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시간 만에 끝날 동시전쟁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한반도-대만 동시전쟁

미국 태평양사령부의 한반도 전시작전계획은 ‘작전계획 5027(OPLAN 5027)’과 ‘작전계획 5029(OPLAN 5029)’이고, 대만 전시작전계획은 ‘작전계획 5022(OPLAN 5022)’다. 미국 태평양사령부가 이처럼 전시작전계획을 세워놓고,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방대한 군사력을 일본 각지에 전진 배치해놓고, 해마다 몇 차례씩 동해와 동중국해에서 한국군과 일본 자위대를 이끌고 실전연습을 강행하는 것은, 명백하게도 한반도와 대만에서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다.

미국 군부의 전쟁준비가 워낙 은밀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언론매체들이 보도하지 못하고, 따라서 일반 독자들이 전쟁위험을 체감하지 못하는 것뿐이지, 군사정보를 분석해보면 그들의 전쟁준비는 자못 심각하다. 미국군의 한반도 전쟁은 인민군을 공격하는 전쟁이고, 미국군의 대만 전쟁은 중국인민해방군(이하 인민해방군으로 약칭)을 공격하는 전쟁이다.

그런데 만일 미국군이 북침공격으로 한반도 전쟁을 일으키면, 인민해방군은 미국군 전투력이 한반도로 쏠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만을 들이칠 것이다. 또한 대만의 분리 독립운동이 격화되면 인민해방군은 자국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 대만을 들이칠 것이다.

다른 한편, 인민해방군과 대만군이 전면전을 벌이면, 주일미국군과 일본 자위대가 대만으로 긴급 투입되는데, 인민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일미국군과 일본 자위대의 배후를 들이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에서도 당연히 전쟁이 일어난다. 한반도-대만 동시전쟁론은 그러한 예상 위에 성립된다.

한반도-대만 동시전쟁의 가능성은 북측과 중국의 쌍무조약에도 반영되어 있다. 1961년 7월 11일에 체결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 제2조는, “일방이 하나의 국가 또는 몇 개의 국가연합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당해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면 상대방은 지체 없이 군사적 원조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규정하였다. 물론 한반도-대만 동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그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부터 존재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설명된다.

중국 내전에서 패한 국민당 세력이 대만으로 쫓겨가 그 곳을 점거한 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으로 약칭)이 창건되었다. 건국 직후 중국에게 제기된 시급하고 중대한 과업은 대만 탈환이었다. 국민당 세력이 점거한 대만을 탈환해야 중국 영토를 보존하고 전국적 범위에서 완전한 자주권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건국 후 1-2년 안에 대만을 탈환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대만상륙작전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중국이 대만탈환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한반도에서 먼저 전쟁이 일어났다. 1950년 6월 27일, 해리 트루먼 (Harry S. Truman) 당시 미국 대통령은 미국 극동군사령부 휘하 해군과 공군을 한반도에 투입하고,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급파하라고 명령하였다. 제7함대가 대만해협에 들이닥친 것은, 인민해방군이 준비하던 대만탈환 군사작전에 결정적인 장애를 조성하였다.

만일 1950년 6월 25일 한반도 북위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중국이 대만탈환전쟁을 시작하였다면 동아시아 판도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제7함대가 대만해협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미국에게 선수(先手)를 빼앗긴 중국은 대만을 탈환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인민해방군이 대만해협에 들어간 제7함대의 위협기동에 가로막혀 대만상륙작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1950년 당시 인민해방군의 해군력과 공군력이 약해서 제7함대를 격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후 대만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중국과 미국의 대립

인민해방군이 지원군으로 참전한 6.25전쟁이 정전되자, 중국은 곧바로 대만탈환 전쟁준비를 재개하였다. 1954년 8월 22일 중국 정당 및 사회단체들은 ‘대만 해방에 대한 공동선언’을 발표하였고, 9월 3일부터 인민해방군은 국민당 세력이 점거한 작은 섬들인 킨먼다오(金門島)와 마추일다오(馬祖列島)에 집중포격을 가했다. 미국은 그에 대항하여 1954년 9월 14일 제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보냈고, 12월 2일에는 대만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1955년 1월 24일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중국 총리는, 대만은 중국 영토의 일부이므로 다른 나라가 대만 해방에 간섭할 권한이 없다고 하면서 미국에게 경고하였다. 그러나 1955년 1월 29일 미국 연방의회는 미국 대통령에게 대만을 ‘방어’하는 무력사용권을 부여한 ‘대만방위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인민해방군은 1958년 8월 23일에도 국민당 세력이 점거한 작은 섬들을 향해 집중포격을 가했다. 그러자 이번에도 미국은 이튿날 대만해협에서 전투태세에 돌입한다는 성명을 냈다. 이처럼 미국이 중국의 대만탈환시도를 무력시위로 방해한 것은, 대만문제가 중국과 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상 중국과 미국의 문제로 되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중국이 대만을 탈환하려면 무엇보다도 미국의 대만 지배력을 제거해야 하였다.

중국이 미국의 대만 지배력을 제거한 계기는 1971년 7월 9일부터 11일까지 베이징에서 비공개로 진행된,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중국 총리와 키신저(Henry A. Kissinger)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담판에서 마련되었다. 그 담판에서 합의한 사항에 따라, 미국은 1973년 8월 26일부터 대만 주둔 미국군을 철군하기 시작하여 1979년 4월 26일에 철군을 완료하였고, 1980년 1월 1일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을 종결시켰다.

그러나 중국의 대만 탈환을 가로막으려는 미국의 방해는 집요하였다. 미국은 1979년 4월 10일 ‘대만관계법(Taiwan Relations Act)’을 제정해놓고 나서,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하였다. ‘대만관계법’ 제정은 대만과 단교한 것이 형식적인 외교행동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대만을 계속 지배하려는 술책이었다.

영토보전과 분리 독립의 격렬한 충돌

대만문제의 본질은 영토보전 대 분리 독립의 격렬한 충돌이다. 이 충돌을 격화시킨 사람은, 1988년 1월 13일 대만 토박이로서 처음 총통에 당선된 리덩후이(李登輝)다. 그는 ‘대만 본토화운동(Taiwanese Localization Movement)’이라는 이름의 분리 독립노선을 들고 나왔다. 미국은 1995년 6월 9일 리덩후이가 대만 총통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도록 허용함으로써 대만의 분리 독립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대만이 분리 독립노선을 강하게 밀고 나가고, 미국도 그에 발맞춰 대만 지배권을 공고히 하려는 것은, 중국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주권침해였다. 중국은 1995년 7월 5일 <신화통신>을 통해 미사일 발사훈련을 실시한다고 발표하였고, 14일 뒤인 7월 21일 인민해방군은 핑치아유(彭佳嶼) 북쪽 60km 해상에 미사일을 퍼부었다. 그 섬은 대만에서 북동쪽으로 55km 떨어져 있는 작은 섬이다. 인민해방군의 미사일 발사는 7월 26일까지 계속되었다. 인민해방군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8월 15일부터 25일까지 해상기동훈련, 미사일 발사훈련, 함포사격훈련을 동시에 실시하였으며, 11월에는 상륙훈련을 실시하여 대만의 분리 독립기도와 미국의 주권침해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에 대응하여 미국은 1976년 이후 처음 대만해협 안으로 항공모함 니미츠호(USS Nimitz, CVN-68)를 들여보내며 긴장수위를 높였다.

1996년 3월 23일에 실시된 대만 총통 선거 직전인 3월 8일 인민해방군은 대만 북부의 기룽(基隆)과 남부의 가오슝(高雄)에서 각각 50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앞바다로 미사일을 쏘았다. 미국은 동중국해에 대기시켜놓은 항공모함 인디펜던스호(USS Independence, CV-62)를 주축으로 한 제7함대 항모강습단을 그 날로 대만 앞바다에 급파하였다. 3월 9일 인민해방군은 대만 서남쪽에 있는 펭후군다오(澎湖群島) 앞바다로 미사일을 또 쏘았다. 3월 11일 미국은 페르시아만(Persian Gulf)에 있던 항공모함 니미츠호를 대만 앞바다로 급파하였다. 2개 항모강습단이 대만 앞바다에 들이닥친 것은 중국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민해방군은 미국군 항모강습단의 위협기동에 물러서지 않고 3월 18일에 상륙훈련으로 맞섰다. 이것이 대만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제3차 대만전쟁위기다. 중국과 미국은 제3차 대만전쟁위기 이후 지금까지 대만해협과 인근해역에서 무력대치를 계속해오고 있다.

중국의 선택은 한 가지 뿐이다

2009년 9월 11일 천수이볜(陳水扁) 전 대만 총통은 뇌물수수죄 등으로 대만 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자, “미국이 대만 점령권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으므로 대만은 중국 영토가 아니라 미국 영토”라고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미국 영토인 대만에서 사는 대만사람들은 미국 헌법과 법률에 따라 기본권을 부여받아야 하므로, 자신에 대한 대만 법원의 판결은 원천 무효라고 주장하였고, 그의 지지자들은 미국이 대만의 분리 독립을 지지하는지 또는 지지하지 않는지를 밝혀달라고 청구하는 소송을 미국 연방법원에 제기하려고 하였다.

천수이볜이 집권하였을 때, 대만을 중국 영토에서 떼어내기 위해 들고 나온 술책은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 아니라 대만(Taiwan)이라는 국호로 유엔에 가입하려는 시도다. 그는 2007년 9월 대만의 유엔가입을 추진하면서 2008년 3월 총통선거 때 대만의 유엔가입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하였고, 9월 15일 가오슝에서는 대만의 유엔가입을 촉구하는 대규모 시가행진이 있었다.

사태가 악화되자, 인민해방군은 대만군의 미사일 사거리 안에 있는 상하이(上海)에서 가장 큰 규모로 방공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함재헬기를 동원한 대규모 해상기동훈련을 대만 앞바다에서 실시하였다. 인민해방군이 해상기동훈련을 하려고 출동하자 주일미국군과 일본 자위대의 전투기 편대가 위협비행을 하였다.

이처럼 끊이지 않는 대만전쟁위기는, 중국이 대만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미국이 대만을 지배하고, 대만 분리 독립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중국과 대만이 양안(兩岸) 정치협상으로 대만문제를 해결하는 평화적 해결방도는 사실상 막히고 말았다. 그래도 이따금씩 양안 정치협상이 재개되고, 중국과 대만의 경제협력과 상호교류가 증가세를 타고 있지만, 그러한 움직임은 대만문제를 해결하여 영토를 보전하려는 중국의 노력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중국에게 남아있는 선택은 무력으로 대만군을 제압하고 대만을 탈환하여 영토를 보존하는 것밖에 없다.

대만탈환전쟁은 2012년에 일어나는가?

인천과 강릉을 잇는 한반도 중부의 동서 직선거리는 194km인데, 대만의 남북 직선거리는 370km, 동서 직선거리는 130km다. 한반도 비무장지대(DMZ)는 폭이 4km인데, 대만해협은 폭이 160km다. 인민해방군이 대만에 상륙하려면 160km 거리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 대만 북쪽은 동중국해로 통하고, 동쪽은 필리핀해로 통하고, 남쪽은 남중국해로 통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주일미국군과 일본 자위대가 동중국해를 남하하여 대만 북부로 향하고, 미국군이 필리핀해를 서진하여 대만 동부로 향하고, 오스트레일리아군이 남중국해를 북상하여 대만 남부로 향할 수 있다.

지난 10년 동안 인민해방군은 군비증강에 힘을 기울였다. 인민해방군은 150km 밖에 있는 적군을 타격할 소브레메니급 미사일 구축함(Soveremenny-class missile destroyer) 4척, 전진에 치명타를 날릴 킬로급 공격잠수함(Kilo-class attack submarine) 12척, 그리고 비행거리가 3,000km인 최신형 전투폭격기 수호이(Su)-30 96대, 비행거리가 3,720km인 자국산 전투폭격기(J-11) 200대를 작전 배치하였고, 2006년 10월에는 처음으로 공중급유훈련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다.

거기에 더하여, 인민해방군은 위력적인 장거리 타격수단도 마련하였다. 이를테면, 2005년 6월 인민해방군은 핵추진 잠수함에서 수중발사 미사일을 성공적으로 발사하였다. 길이가 133m이고, 최대 배수량이 10,000t인 이 핵추진 잠수함은 수중발사 장거리 미사일 16기를 싣고 다닌다. 또한 인민해방군은 사거리가 3,000km에 이르는 극초음속 대함 탄도미사일(hypersonic anti-ship ballistic missile)을 2006년에 시험 발사하고, 2008년에 작전 배치하였다. 발사차량에서 쏘는 극초음속 대함탄도미사일을 보유한 군대는 전 세계에서 인민해방군밖에 없다. 또한 인민해방군은 2009년 10월 1일에 진행한 군사행진에서 처음 공개한, 탄두무게 500kg, 사거리 1,500km, 비행속도 마하 1.5-2.5로 알려진 순항미사일(CJ-10)도 작전 배치하였다. 이 순항미사일은 차량발사대에서 지대지 미사일로 쏠 수 있고, 전략폭격기(Xian H-6K)에서 공대지 미사일로도 쏠 수 있는데, 스텔스 기능까지 있다.

이러한 군비증강 동향을 보면, 인민해방군이 대만을 탈환할 전쟁준비를 끝마쳤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은 군사적 준비만이 아니라 정치적 준비도 갖췄다. 2005년 3월 14일에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반국가분열법’이 채택되었는데, 이것은 대만을 분리 독립시키려는 세력을 무력으로 응징하는 대만탈환전쟁의 법적 근거다.

중국이 이처럼 대만을 탈환할 정치적, 군사적 준비를 모두 갖추었으므로, 대만탈환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결심에 달렸다. 대만 국방부 부부장 출신 린중빈(林中斌) 탐캉(淡江)대학교 교수는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South China Morning Post)> 2004년 7월 16일자 기사에서 중국과 대만이 2012년에 전쟁을 벌일 것으로 예견하였고, 2004년 12월 미국 육군 제5 군단 작전처(G3)의 용역의뢰를 받아 분쟁위험지역 시나리오를 작성한 미국 랜드연구소(RAND Coporation)는 인민해방군이 2012년에 대만군을 공격할 것으로 예견하였고, 미국 케이토 연구소(Cato Institute) 텟 카펜터(Ted G. Carpenter) 연구원은 2005년에 펴낸 자신의 책 ‘다가오는 미국과 중국의 전쟁(America’s Coming War with China)’에서 미국이 2013년에 중국과 전쟁을 할 것으로 예견하였다.

인민해방군의 대만탈환전쟁 시나리오

인민해방군의 대만탈환전쟁은 미사일을 집중발사하는 선제타격으로 개시된다. 2009년 10월 20일 대만 국방부가 발표한 ‘2009년 국방백서’에 따르면, 인민해방군은 대만 전역을 사거리 안에 둔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 1,300기를 대만을 겨냥하여 배치하였다고 한다. 중국 푸젠(福建)성 푸저우(福州)에서 대만 북쪽의 타이페이(臺北)까지는 251km이고, 푸젠성 장저우(漳州)에서 대만 남쪽 가오슝까지는 395km인데, 인민해방군은 사거리를 500km로 줄인 대신에 탄두무게를 늘린 강력한 단거리 미사일을 집중 발사할 것이다. 인민해방군이 대만군 기지들을 향해 미사일을 쏘면, 대만군도 대만해협과 동중국해에 인접한 중국 본토의 군사기지들을 향해 미사일을 쏜다. 인민해방군과 대만군의 미사일 교전에서 결정타를 입는 쪽은 대만군이다.

인민해방군은 대만군 기지를 미사일로 집중 타격한 직후, 전투기 500대를 출격시킨다. 이 전투기들은 미사일 공격에도 살아남아 이륙한 대만군 전투기들과 공중전을 벌이고, 미사일 공격으로 파괴하지 못한 대만군 기지를 폭격한다.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DIA)이 2010년 1월 21일에 펴낸 보고서는, 대만군 전투기 400대 가운데 F-5 60대는 노후기종이고, 대만산 경전투기(F-CK-1) 140대는 전투능력이 너무 약해서, 실전에서 쓸 만한 전투기는 200대밖에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

미사일 공격과 공중강습으로 대만군 방공망이 와해되면, 인민해방군은 상륙작전을 시작한다. 인민해방군은 정예병력으로 양성한 ‘긴급기동작전부대’를 상륙작전에 투입하는데, 이 부대는 공수특전사단과 기계화사단으로 편성되었다. 인민해방군 공수특전병력 30,000명은 각종 군용 수송기 600대에 나눠 타고 대만 각지 상공에서 낙하산으로 투하된다. 거기에 더하여, 각종 군용 수송헬기 550대도 공수특전병력 11,000명을 실어 나른다.

또한 20개 기계화사단으로 편성된 30만명 병력 가운데서 상륙함을 타고 대만 해안으로 진격할 선발대는 50,000명이다. 이 병력은 보병전투차량, 장갑차, 경전차 1,000여 대를 함께 싣고 시속 26km로 항해할 각종 상륙함 560척에 나눠타고 대만 해안으로 진격한다. 민간 쾌속선에 나눠탄 병력 10,000명도 그 뒤를 따른다. 기계화사단 병력 60,000명과 각종 전투장비를 실은 대규모 상륙함대는 공격헬기(Harbin WZ-9) 300대를 앞세우고 대만 해안 곳곳에 상륙한다.

공중에서 낙하산으로 투하되거나 해안에 상륙하여 대만 각지의 전략거점들을 향해 진격할 인민해방군은 101,000명이고, 그들의 진격을 저지할 대만군은 지상군 병력 130,000명과 해병대 병력 30,000명을 합해 160,000명이다. 병력수를 단순비교하면, 대만군이 1.6 대 1로 우세하지만, 대만군 기지들은 인민해방군의 미사일 공격과 전폭기 공습으로 이미 대부분 파괴되었고, 더욱이 정예병력을 상대로 방어전을 벌여야 하므로 인민해방군의 진격을 저지하지 못한다.

그런데 인민해방군이 대만탈환전쟁에서 부닥치는 난관은,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USS George Washington, CVN-73)를 주축으로 한 제7 함대 항모강습단이 일본 요코스카(橫須賀) 해군기지를 긴급 출항하여 대만 앞바다에 들이닥치는 것이다.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앞바다에 있는 제3 함대 항모강습단이나 중동지역 페르시아만에 있는 제5 함대 항모강습단을 대만 앞바다에 추가로 보내려면 적어도 닷새가 걸리기 때문에, 동아시아 급변사태에 대응할 미국군 해상전력은 제7 함대 항모강습단밖에 없다.

또한 일본 해상자위대 산하 5개 호위함대 가운데 제1 호위함대(Escort Flotilla), 제4 호위함대, 잠수함대가 제7 함대 항모강습단과 연합함대를 구성한다. 1개 호위함대는 헬기를 1대씩 탑재한 이지스 구축함 3척과 일반 구축함 5척으로 편성되므로, 구축함 16척이 출전한다. 일본 해상자위대에는 잠수함이 20척 있는데, 그 가운데서 최신형 소류급(Soryu-class) 2척, 오야시오급(Oyashio-class) 5척, 하루시오급(Harushio-class) 3척을 포함해 모두 10척이 출전한다.

미일 연합함대가 전속력으로 항진하면 대만 북쪽 앞바다에 도착하기까지 37시간 걸린다. 인민해방군 상륙함대가 대만해협을 건너는 데 걸리는 시간은 5시간이므로, 그들은 미일 연합함대가 대만 앞바다에 도착하기 전까지 32시간 동안 대만군을 제압하여야 한다.

인민해방군이 대만탈환전쟁에서 부닥치는 또 다른 난관은, 오키나와 가데나(嘉手納) 공군기지에 있는 미국 공군 제44 전투비행대대와 제67 전투비행대대의 전투기(F-15), 그리고 오키나와 나하(那覇) 공군기지에 있는 일본 항공자위대 제83 항공비행대의 전투기(F-15) 54대로 편성된 미일 연합편대가 대만 상공에 들이닥치는 것이다. 오키나와에서 대만까지는 630km이므로, 미일 연합편대는 이륙 후 불과 30여 분만에 대만 상공에 다다른다. 거기에 더하여, 괌(Guam)의 앤더슨 공군기지(Anderson AFB)에서 미국군 공습편대가 대만을 향해 출격한다. 강력한 공습편대가 미국 공군의 전술지휘통제기(E-8 Joint STARS)의 지휘를 받으며 시속 945km로 2,759km를 비행하면, 3시간 만에 대만 상공에 다다른다.

중국의 대만탈환전쟁에서 승패를 좌우할 결정적인 요인은, 인민해방군이 미일 연합편대와 미국군 공습편대의 대만 접근을 저지하는 방어전이다. 인민해방군이 해군과 공군을 크게 증강한 것을 보면, 미일 연합편대와 미국군 공습편대의 대만 접근을 저지하는 방어전에서 압승하지는 못하겠지만, 우세승을 거둘 수 있다. 우세승의 비결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인민해방군 요격편대와 북해함대 일부가 오키나와 방향으로 진격하여 미일 연합편대를 배후에서 공격할 태세를 취하면, 그들은 대만 출격을 망설이게 된다. 다른 하나는 인민해방군이 잠수함대를 전쟁 직전에 미리 괌 앞바다에 수중 매복시키고, 필리핀해로 진격한 인민해방군의 전함, 요격기, 무인항공기들이 대만으로 다가오는 미국군 공습편대의 진격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인민해방군이 필리핀해 상공에 진격하여 벌떼처럼 사방에서 공격하는 군집전술(swarming tactics)을 쓰면, 손실이 크겠지만 미국군 공습편대의 대만 접근을 차단할 수 있다.

이처럼 인민해방군이 미일 연합편대와 미국군 공습편대의 대만 접근을 저지하면, 미일 연합함대가 대만 앞바다에 들이닥치기 전에 대만탈환전쟁은 인민해방군의 승리로 끝난다. 2002년 4월에 발표된 미국 국방부 보고서는 인민해방군의 집중공격을 받은 대만군이 48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할 것으로 예견하였고, 중국 언론 <환구쉬바오(環球時報)> 2004년 4월 7일자 보도는 인민해방군이 48시간 안에 대만을 기습 점령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고, 미국 정보분석회사 스트래트포(STRATFOR)가 2007년 10월에 발표한 자료는 인민해방군이 길면 7일 안에, 짧으면 24시간 만에 대만군을 제압할 것으로 예견하였다.

인민군의 72시간 전쟁 시나리오

인민해방군이 대만군을 공격하면, 인민군은 ‘대만방어전’에 나선 주일미국군과 일본 자위대를 향해 선제기습타격을 가한다. 대만 전쟁과 한반도 전쟁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이다. 인민군은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미국군과 싸우는 ‘통일성전’을 벌이겠다는 전의를 불태우며, 60년 동안이나 허리띠를 졸라매고 ‘최후 결전’을 준비해왔다고 하는데, 그런 인민군이 미국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나서 방어전이나 할 것으로 보는 예상은 오판이다. 미국군 해병대사령부 산하 군사정보반이 1997년에 펴낸 자료는, 인민군에게 방어전 개념은 없고, ‘킥 앤드 러쉬’ 전술(kick’n rush tactics)을 쓰는 공격전 개념만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인민군의 공격전술은 적진을 깊숙이, 기습적으로 들이치는 미사일 선제타격과 동시에, 고속 기동화된 군사력을 한꺼번에 폭발시켜 순식간에 적진을 격파하는 입체전 전술이다.

한반도 전쟁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2010년 1월 18일부터 3월 1일까지 연속 발표한 나의 글 7편에서 다각도로 논하였으므로 이 글에서 재론하지 않고, 인민군이 주일미국군과 일본 자위대를 기습 타격하는 시나리오를 덧붙인다. 제7 함대 항모강습단과 일본 해상자위대 3개 호위함대및 잠수함대로 합동 편성된 미일 연합함대가 동중국해로 긴급 출동하여 대만과 일본 큐슈(九州) 중간해역을 지날 때쯤, 인민군은 일본에 있는 주일미국군과 일본 자위대의 본거지를 기습 공격한다. 인민군이 동해를 건너는 원거리 작전에 동원할 무기는 미사일, 잠수함, 무인항공기, 자폭공격기다.

첫째, 인민군은 동해안 지하시설에 은폐해둔 중거리 미사일을 주일미국군과 일본 자위대의 주요군사기지들을 향해 불시에 집중 발사한다.

원산을 기산점으로 미사일 비행거리가 가까운 순서대로 13개 격파대상을 열거하면, 가수가(春日) 공군기지(744km), 이와쿠니(岩國) 항공기지(764km), 사세보(佐世保) 해군기지(807km), 뉴타바루(新田原) 공군기지(884km), 아쯔기(厚木) 항공기지(1,100km), 요코스카(橫須賀) 해군기지(1,132km), 히야쿠리(百里) 공군기지(1,182km), 요코다(橫田) 공군기지(1,378km), 이루마(入間) 공군기지(1,381km), 가데나 공군기지(1418km), 미자와(三澤) 공군기지(1,429km), 나하 공군기지(1,500km), 후텐마(普天間) 항공기지(1,563km)이다. 미사일 기습타격으로 적군의 주요군사기지를 격파하는 것을 참수전술(decapitation tactics)이라 한다.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인 조셉 버뮤디즈(Joseph Bermudez)와 마크 웨이드(Mark Wade)가 펴낸 자료에 따르면, 인민군이 2003년에 작전 배치한, 외부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중거리 미사일은 사거리가 2,500-4,000km이고, 탄두무게가 650kg이다. 인민군은 동해 방면 지하발사대들에만 이 중거리 미사일 1,000기를 집중 배치하였다. 주일미국군과 일본 자위대의 13개 주요군사기지마다 77발씩 퍼부을 엄청난 양이다. 고폭탄이 1개 군사기지마다 8t씩 터지면, 군사기지는 복구하기 힘들 만큼 초토화된다.

물론 주일미국군과 일본 자위대는 이지스 구축함과 지상기지에 배치한 미사일방어체계를 긴급 가동하여, 빗발쳐 날아오는 인민군 미사일을 막아보려고 몸부림칠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 모의훈련에서는 미사일이 날아오는 방향과 시각을 미리 알려주고 요격미사일을 발사하여 방어할 수 있지만, 실전에서는 미사일이 날아오는 방향과 시각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모의훈련에 나오지 않는 레이더 회피전술, 방공망 교란전술 같은 갖가지 돌발변수들이 실전에서 튀어나오기 때문에 미사일방어체계는 쓸모가 없게 된다.

둘째, 동해에 고정 배치된 일본 해상자위대 함대는 제3 호위함대다. 이 함대는 이지스 구축함 3척, 일반 구축함 5척, 그리고 연안방어를 맡는 하야부사급(Hayabusa-class) 미사일정(missile boat) 10척으로 편성되었다. 미사일 요격임무를 맡은 이지스 구축함 3척이 자기들 머리 위로 날아가는 인민군 미사일을 요격하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하여 허둥거릴 때, 바다 밑에 매복하였다가 소리 없이 다가온 인민군 스텔스 잠수함대는 수중어뢰를 일제히 발사하여 제3 호위함대를 궤멸시킨다.

셋째, 13개 주요군사기지들이 미사일로 격파당하고, 제3 호위함대가 궤멸되었는데도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 경우, 인민군은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그것은 인민군 스텔스 자폭공격기들이 동해에 접한 후쿠이현(福井縣)에서 가동 중인 원자로를 공격하는 것이다. 후쿠이현 바닷가에는 원자로 11기가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인민군의 타격대상으로 완전히 노출되었다. 일본 원자력발전소는 지진에 대비하여 견고하게 지어졌으므로 중거리 미사일이 아니라 스텔스 자폭공격기로 들이쳐야 깨진다.

인민군의 미사일 공격에서도 운 좋게 살아남은 일본 자위대 방공망에 자폭공격기 공습통로를 뚫어놓기 위해 인민군은 무인항공기를 공습방향으로 벌떼처럼 발진시켜 잔존 방공망의 위치를 전부 노출시킨다. 노출된 방공망에 두 번째로 미사일 집중타격을 가한다. 스텔스 자폭공격기 편대는 방공망에 뚫린 공습통로를 통해 후쿠이현 상공으로 날아간다.

원산으로부터 미하마(美浜) 원자력발전소(3기)까지 810km, 다카하마(高浜) 원자력발전소(4기)까지 823km, 쯔루가(敦賀) 원자력발전소(4기)까지 841km다. 인민군이 자폭공격에 맞춰 성능을 개조한 스텔스 자폭공격기의 비행거리는 미그-15가 1,975km, 미그-17이 1,670km이고, 비행속도는 시속 1,100km이므로, 원산 인근에 있는 갱도 활주로에서 이륙하여 약 45분 만에 타격목표 상공에 다다른다. 자폭공격기 한 대마다 고폭탄 1.5t씩 실었으므로, 73대가 출격하면 고폭탄이 원자로 1기당 10t씩 터진다. 고폭탄 10t으로 원자로를 깨부수면, 섭씨 2,700도 고열로 지상의 모든 물체가 녹아내리면서 엄청난 방사능이 퍼져나간다. 그 다음에 일어날 재앙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원폭공포증에 시달리는 일본은 후쿠이현 원자로 11기가 모두 파괴되기 전에, 황망히 항복할 것이다. 일본이 북측에게 항복하는 것은 한반도 재침야욕을 품고, 과거청산을 거부하고, 독도강탈책동에 매달리며, 총련 동포를 괴롭혀온 일본의 우익세력을 영구 퇴출되고 일본이 군사적으로 비무장화되고 정치적으로 중립화되는 ‘재생의 길’이다.

한반도 전쟁과 대만 전쟁이 한꺼번에 일어나면, 미국군 지휘부는 미일 연합함대를 어느 전선에 투입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미국군 지휘부가 ‘대만 방어’를 포기하고 미일 연합함대를 한반도 전선에 투입하기로 결정하면, 그 함대는 즉각 기수를 돌려 동중국해를 북상하여 한반도 앞바다로 향한다. 그러나 인민해방군 북해함대가 상하이 앞바다에 포진하였으며, 인민군이 부산을 점령하였을 뿐 아니라 인민군 스텔스 잠수함대가 대한해협에 수중매복하고 동해 진입을 가로막았다는 긴급정찰보고를 받은 미일 연합함대는 오키나와 앞바다에서 진퇴양난에 빠진다.

인민군의 초강력한 선제타격 앞에 무릎을 꿇은 일본이 평양으로 항복전문을 발송한 시각,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북측 국방위원회 앞으로 긴급전문을 띄워 제발 한반도 전쟁을 여기서 끝내자고 애걸한다. 인민군은 미사일, 방사포, 장거리포를 집중 발사하여 주한미국군과 한국군의 군사기지를 파괴하였고, 그에 대응하여 주한미국군과 한국군도 미사일, 다연장 로켓포, 장거리포로 반격하였으나 인민군의 지하요새 겉면만 파괴한 상태에서 한반도 전쟁은 갑자기 종전국면으로 접어든다. 인민군이 기습타격, 고속돌파, 양익포위, 조기섬멸을 배합한 특유한 공격전술로 서울과 부산을 점령한 조건에서 악전고투하던 한국군이 미국군사령관으로부터 느닷없이 전투중지명령을 받고 어리둥절 하는 사이에, 한반도-대만 동시전쟁은 개전 후 72시간 만에 끝나는 것이다.

3일 전쟁에서 미국이 패전하고 일본이 항복한 뒤, 이 글의 지면에 다 채울 수 없을 만큼 상상을 초월한 변화가 한반도에서 일어난다. (2010년 3월 8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