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치사를 바꿔놓은 담판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대통령을 흥분시킨 통신문

1971년 5월 하순 어느 날, 미국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 1913-1994)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문서 한 장을 손에 들고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 대통령이 받은 가장 중요한 통신문이다(This is the most important communication that has come to an American president since the end of World War II). 그의 목소리는 자못 흥분되어 있었다.

닉슨 대통령을 흥분시킨 통신문은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중국 총리가 그에게 보낸 것이었다. 저우 총리가 닉슨 대통령에게 통신문을 보낸 이후 세계 정치사를 바꿔놓은 커다란 변화가 중미관계에서 일어나기까지, 중국과 미국은 물밑접촉을 계속해왔다. 그 내역은 이렇다.

중국과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줄곧 적대관계에 있었지만, 닉슨 정부가 출범하기 훨씬 이전부터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 주재하는 두 나라 대사관은 대화통로를 유지해왔다. 그러다가 그 대화통로마저 1968년 1월에 차단되었다. 1968년 11월 미국은 바르샤바 중미 대사급 접촉을 재개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중국은 응답하지 않았다.

미국 국무부는 1968년 11월 하순에 바르샤바에 주재하는 월터 스토우쓸(Walter J. Stoessel, Jr. 1920-1986) 미국 대사에게 현지 중국대사관을 직접 접촉해보라고 지시하였다. 그 지시를 받은 스토우쓸 대사는 바르샤바에서 열린 유고슬라비아 의류전람회에 참석한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대사관에서 나온 외교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는데, 미국 대사의 돌발적인 접근에 놀란 중국 외교관은 자리를 피해버리고 말았다.

1969년 1월 20일 백악관의 주인이 된 닉슨 대통령은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을 내세워 중미관계를 개선하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들어갔다. 중미관계를 개선하려는 닉슨 정부의 행동은 바르샤바 중미 대사급 회담을 재개하려는 것으로 나타났다. 첫 번째 접촉시도에서 실패한 스토우쓸 대사는 접촉시도를 계속하였고, 마침내 바르샤바 주재 중국대사관을 찾아가 레이양(雷陽) 임시대사와 만나는 비공식 접촉에 성공하였으니, 그 날은 1969년 12월 11일이다.

비공식 접촉에 성공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닉슨 정부는 1969년 12월 24일 제7함대 항모강습단의 대만해협 순항을 자제한다고 발표하여 유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중국과 미국은 1969년 12월 11일에 있었던 비공식 접촉을 계기로 바르샤바 주재 양국 대사관에서 번갈아 가며 비공식 접촉을 계속하더니, 중단 이후 2년이 지난 1970년 1월 20일 마침내 바르샤바에서 대사급 회담을 재개하였다.

1970년 1월 20일 닉슨 정부의 요청에 따라 바르샤바에서 재개된 중미 대사급 회담은 제135차 회담이었다. 135번째로 열린 것이었으니, 회담재개라 하였지만 이전부터 지루하게 이어진 회담을 다시 시작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따라서 중미관계 개선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닉슨 대통령이 중미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취한 결정적인 행동은 중미 대사급 회담 재개가 아니라, 그가 직접 은밀히 추진한 ‘친서외교’였다.

백악관은 왜 ‘친서외교’에 나섰을까?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은 1979년에 펴낸 회고록 ‘백악관 세월(The White House Years)’에서 “베이징과 연락통로를 개설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중국에게 알려주기 위해” 두 갈래 비공식 중개통로를 사용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의존한 중개자들은, 당시 중국과 우호적이었던 무하마드 야히아 칸(Agha Muhammad Yahya Khan, 1917-1980) 파키스탄 대통령과 니콜라에 차우세스쿠(Nicolae A. Ceausescu, 1918-1989) 루마니아 노동당 서기장이었다.

닉슨 대통령은 1970년 11월 10일 중국을 공식방문한 칸 파키스탄 대통령을 통해 자기 친서를 중국에 전하였는데, 친서의 한 대목은 이러하였다. “우리는 백악관과 베이징 사이에 직접적인 연락통로를 개설하기 위해 준비합니다. 연락통로 개설에 베이징이 동의한다면, 그러한 연락통로가 있다는 사실은 백악관 이외에 누구도 알 수 없게 될 것이며, 결정권을 행사할 완전한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음을 보증합니다.”

닉슨 대통령이 중미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친서외교’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알려진 정설은, 닉슨 대통령이 베트남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중미관계를 개선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을 끝내기 위한 종전회담은 1968년 5월 10일에 처음으로 열렸는데, 1973년 1월 27일 베트남민주공화국(북), 베트남공화국(남), 남베트남공화국 임시혁명정부, 미국이 프랑스 파리에서 4자 평화협정(Peace Accords)을 맺을 때까지 다섯 해 동안 이어졌다.

당시 중국은 북베트남을 적극 지원하였지만, 교전주체로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것은 아니다. 만일 중국이 6.25전쟁에서 그러한 것처럼 베트남전쟁에서도 교전주체로 참전하였다면,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끝내기 위해 중미관계를 정상화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중국은 베트남전쟁의 교전주체가 아니었다. 이것은 베트남전쟁 종전문제와 중미관계 정상화문제가 직접적으로 결부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닉슨 대통령이 베트남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중미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보는 기존 정설은, 그를 중미관계 개선으로 떠민 진짜 원인이 드러나지 않도록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고 있을 뿐이다.

닉슨 대통령이 중미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진짜 원인은, 1970년 4월 24일 중국이 처음으로 성공한 인공위성 발사에 있다. 그 날 오후 9시 35분, 주콴위성발사중심(酒泉衛星發射中心)에서 위성발사체 창정(長征) 1호에 실려 대기권 밖으로 날아오른 중국의 첫 인공위성 동팡홍(東方紅) 1호는 전파송신장치를 탑재한 무게 173kg짜리 소형 인공위성이었다. 동팡홍 1호가 지구궤도를 회전한 기간은 26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중국이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한 것은 중미관계를 뒤흔든 대사변이었다. 1964년 10월 16일 지하핵실험에 성공하고, 1967년 6월 17일 수소폭탄 실험에도 성공한 중국은, 1970년 1월 30일 2단형 미사일 동펑(東風) 4호 발사실험에 성공하였다. 동펑 4호는 3.3 메가톤급 핵탄두를 싣고 4,750km를 날아가는 중거리미사일(IRBM)이다. 1970년 1월에 중거리미사일 발사실험에 성공하고 이어 4월에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함으로써, 중국은 동방의 유일한 핵보유국으로 세계무대에 등장하였다.

중국이 핵보유국으로 등장한 것은, 미국의 핵공격에 핵보복으로 맞설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하였다. 미국은 자국 본토를 핵미사일로 공격할 수 있는 중국에게 종래와 같이 일방적인 핵위협을 가할 수 없게 되었다. 중미관계에서 일어난 이러한 전략적 변화는, 닉슨 대통령을 ‘친서외교’에 떠민 결정적인 원인으로 되었다.

1971년 3월 3일 중국이 두 번째 인공위성을 쏘아올리자 한층 더 다급해진 닉슨 대통령은 중미관계 개선을 서둘렀다. 그는 1971년 4월 14일 중국에 대한 무역제재 조치를 완화하고 중국과 상호교류를 확대하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한 5개 항목의 새로운 중국정책을 발표하였고, 4월 16일에는 기자회견을 통해 중국정부를 인정하고, 중국과 수교하겠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중국방문 의사까지 슬쩍 내비쳤다.

조급해진 닉슨 대통령은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을 중국에 밀사로 파견하려고 서둘렀다.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은 1971년 5월 10일자로 작성하여 중국에 보낸 통신문에서 자신의 중국방문 의사를 밝혔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닉슨 대통령은 1971년 6월 1일 루마니아 노동당 및 정부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공식방문한 차우세스쿠 루마니아 노동당 서기장를 통하여 또 다시 관계개선 의사를 전달하였다.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이 대통령 밀사자격으로 베이징에 나타난 때는 1971년 7월 9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미국 여론은 중미관계 개선에 싸늘한 반응을 보였고, 그러한 여론을 의식한 국무부는 중미관계를 성급하게 개선하는 것을 위험하게 보았다. 그러나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은 정부 안팎의 반대여론을 무시하고 중미관계 개선을 밀어붙였다.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중미관계를 개선하려고 하니, 밀사파견과 비밀담판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 로저스(William P. Rogers, 1913-2001) 당시 국무장관마저 닉슨 대통령의 중국방문이 임박하였음을 알지 못하였다.

중국은 왜 미국의 관계개선 제안에 응하였을까?

미국을 주적으로 삼았던 중국은 왜 닉슨 대통령의 관계개선 제안에 응하였을까? 지금까지 알려진 정설은, 미국과 소련이 접근하고 소련과 중국이 대립하자, 중국으로서는 미국과 소련을 모두 적대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대미 적대관계를 청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소련과 미국의 관계가 해빙분위기로 접어든 때는 1959년이었다. 소련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후르시쵸프(Nikita Khrushchev, 1894-1971)는 1959년 9월 15일 미국을 방문하였고, 9월 25일부터 27일까지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빗(Camp David)에 머물면서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9)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 이후 미소 정상회담은 1960년 5월 16일 프랑스 파리에서, 1961년 6월 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1967년 6월 23일 미국 뉴저지주 글래스보로에 열렸다.

소련은 이른바 평화공존을 말하며 미국에게 접근하면서도 중국에게는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1959년 6월 20일 소련은 1957년 10월 15일에 체결한 ‘중소 국방신기술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중국에게 더 이상 핵무기 제조기술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통보하였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61년 7월 16일 자력갱생으로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한다고 결정하였다.

1963년 6월 14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총노선에 대한 제안’이라는 발표문을 내놓으면서 소련에 대한 전면적인 이념논쟁을 개시하였다. 1967년 1월 27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소련 수정주의의 흉포한 도발을 격퇴하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고, 베이징에서 반소 군중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중국은 소련을 사회제국주의(social-imperialism)라고 비난하였다.

게다가, 국경분쟁은 중소대립이 얼마나 격화되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국경하천인 우수리강(烏蘇里江)에 있는, 중국에서는 전바오(珍寶)로 부르고 러시아에서는 다만스키(Damansky)로 부르는 섬에서 중국 국경수비대와 소련 국경수비대가 1969년 3월 2일과 3월 15일에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 두 나라 국경수비대는 1969년 6월 10일과 8월 13일에도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자치구에서 무력충돌을 일으켰다. 국경지대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 사태가 심각해지자, 1969년 9월 11일 저우 총리와 알렉세이 코시긴(Aleksei N. Kosygin, 1904-1980) 소련 수상은 베이징 공항에서 긴급회담을 갖고, 중소국경의 현상유지와 무력충돌 재발방지를 합의하였으며, 10월 20일에는 베이징에서 중소국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차관급회담이 열렸다.

이처럼 중소관계가 악화되고, 거기에 더하여 중국의 사회주의 문화대혁명이 실패로 끝나면서 중국 내부의 정치적 불안이 커지자 안보 불안감을 느낀 중국이 대미관계를 개선하려고 하였다는 설명이 기존 정설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나 중미관계를 개선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쪽은 중국이 아니라 미국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설명은 설득력을 잃는다. 중미관계를 개선하려고 적극적으로 힘쓴 닉슨 대통령의 제안이 나오자 중국이 그에 대응하였던 것이지, 중국이 중미관계를 개선하려고 먼저 나선 것은 아니었다.

중국이 닉슨 대통령의 관계개선 제안에 응한 까닭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자료는, 중국에게 비밀연락통로를 개설하자고 제안한 닉슨 대통령의 전문을 들고 1970년 11월 10일 베이징을 방문한 야히아 칸 파키스탄 대통령을 만난 저우 총리가 백악관에 전해달라고 그에게 요청하면서 한 발언이다. 저우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미국측에게 대만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진정으로 있다면, 미국 대통령의 대표가 그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베이징에 오는 것을 환영할 것이다.”

저우 총리는 칸 대통령을 접견한 때로부터 일주일 뒤인 1970년 11월 21일 베이징을 방문 중이던 게오르게 라둘레스쿠 루마니아 부총리(Gheorghe Radulescu, 1914-1991)를 접견하였는데, 그 자리에서도 저우 총리는 대만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저우 총리는 “대만문제를 해결하고, 중미관계를 개선하는 대화를 갖기 위해” 중국정부는 닉슨 대통령의 특사나 닉슨 대통령 자신의 베이징 방문을 환영한다는 뜻을 백악관에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닉슨 대통령은 1978년에 펴낸 책 ‘리처드 닉슨 회고록(The Memoirs of Richard Nixon)’에서 1971년 초에 중국이 루마니아를 통해 자기에게 보낸 전문에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고 썼다. “양국 사이에 두드러진 쟁점 하나가 있는데, 미국의 대만점령이 그것이다. (줄임) 만일 미국이 이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한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은 미국의 특별대표단 파견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명백하게도, 닉슨 대통령의 관계개선 제안에 대한 중국의 대응은 대만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중국의 표현을 빌리면, 대만문제는 곧 미국의 대만점령문제다. 중국은 중미관계 개선하려는 목적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중미관계 개선을 통해 대만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을 추구하였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베이징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가 담긴 키신저의 1971년 5월 10일자 통신문을 받아본 저우 총리는 중국공산당 정치국 회의를 주재하였는데, 그 회의에서는 중미접촉이 대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국의 입지를 넓혀줄 것이므로 중미접촉을 추진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정치국 회의 결정에 따라, 저우 총리는 백악관에 답신을 보냈다. 키신저의 통신문에 대한 답신으로 작성된 전문에서 저우 총리는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이 베이징에 와서 중국 고위관리들과 만나는 것을 환영한다고 썼다. 닉슨 대통령은 키신저를 베이징에 파견하고 싶다는 요청을 수락한 저우 총리의 답신을 받고 흥분하였다.

세계 정치사를 바꾼 1971년 7월 담판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은 닉슨 대통령의 밀사로 1971년 7월 9일부터 11일까지 베이징을 비공개로 방문하였다. 1970년대 세계 정치사를 뒤바꾼 역사적인 담판이 벌어진 것이다.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이 1971년 7월 14일자로 작성하여 닉슨 대통령에게 보고한 ‘저우언라이와의 회담(My Talks with Chou En-lai)’이라는 제목으로 된 장문의 비망록이 있다. 비망록에서 그는 저우 총리를 처음 대면하였을 때 받은 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그는 실제로 소련 관리들에게서 풍기는 자기의식적 권위감이 전혀 없는 편안하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비망록에 따르면, 키신저 밀사가 길게 설명하는 것을 들은 저우 총리는 대뜸 대만문제부터 거론하였다고 한다. 비망록에는 “그는 즉시 자기들의 근본적 관심사인 대만으로 화제를 돌렸다(He immediately moved to their fundamental concern, Taiwan)”고 쓰여있다.

2002년 3월 3일 <뉴욕 타임스>가 보도한 저우언라이-키신저 담판기록에는 저우 총리가 말한 대목이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역사는 대만이 1천년 이상 중국에 귀속되었음을 입증한다. 그 기간은 롱아일랜드(뉴욕 맨해튼 동쪽에 붙어있는, 인구 770만명이 사는 섬-옮긴이)가 미국의 일부로 된 기간보다 더 길다. 그러므로 중국을 인정하는 데서, 미국은 그 어떤 예외 없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해야 한다(The U.S. must recognize the P.R.C. as the sole legitimate government of China and not make any exceptions). 이것은 우리가 미국의 마지막 주 하와이 또는 그보다 작은 롱아일랜드에 대한 미국의 주권을 어떤 예외라고 생각하지 않고, 미국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대만은 중국의 성이며, 양보할 수 없는 중국 영토의 일부다(Taiwan is a Chinese province and is an inalienable part of Chinese territory).”

저우 총리가 담판에서 제기한 대만문제는, 위의 발언에서 나타난 것처럼, 중국의 영토주권을 확립하는 문제였다. 중국이 대만에 대한 영토주권을 확립하는 문제는 대만주둔 미국군을 철군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영토주권문제와 철군문제가 직결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날, 저우 총리의 담판발언은 이렇게 이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두 번째 문제로 연결된다. 즉 미국은 대만과 대만해협에서 정해진 기간 안에 자기의 모든 군사력을 철수하고 자기의 모든 군사시설을 해체하여야 한다. 이것은 그 문제에 대한 지당한 도리다(This is the natural logic of the matter).”

닉슨 대통령에게 보고한 비망록에서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은 저우 총리가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을 무효로 간주해야 한다(The U.S. must consider that the U.S.-Taiwan Mutual Defense Treaty is invalid)”고 말하였다고 썼다. 비망록을 읽어보면, 저우 총리가 담판에서 영토주권문제와 미국군 철군문제를 제기하자 키신저는 매우 당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우 총리가 백악관에 보냈던 통신문이나 바르샤바에서 진행된 중미 대사급 회담에서 언급되지 않은 영토주권문제, 철군문제, 상호방위조약 무효화문제를 저우 총리가 담판에서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저우 총리가 위와 같은 세 가지 근본문제를 중미관계 정상화의 선결조건으로 제시하자, 키신저 밀사는 아래과 같이 대응하였다.

첫째, 베트남전쟁이 끝나는대로, 미국은 대만주둔 미국군 병력 가운데 3분의 2를 철군할 것이며, 중미관계 개선에 상응하여 추가로 대만주둔 미국군을 철군할 것이다.
둘째, 미국은 대만이 중국 영토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대만독립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 베트남전쟁 종전을 약속하며, 미국의 명예와 자존심이 보장된다면 미국군을 철군하는 시간표에 따라 남베트남에서 철군할 것이다.
넷째,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 종결문제는 역사가 해결해줄 것이다.

그렇다면, 저우 총리가 담판에서 제기한 세 가지 근본문제는, 중미관계를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해결되었을까? 저우 총리가 키신저 밀사에게 세 가지 근본문제를 제기한 때로부터 약 여섯 달 반이 지난 1972년 2월 28일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였다. 방문기간 중 상하이에서 채택한, 16개 항으로 된 ‘중화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의 공동코뮈니케(Joint Communique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는 저우언라이-키신저 담판의 성과였다. 공동코뮈니케는 “양측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오래 지속되는 심각한 논쟁을 검토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세 가지 근본문제에 대한 양측의 입장을 이렇게 언명하였다.

“중국측은 자기의 입장을 이렇게 재확인하였다. 대만문제는 중국과 미국의 관계정상화를 가로막는 중대한 문제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다. 대만은 오랫동안 조국에 귀속된 중국의 성(省)이다. 대만해방은 다른 나라가 간섭할 권리가 없는 중국 내부문제다. 모든 미국군과 군사시설은 대만에서 철수되어야 한다. 중국정부는 ‘하나의 중국, 하나의 대만’, ‘하나의 중국, 두 개의 정부’, ‘두 개의 중국’, 또는 ‘독립된 대만’을 조작하려는 목적을 지닌 행동 또는 ‘대만의 지위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행동을 단호히 반대한다.”

“미국측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미국은 대만해협 양쪽에 있는 모든 중국인들이 오직 하나의 중국만 존재하며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한다. 미국 정부는 그러한 입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미국 정부는 대만문제를 중국이 스스로,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재확인한다. 이러한 전망을 생각하면서, 미국 정부는 대만으로부터 모든 미국군과 군사시설을 철수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확인한다. 그 이전에, 미국 정부는 그 지역에서 긴장이 해소되는 것에 따라 대만에 있는 미국군과 군사시설을 점진적으로 감축할 것이다.”

중미관계 개선을 꺼리고 있었던 윌리엄 로저스 국무장관과 마샬 그린 (Marshall Green, 1916-1998) 국무차관은 닉슨 대통령을 수행하여 중국을 방문하는 동안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의 종결을 공동성명에 명시하자는 중국의 요구를 끝내 거부하였으며, 공동성명 원문 일부를 수정하려고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한편, 중미관계 정상화를 반대한 미국 여론은 닉슨 대통령의 중국방문이 중국에게 대만을 안겨주었다면 미국에게는 춘권채(春卷菜, egg roll)밖에 안겨주지 않았다는 비난을 쏟아냈다.

담판을 요구하는 한반도 정세

저우언라이-키신저 담판에서 저우 총리가 또 다른 ‘천하대란(turmoil under heaven)’이 일어난 곳으로 지목한 지역은 한반도다. 그는 비무장지대에서 충돌이 계속되고 있고, 미국군이 아직도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으며, 한국군이 베트남전쟁에 파병되었음을 지적하였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 키신저 밀사는 “만일 인도차이나전쟁이 끝나고 미중관계가 개선되면,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철군할 것이며, 저우 총리의 다음 임기가 끝나기 전에 주한미국군이 철군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키신저의 비망록에는 “저우언라이가 그러한 조건에서 철군과정은 주한미국군 병력 20,000명을 철군한 것으로 이미 시작된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길래,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였다”고 쓰여있다.

작성날짜가 적혀 있지 않아서 언제 작성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문맥을 읽어보면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난 1974년 8월 9일 직후에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제럴드 포드(Gerald R. Ford, Jr., 1913-2006) 대통령에게 보고한 1급비밀 비망록이 기밀해제되어 1999년 5월 14일에 언론에 공개된 바 있다. 그 비망록에 따르면, 키신저 국무장관은 중미관계 정상화를 위해 미국이 취할 세 가지 조치를 포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고 한다.
첫째, 대만에 배치한 유(U)-2기(고공정찰기)와 핵무기를 1974년 안에 모두 철수한다.
둘째, 대만주둔 미국군을 포드 정부 말기인 1977년초까지 모두 철군한다.
셋째, 중미관계를 정상화하는 또 다른 유화조치로 주한미국군을 철군한다.

키신저 국무장관이 포드 대통령에게 보고한 대로, 대만에 배치한 유(U)-2기와 핵무기는 철수되었고, 대만에 주둔하던 미국군도 철군하였다. 철군조치를 마무리한 사람은 지미 카터(Jimmy Carter) 대통령이다. 1978년 12월 15일 카터 대통령은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이 해체(scrap)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 1909-1989) 연방상원의원을 비롯한 보수파 정치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대통령이 의회동의도 받지 않고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을 폐기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카터 대통령을 연방대법원에 고소하였다.

그러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중국과 미국은 1979년 1월 1일 국교수립을 선포하였다.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에는 조약체결 일방이 상대방에게 조약종결을 통보한 날로부터 1년이 되면 자동으로 조약이 종결된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미국 국무부는 중미 두 나라가 국교수립을 선포한 1979년 1월 1일부터 1년이 되는 날 조약이 자동종결될 것임을 대만당국에 통보하였다. 1954년 12월 2일에 체결된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은 1980년 1월 1일 자동종결되어 26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만주둔 미국군 철군과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 종결은 저우언라이-키신저 담판이 벌어진 때로부터 9년만에 이루어졌으나, 저우 총리와 담판을 벌인 자리에서, 그리고 포드 대통령에게 보고한 1급비밀 비망록에서 키신저가 언급했던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는 38년이 지난 오늘도 해결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해결할 담판이 요구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2002년 10월 3일부터 5일까지 부시 대통령 특사로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James A. Kelly) 국무부 차관보와 함께 대표단 성원으로 방북했던 스탠퍼드 대학교 아시아태평양연구소(APARC) 데이빗 스트롭(David Straub) 부소장은 서울 방문 중인 2009년 11월 17일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자신이 겪은 경험을 회고하면서, 2002년 10월 4일 평양에서 열린 북미회담에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미국이 우려하는 것은 담판으로 해결 가능하다. 최고지도자급 회담으로도 해결될 수 있겠지”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중요한 것은, 강석주 제1부상이 한반도의 근본문제를 북미정상회담에서 담판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스트롭 부소장은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므로, 그가 기억하는 강석주 제1부상의 발언은 통역을 통해서 들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현장에서 직접 들은 것이다. 강석주 제1부상이 7년 전 평양에서 켈리 특사에게 말한 담판은, 38년 전 저우 총리와 키신저 밀사가 벌였던 철군담판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금까지 북측이 미국에게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한 적은 없다. 2000년 10월 23일 평양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K. Albright) 당시 국무장관은, 10월 24일 오후에 열린 두 번째 회담에서 주한미국군 철군문제에 관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견해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2003년에 펴낸 회고록 ‘장관마님(Madam Secretary)’에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냉전 이후에 북측 정부의 생각이 바뀌어 주한미국군을 한반도의 안정화 요인(stabilizing factor)으로 보고 있다고 자기에게 말했다고 회고하면서, “미국군이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 여기에 있고, 남조선에도 미국의 존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There are still some here who think U.S. troops should leave. And there are many in South Korea who are opposed to the U.S. presence as well)”고 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말을 인용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미국 국무장관을 접견한 자리에서 철군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처럼 모호하게 밝힌 까닭은, 주한미국군 철군문제와 한미상호방위조약 폐기문제야말로 가장 중대하고 민감한 문제여서, 북미 정상회담이 아닌 자리에서는 그 문제를 의제로 다룰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철군담판을 관계정상화 이전에 하느냐 아니면 관계정상화 과정 중에 하느냐 아니면 관계정상화 이후에 하느냐 하는 문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결정할 것이다.

1964년 10월 지하핵실험을 실시하고 1970년 1월 중거리미사일을 시험발사하고 4월 인공위성을 쏘아올려 명실상부한 핵보유국으로 등장한 중국은 중미 철군담판과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을 이끌어냈고, 대만주둔 미국군을 철군시키고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을 종결시키면서 중미 국교수립을 실현하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2009년 4월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고 5월 지하핵실험을 실시하고 7월 중거리미사일과 초음속 순항미사일 발사훈련을 실시하여 명실상부한 핵보유국으로 등장한 북측도 이제 북미 철군담판과 오바마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이끌어낼 것이며, 머지않아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면서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키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종결시킬 것이다. (2009년 12월 7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