6월 2일 사퇴의사를 밝혔다. 2010년 6월 8일에 간행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따르면, 총리직 사퇴를 결심한 그는 “나의 시대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일본의 평화가 일본 국민들에 의해서 보장되는 때는 언젠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정치평론가 스티브 클레먼스(Steve Clemons)는 2010년 6월 1일 <워싱턴 논평(Washington Note)>에 실은 “오바마가 (나쁜) 총리를 사임시키다(Obama Takes Down (the Wrong) Prime Minister)”라는 제목의 평론에서 “하토야마는 자신을 냉대한 오바마의 압력에 버틸 수 없었다”고 지적하였다.

백악관 대변인 로벗 깁스(Robert Gibbs)가 하토야마 총리의 사퇴 결정을 존중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미일 두 나라 사이에 제기된 광범위한 과제들에 대해 차기 일본 총리, 일본 정부와 지속적으로 긴밀히 협력할 것”이라고 밝힐 때, 그의 표정은 한결 밝아 보였다. 일본 민주당의 최고 실력자인 오자와 간사장도 총리와 함께 사퇴로 내몰렸다. 2010년 6월 8일 오후 6시45분, 간 나오토(菅直人)가 아키히토(明仁) 일왕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제94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요구한 대로,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가 타결되고, 하토야마 총리와 오자와 간사장이 동반 사퇴한 것이다.

북미관계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전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천안함 사태를 이용하여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를 타결한 뒤로, 그들은 천안함 사태에 집착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천안함 사태에 집착한 이명박 정부는 대북 압박공세를 기도해 보겠다고 무던히 애썼지만,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가 타결되자 천안함 사태에서 슬그머니 발을 뺐다.

클린턴 국무장관이 하토야마 총리와 오카다 외상을 각각 따로 만난 5월 21일 이후의 상황변화를 훑어보면, 천안함 사태에서 발을 빼고 있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묘한 움직임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한국군이 기도하려던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자제하라고 김태영 국방장관에게 말해 준 월터 샤프(Walter L. Sharp) 주한미국군사령관의 자제 요구 발언이 5월 말에 두 차례 있었고, 미국이 추가적인 대북 제재를 고려하지 않고 있음을 내비친 필립 크라울리(Philip J. Crowley)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의 암시 발언이 6월 2일에 나왔고, 대북 제재를 해봐야 거의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게이츠 국방장관의 김빼기 발언이 6월 6일에 나왔고, 7함대 항모강습단을 남측 해역에 보내는 문제를 놓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논란이 벌어졌다는 <워싱턴 포스트> 보도가 6월 19일에 나왔다.

5월 21일 이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취한 일련의 행동 가운데서 단연 압권은, 대통령 특사를 평양에 파견한다는 결정이다. <통일뉴스> 2010년 7월 14일 보도에 따르면, 2010년 5월 24일과 25일 베이징에서 미중 전략대화가 진행된 직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유럽 채널을 통해 오바마 대통령의 대북 특사 파견을 (북측에) 타진했다”. 합동조사단이 조작의혹을 받는 천안함 침몰원인 조사결과를 5월 20일에 발표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의 어떠한 도발도 용납하지 않고, 적극적 억제 원칙을 견지”하겠노라는 ‘대국민 담화’를 5월 24일에 발표하는 바람에 모두들 정세 긴장을 우려하고 있을 때, 놀랍게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대통령의 방북 특사 파견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뉴스> 보도는 꽉 막혔던 북미관계에서 조용한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남 도발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목청을 높였는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왜 대통령 특사를 보내 북측과 대화하려고 서두른 것일까? 수수께끼처럼 난해한 이 물음을 푸는 ‘열쇠’는, 클린턴 국무장관이 5월 21일 도쿄에서 하토야마 총리와 오카다 외무상을 각각 따로 만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 회담에서 클린턴 국무장관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의사를 관철시킴으로써 미국의 외교적 승리와 일본의 외교적 굴복이 교차한 극적인 전환을 이뤄냈다. 그리하여 이튿날 오카다 외상과 루스 대사가 후텐마 기지 이전 합의서에 서명할 수 있었다.

이처럼 극적으로 후텐마 문제를 타결하였기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이명박 정부의 전작권 연기 간청을 들어주는 한편, 대북 관계에서도 조용한 전환을 시작할 수 있었다. ‘정통한 소식통’이 한 말을 인용한 <통일뉴스> 보도에 따르면, 북측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대통령 특사 파견 제안을 받아주었고, 그에 따라 7월 말이나 8월 초에 대통령 특사가 평양을 방문하는 실무문제까지 협의되었다.

갈등과 반전의 경로를 돌아보면, 천안함 사태에 관한 ‘조사결과’ 발표(5월 20일)→하토야마 정부의 외교적 굴복과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 타결(5월 21일)→백악관의 대통령 특사 파견 제안과 북측의 수락(5월 말)→하토야마 총리와 오자와 간사장의 동반 사퇴(6월 2일)가 연속적으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 경로에서 주목하는 것은, 미일관계의 갈등과 반전을 뒤로 하고 북미관계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조용한 전환이다. (2010년 7월 19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