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교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한계선, 분계선, 통제선이 세 겹으로 그어진 수로

대청도는 황해남도 서쪽 바다에 있는 백령군도에 속한 섬이다. 백령군도는 남북으로 늘어선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로 이루어졌다. 백령군도와 황해남도 해안 사이 좁은 수로(waterway)에는 한계선, 분계선, 통제선이 세 겹으로 그어져 있다. 그런데도 한국군 합참본부와 남측 언론매체들은 북방한계선(Northern Limit Line, NLL)만 거론하면서 분계선이나 통제선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백령군도가 남북으로 늘어서 있으므로, 백령군도와 황해남도 사이에 그어진 북방한계선은 다른 수역에 그어진 북방한계선과 다르게 동서횡단선이 아니라 남북종단선이다.

널리 알려진 바대로, 북방한계선은 정전협정에서 전쟁당사자들이 합의한 해상군사분계선이 아니라, 한미연합군이 해상 및 공중 초계활동을 벌이는 북방상한구역에 임의로 설정한 통과금지선이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할 때, 지상군사분계선(MDL) 획정(劃定)은 합의하였으나 해상군사분계선 획정은 합의하지 못했다. 북방한계선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때로부터 한 달이 지난 1953년 8월 30일 유엔군 총사령관직을 맡아보던 미국 육군대장 마크 클라크(Mark W. Clark)가 서해 해상에 자기들의 초계활동구역을 설정하면서 편의상 그어놓고, 북측에 통보해주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 해상군사분계선이라는 공식명칭을 붙이지 못하고 북방한계선이라는 임의명칭을 붙였던 것이다. 마크 클라크가 동해에 그어놓은 선은 북방경계선(Northern Boundary Line, NBL)으로 불렀는데, 1996년부터는 서해와 마찬가지로 북방한계선으로 바꿔 부른다.

남측은 북방한계선이 “실질적인 해상경계선”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주장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북측이 그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 국무부마저 1977년에 북방한계선을 대체할 해상경계선을 제안한 바 있다. 1992년에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에서도 “남과 북의 해상불가침구역은 해상불가침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양쪽이 지금까지 관할해온 구역으로 한다”고 명시함으로써 북방한계선의 합법적 지위가 부정된 바 있다.

북방한계선에서 대청도 쪽으로 10km 가량 떨어진 해상에 두 번째 선이 그어져 있으니, 남측이 그어놓은 작전통제선(Operational Control Line, OCL)이다. 대청도에서 북방한계선까지 거리는 12km 가량이므로, 대청도에서 작전통제선까지 거리는 2km 가량이다. 평소에 남측 고속정은 대청도 해안 가깝게 그어놓은 작전통제선까지만 기동하는데, 2함대사령부가 명령해야 작전통제선을 지나 북방한계선까지 나아갈 수 있다.

작전통제선과 거의 겹치게 그어진 세 번째 선이 있으니, 북측이 그어놓은 서해군사분계선이다. 1999년 9월 2일 인민군 총참모부는 특별보도를 통하여 북방한계선은 원천무효라고 선언하고, 유엔해양법협약(UNCLOS)의 등거리 원칙에 의거하여 설정한 해상군사통제수역을 발표한 바 있다. 북측은 등거리 원칙에 따라 서해 다섯 섬들과 북측 해안 사이의 중간선을 택하여 서해군사분계선을 그어놓았다. 2000년 3월 23일 인민군 해군사령부는 중대보도를 통해 ‘서해 5개섬 통항질서’를 발표하면서 서해군사분계선을 제시하였다.

2007년 11월 27일부터 29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 국방장관회담’에서 서해불가침경계선을 획정하기 위해 논의하였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그 회담에서 북측은 2000년 3월 23일에 제시한 서해군사분계선과 다른 새로운 서해군사분계선을 제시한 바 있다.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북측이 제시한 서해군사분계선은 1977년에 미국 국무부가 제안한 서해해상경계선과 엇비슷할 뿐 아니라, 작전통제선과도 거의 겹친다고 한다.

북측 함정들은 서해군사분계선 안쪽 북측 수역에서 해상초계활동을 한다고 하지만, 북방한계선이 서해군사분계선 안쪽 북측 수역에 그어져 있으므로 해상초계활동 중에 북방한계선을 지나게 된다. 북측은 북방한계선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인민군 해군사령부가 사용하는 작전해도에는 북방한계선은 없고 서해군사분계선만 표시되어 있다. 따라서 평소에 북측 경비정은 서해군사분계선 부근까지 기동하는 해상초계임무를 수행할 때 북방한계선을 지나면서 자기들이 어떤 통과금지선을 넘어선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또한 작전통제선과 서해군사분계선이 거의 겹치기 때문에, 북측 경비정들은 남측 고속정들이 평소에 작전통제선 안쪽 남측 수역에서만 오가는 것을 보면서 남측 고속정들이 서해군사분계선을 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남측 함정들이 평소에 작전통제선을 넘지 않는 것은,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예방조치로 보인다. 그런 까닭에 작전통제선과 북방한계선 사이 바다는 해상완충수역처럼 되어 있다. 그에 비해, 북측은 작전통제선 같은 것은 그어놓지 않았고, 서해군사분계선만 그어놓았다. 인민군 작전구상에는 완충개념이 없는 것이다.

대청도 동쪽 해상에 떠있는 미확인 물체

백령군도 앞바다에 어장이 있다. 고기잡이철에는 많은 남북 어선들이 그 어장을 드나든다. 중국 어선들도 몰려든다. 북측 어선들이 조업하다가 북방한계선을 살짝 넘을 수 있는데, 그럴 때 남측 고속정들이 북측 어선을 북방한계선 밖으로 몰아낸다. 북측 경비정들도 북측 어선들이 서해군사분계선 바깥쪽 남측 수역에 들어가지 않도록 단속한다. 2009년 11월 11일 한국군 합참본부 관계자는 <연합뉴스> 기자에게 “북한 어선들은 꽃게성어기에 NLL을 왔다갔다 반복하면서 조업하고 있으며 북한 경비정들은 주로 이들 어선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NLL을 침범한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여기서 생기는 문제는, 북방한계선이 서해군사분계선 안쪽 북측 수역 안에 그어져 있기 때문에, 북측 경비정이 북측 어선을 단속하려고 서해군사분계선 부근까지 기동하는 것을 남측 군부가 북방한계선을 넘어선 침범행위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합참본부 관계자가 밝힌 바에 따르면, 2009년 1월 1일부터 11월 10일까지 북측 어선은 25회 북방한계선을 넘었고, 북측 경비정은 23회 북방한계선을 넘은 것으로 집계되었다고 한다. 남측이 말하는 ‘월선’이 평균 1주일에 한 차례 이상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2009년 11월 10일에는 특이한 정황이 조성되었다. 대청도 동쪽 해상에 어떤 미확인 물체가 떠있는 것을 북측 해군 레이더가 포착한 것이다. 사건 당일 바다날씨는 물결이 3m 가량 높게 일어 험했는데도 레이더에 포착되었던 것으로 봐서, 미확인 물체는 상당히 큰 물체였을 것이다. 합참본부가 발표한 사건경위에 근거하여 추산해보면, 미확인 물체가 떠있었던 곳은 대청도에서 동쪽으로 9km 가량 떨어진 해상이었다.

지도를 보면, 굴곡이 심한 황해남도 해안을 따라 월래도, 기린도, 순위도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대각선 방향에 따라 서로 먼 거리를 두고 늘어서 있다. 월래도는 장산곶을 서쪽 끝에 앉힌 룡연반도 바로 밑 대동만에 있고, 기린도는 옹진반도 바로 밑 옹진만에 있고, 순위도는 기린도 동남쪽에 있다.

북측 해군 6전대 지휘부가 미확인 물체를 확인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백령도 동북쪽에 있는 월래도에 대기 중이던 6전대 소속 경비정 한 척이 출동하였다. 사건이 일어난지 네 시간 뒤에 나온 인민군 최고사령부 보도에 따르면, “우리측은 우리 령해에 침입한 불명목표를 확인하기 위하여 정상적인 경계근무를 수행하고 있던 조선인민군 해군경비정을 긴급기동시켰다”고 한다.

북측 경비정 한 척이 월래도를 막 떠난 시각, 경기도 평택에 있는 해군 2함대사령부 작전상황실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미국군 정찰위성에 연결된 해군전술지휘통제체계(KNTDS)가 서해를 오가는 전함들과 어선들을 점으로 표시해주는 대형화면 앞에서, 2함대사령부 지휘관들은 화면 위에 움직이는 어느 한 점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 위에서 움직이는 그 점은, 대청도 동쪽 해상에 떠있는 미확인 물체를 확인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한 북측 경비정이었다.

북측 경비정은 남측 2함대사령부 지휘관들이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백령도 동쪽 해상을 거쳐 대청도 동쪽 해상으로 남하하였다. 북측 경비정이 미확인 물체에 접근하려면 북방한계선을 지나 2km 가량 더 들어가야 하였는데, 위에서 논한 것처럼, 북측 경비정은 북방한계선이라는 개념 자체를 알지 못하므로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미확인 물체를 향해 나아갔다.

북측 해군 레이더가 미확인 물체를 포착하였으니, 남측 해군 레이더에도 당연히 그 물체가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남측 2함대사령부는 미확인 물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월래도를 떠나 남하하는 북측 경비정에만 쏠려있었다.

<한겨레>는 2009년 11월 11일자 관련기사에서 “오전 10시 33분께 서해 백령도 군 레이더가 북방한계선에 접근하는 북한군 해군 6전대 소속 경비정 한 척을 포착했다. 이에 해군 2함대사령부는 대북경계강화를 지시하고 고속정(148t) 2개 편대(4척)를 현장에 출동시켰다. 10km 남쪽 해상에는 해군 초계함(1,000t) 2척이 배치돼 있었다”고 보도하였다. 2함대사령부가 휘하 전함들에게 출동명령을 내린 시각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언론보도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북측 경비정이 월래도를 떠나자마자 곧 출동명령을 내린 것이 확실하다. 2함대사령부는 대청도 정박기지에 대기 중인 고속정 2개 편대에게 전투태세와 현장출동을 명령하였고, 울산급 호위함(Ulsan-class frigate) ‘전남함’과 포항급 초계함(Pohang-class corvette) ‘순천함’에게도 출동명령을 내려 사건현장으로부터 10km 가량 남쪽으로 떨어진 해상에서 전투태세를 취하고 대기하도록 하였다. 그것만이 아니라, 해병대사령부, 공군사령부와 긴급연락하면서 백령도 등에 배치된 대공포 진지와 해안포 진지에서도 사격태세를 갖추게 하였고, 공군기지에서도 출격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북측은 경비정 한 척을 출동시킨 것 뿐인데, 남측은 방대한 무력을 동원한 전투태세에 돌입한 것이다.

경비정 한 척으로 공격할 수 없다

현장에 출동한 남측 고속정 2개 편대 가운데 1개 편대 두 척이 맨앞에 나섰다. 그 고속정들은 멀리서 다가오는 북측 경비정을 향해 “귀측은 우리 해역에 과도하게 접근했다. 즉시 북상하라”는 경고통신을 보냈다.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서쪽 해상에서 일어난 제2차 서해교전에서 북측 경비정에게 경고통신을 보내면서 700m 가량 접근했다가 함포사격을 받고 격침당한 뒤로, 남측 고속정들은 가까이 가지 못하고 3-4km 가량 멀리 떨어져서 경고통신을 보낸다.

그러나 북측 경비정은 경고통신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북측 경비정이 경고통신을 무시하는 까닭은, 그들에게 경고통신은 서해군사분계선 북측 수역 안에서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자기들의 해상초계활동을 가로막으려는 방해잡음으로 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자기측 수역에 떠있는 미확인 물체가 무엇인지 파악하라는 상부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정상기동을 하는 북측 경비정에게 경고통신은,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남조선 함선에서 떠드는 소리” 정도로 여겨졌을 것이다.

놀랍게도, 남측 고속정마저 자기들의 경고통신을 형식적으로 여긴다. 1999년 6월 15일 연평도 서쪽 해상에서 일어난 제1차 서해교전 당시 해군 2함대사령관이었던 박정성 씨는 <신동아> 2008년 6월호에서 “적 함정에 대한 경고방송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09년 11월 11일 합참본부 관계자는 <연합뉴스> 기자에게 2009년 1월 1일부터 11월 10일까지 남측 고속정들이 북측 경비정들에게 경고통신과 대응기동을 각각 47회나 했다고 말하였다. 경고통신이 그처럼 자주 반복되고 있으니 남측 고속정이나 북측 경비정이나 경고통신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현실이 이러한 데도 합참본부는 이번에 경고통신을 보낸 것이 이전에는 흔치 않았던 어떤 특별조치를 취한 것처럼 지나치게 의미를 부풀렸다.

북측 경비정이 미확인 물체가 떠있는 현장에 이르기 직전, 남측 고속정은 북측 경비정에게 또 다시 경고통신을 보냈다. “귀선은 우리 경고에도 침범행위를 계속해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변침하지 않을 시 사격하겠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책임은 귀선에 있음을 경고한다”는 마지막 경고를 보낸 것이다.

남측 고속정이 이번에는 사격경고를 보냈으나, 북측 경비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날만 특별히 그런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북측 경비정은 남측 전함과 대치할 때 겁을 먹지 않는다. 이를테면, 2004년 12월 31일 연평도 앞바다에서 북측 경비정 한 척이 남측 포항급 초계함과 조우하였을 때, 초계함에게 “해상분계선을 침범했으니 퇴각하지 않으면 경고사격을 하겠다”고 다섯 차례나 경고통신을 보낸 적이 있다. 경무장한 200t급 경비정이 중무장한 1,200t급 초계함과 한 시간 가량 대치한 것이다.

남측 고속정이 보낸 경고통신을 무시한 북측 경비정이 현장에 도착하여 미확인 물체를 살펴보니 별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하하였던 뱃머리를 돌려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남측 고속정에 탑재된 함포가 불을 뿜었다. 합참본부가 경고사격(warning shot)이라고 부르는 함포사격이었다.

만일 북측 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저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북측 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설 때 경고사격을 가하거나 또는 북측 경비정이 미확인 물체에 접근할 때 경고사격을 가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그런데 남측 고속정들은 북측 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 2.2km나 더 나아갈 때는 물론이고, 현장에 도착하여 미확인 물체를 확인하고 있을 때까지도 경고사격을 하지 않다가, 북측 경비정이 현장확인을 마치고 뱃머리를 돌려 돌아가고 있을 때, 북방한계선을 다시 넘어서 북측 수역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마치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경고사격을 가했다. 합참본부는 이것을 “교전수칙에 따른 적절한 대응”이라고 하였다.

합참본부 이기식 정보작전처장은 사건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기자가 “경고사격은 어디를 향해서 했느냐”고 묻자, “그 배의 전후방 한 1km 정도에 경고사격을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다”고 어정쩡하게 답변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남측 고속정들은 북측 경비정 쪽을 향해 경고사격으로 네 발을 쏘았다고 한다. 이기식 정보작전처장은 1km 정도 떨어진 곳에 경고사격을 하였다는 식으로 어정쩡하게 답변했지만, 1km나 떨어진 곳을 향해 경고사격을 하였다는 말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 500m 가량 떨어진 가까운 곳을 향해 경고사격을 하였다고 보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2009년 11월 11일 합참본부 관계자는 “북한 경비정이 올해 들어 22회 NLL을 침범했지만 경고사격 상황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올해 들어 우리 함정이 북한 경비정에 경고사격을 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스물 두 차례나 북측 경비정들과 조우 또는 대치하였으나 경고사격을 하지 않더니, 11월 10일에는 긴박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왜 경고사격까지 하였을까? 올해 들어 스물 두 번째로 북방한계선을 넘은 북측 경비정의 월선행동보다, 북측 경비정의 스물 두 번째 월선에 대해 경고사격을 가한 과격반응이 더 이상하다.

합참본부는 북측 경비정이 먼저 도발해서 남측 고속정들이 대응사격을 하였다고 주장하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북측 경비정은 미확인 물체를 확인하고 뱃머리를 돌린 상태에 있었으며, 남측 고속정들은 북측 경비정을 향해 올해 들어 처음으로 경고사격을 한 것이다.

2009년 11월 10일 오후 국회에서 긴급히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한 김태영 국방장관은 “경비정이 1척만 움직이면서 심각한 도발을 계획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의도적이라면 겨우 배 한 척으로 (도발을) 했을까라는데 의문이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는 2009년 11월 11일자 관련기사에서 “교전 당시 NLL 이북 북한 도서인 월래도와 기린도, 순위도에 각각 경비정 1척 씩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지원에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순위도에 있던 경비정 1척은 기린도 앞바다에 있는 북한 어선 쪽으로 기동했으며 나머지 2척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면서 “북측이 의도적인 도발을 계획했다면 최소한 다른 경비정의 지원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군관계자들은 의문이라는 반응”이라고 지적하였다.

남측 고속정이 경고사격으로 네 발을 발사한 순간, 북측 경비정은 경고사격과 격파사격을 구분할 수 있었을까? 3.2km 밖에서 자기들 쪽으로 쏜 포탄이 경고하는 뜻으로 쏜 포탄인지 아니면 조준하여 쏘았는데 빗나간 포탄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함으로부터 함포사격을 받았는데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거나 비겁하게 달아나는 짓은 어느 나라 군대에서나 용납되지 않는다. 남측 고속정들이 경고사격을 하자 북측 경비정이 즉각 응사한 것은 필연적인 반응이었다.

허공에 때아닌 천둥소리 5,900발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는 2009년 11월 11일 국회에서 열린 당지도부 회의에서 “(남측 고속정이 북측 경비정을 향해) 200발씩 함포를 쏘고도 파손 정도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은 석연치 않다”고 의구심을 드러냈지만, 그는 군사정보를 알지 못하기에 합참본부가 처음에 200발 쏘았다고 발표한 것을 그대로 믿었다. 이틀 뒤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건현장에서 남측 전함들이 쏜 함포탄은 모두 5,900발이었다.

사건현장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후방해상에 대기하던 호위함과 초계함은 사건현장을 멀리서 구경만 하였을까? 그렇지 않았다. 40mm 함포가 250여 발, 20mm 벌컨(Vulcan)포가 4,700여 발을 쏘았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5,900발과 4,950발에서 차이가 나는 950발은 호위함과 초계함에 탑재된, 최대사거리가 20km가 되는 76mm 함포들이 발사한 포탄이었을 것이다. 남측 고속정들은 북측 경비정으로부터 3.2km 떨어진 거리에서 포격하였고, 후방해상에 배치된 호위함과 초계함은 10km 떨어진 먼 거리에서 포격하였다.

북측 경비정 한 척을 향해 각종 포탄을 5,900발이나 쏘았는데도 그 경비정이 포탄소나기 속에서 파손 또는 격침되지 않은 까닭은, 남측 전함들이 북측 경비정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먼 거리에서 쏘았기 때문이다. 남측 전함들이 멀리 떨어져 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북측 경비정이 쏘는 대구경 함포에 맞으면 격침당할 수 있으므로 되도록 멀리 떨어져야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5,900발이나 퍼부었어도 허공에 때아닌 천둥소리만 요란하게 울렸을 뿐이다.

2009년 11월 10일 이기식 합참본부 정보작전처장은 기자회견에서 기자가 “북측 경비정의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고 묻자 “현재 경비정의 피해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답변했다. 11월 11일 원태재 국방부 대변인은 사건현장에서 인민군 한 명이 사망하고 세 명이 부상했다는 소문이 사실이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라고 답변하였고, 박성우 합참본부 공보실장도 북측 경비정의 피해에 대해 “따로 확인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튿날인 11월 12일 <연합뉴스>는 ‘군 관계자’의 추정발언을 인용하면서 북측 경비정의 조타실과 상부갑판이 대파되어 시커먼 연기가 솟구쳤고, 함포와 기관포도 크게 파괴되었다고 하면서, 북측 경비정이 반파상태로 퇴각하여 결국 다른 경비정이 예인하였다는 추측보도를 내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신뢰할 수 없는 추측보도로 보인다. 그와 다르게, 김태영 국방장관은 2009년 11월 10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반파라면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므로 반파라 할 수 없고, 일부 피해를 입은 것은 명확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태영 국방장관의 말은, 남측 고속정의 소구경 기관포가 북측 경비정 선체에 조그만 구멍 몇 개 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18분 시차에 숨겨진 비밀

제1차 서해교전 당시 교전시간은 14분이었고, 제2차 서해교전 당시 교전시간은 20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합참본부는 함포사격을 주고받은 시간이 2분이었다고 발표하였다. 과연 2분만에 끝났을까?

서해에 풍랑주의보 예비특보가 발령되었던 사건 당일 인천해양경찰서는 선박운항을 통제하였다. 따라서 남측 전함들과 북측 경비정이 함포사격을 주고받을 때, 주변해역에는 어선이 없었다. 사건현장을 본 목격자가 없는 것이다. 사건현장에 목격자는 없었으나, 대청도 주민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연합뉴스> 2009년 11월 10일자 보도에 따르면, 대청도 주민 김아무개 씨는 “교전시각으로 지목된 오전 11시 27분께부터 20분간 함포소리가 들렸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합참본부가 발표한 포격시간 2분과 대청도 주민이 말한 포격시간 20분은 너무 큰 차이다. 5-6분 정도만 차이가 났다면 어느 한 쪽이 착오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18분이나 차이가 났으니 어느 한 쪽이 거짓말을 한 것이 분명하다. 대청도 주민에게는 이번 사건에 대해 거짓말을 해야 할 아무런 까닭이 없으므로, 의혹은 자연히 합참본부에게 쏠린다.

대청도 주민은 기자에게 “(함포소리가) 처음에는 ‘펑’ ‘펑’ 자주 들리더니 10분 정도 지나자 띄엄띄엄 들렸다”는 결정적인 증언까지 덧붙였다. 처음 10분 동안 자주 들린 함포소리는 반자동식 속사포를 쏘는 연발사격포성이고, 나중 10분 동안 띄엄띄엄 들린 함포소리는 수동식 함포를 쏘는 조준사격포성이다. 북측 경비정에 탑재된 대구경 함포는 수동식 함포이므로 포성이 띄엄띄엄 들린다. 그러므로 처음 10분 동안 남측 전함들과 북측 경비정은 서로를 향해 속사포를 연속발사하였고, 나중 10분 동안에는 북측 경비정이 대구경 함포를 수동으로 조준하면서 띄엄띄엄 쏘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건현장에서 미확인 물체를 확인하고 나서 뱃머리를 돌려 북상하기 시작한 북측 경비정을 향해 남측 고속정은 뱃머리에 장착된 40mm 함수포(bow gun)로 경고사격을 가했고, 북측 경비정은 뒤쪽에서 사격하는 남측 경비정들을 향해 뱃꼬리에 장착된 14.5mm 함미포(stern chaser)로 대응사격을 가했다. 만일 북측 경비정이 뱃머리에 탑재된 대구경 함포를 쏘았다면 남측 고속정은 격침되었을지 모른다. 북측 경비정 뱃머리에 탑재된 함수포는 구경이 85mm가 되고 최대사거리가 15.5km가 되는 대구경 함포인데, 사거리가 길고 관통력이 강해서 지상군 전차의 방탄장갑도 뚫어버린다. 85mm 대구경 함포에는 조준점을 맞추면 파도에 흔들리는 것에 상관없이 표적에 계속 고정되는 ‘팽이장치’가 장착되어 있다고 한다. 연평도 서쪽 13km 해상에서 벌어진 제2차 서해교전에서 북측 경비정 ‘등산곶 684호’는 대구경 함포를 발사하여 남측 고속정 ‘참수리호 357정’을 28m 바다 속으로 침몰시킨 바 있다. 남측 해군이 인양하여 지상에 전시한 고속정 선체에 남아있는 피격흔적을 살펴보면, 북측 경비정이 쏜 대구경 포탄이 흘수선(plimsoll line)에 명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북측 경비정의 함포사격술이 보통 수준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에 비해, 남측 고속정에 탑재된 40mm 함수포는 속사포여서 분당 300발을 퍼부을 수 있으나, 사거리가 짧고 관통력이 약해 북측 경비정을 격침시킬 수 없다. 남측 언론매체들은 남측 고속정에 탑재된 40mm 함포에 함포사격통제장치(ship gun fire-control system)가 장착된 것처럼 보도하였지만, 그것은 오보다. 남측 고속정에 탑재된 40mm 함포는 탐지레이더에 단순연결된 반자동식 속사포이고, 탄약장전만 자동식이다. 탐지레이더와 함포를 단순연결하였다는 말은, 피아 식별기능, 표적거리 산정기능, 타격우선순위 판별기능, 대응무기 선택기능이 없다는 뜻이다. 남측에서 개발한 함포사격장치인 더블유씨에스(WCS) 86에는 추적레이더는 없고 탐지레이더가 좌표를 잡아주는 원시기능만 있다. 그래서 40mm 함포를 쏘려면 다섯 명이 달라붙어야 한다.

남측 고속정에 탑재된 40mm 함포는 스웨덴의 보포스(Bofors)사가 1948년에 개발한 40mm/70을 이탈리아의 오티오 브레다(OTO-Breda)사가 1960년대에 면허생산하여 1965년부터 작전배치한 것이다. 오티오 브레다는 나중에 회사명을 오티오 멜라라(OTO-Melara)로 바꾸고, 대우중공업에 면허생산권을 주었다. 이번에 남측 고속정들이 쏜 40mm 반자동식 함포는 대우중공업이 면허생산하여 1980년대에 경비정에 탑재한 것이다. 2008년 10월 14일 김옥이 한나라당 의원이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남측이 보유한 고속정 79척 가운데 41척이 내구연한을 넘긴 ‘고물함정’들이다.

대청도 주민이 기자에게 한 말이 중요한 까닭은, 북측 경비정 한 척이 남측 전함 여섯 척으로부터 집중포격을 받으면서도 퇴각하지 않고 현장에서 대응사격을 계속하였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합참본부는 피격당하여 반파된 북측 경비정이 시커먼 연기에 휩싸여 시속 11km로 퇴각하였다고 발표하였지만, 그 발표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은 이렇게 입증될 수 있다. 북측 경비정에 탑재된 함미포는 분당 450발을 쏠 수 있는 14.5mm 소구경 쌍열포(2연장포)다. 합참본부 발표에 따르면, 북측 경비정은 남측 고속정을 향해 14.5mm 소구경 쌍열포를 50발 가량 쏘았는데, 그 가운데 15발 가량이 남측 고속정 함교와 조타실 사이 외부격벽에 명중하였다고 한다. 언론매체들도 남측 고속정 선체에서 소구경 포탄을 맞은 피탄자국이 확인되었다고 보도하였다. 중요한 것은, 14.5mm 소구경 쌍열포의 사거리가 2km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북측 경비정이 3.2km 떨어진 거리에서 남측 고속정들로부터 공격을 받자 퇴각한 것이 아니라 뱃머리를 돌려 접근하면서 2km 이내 가까운 거리에서 대응사격을 하였음을 말해준다.

남측 전함들이 집중포격을 가했으나 북측 경비정은 피격파손되지 않았고, 집중포격에 놀라 달아날 줄 알았던 북측 경비정은 남측 고속정들에게 접근하면서 14.5mm 소구경 쌍열포와 85mm 대구경 함포로 대응사격을 가하였다. 제2차 서해교전에서 85mm 대구경 함포에 맞아 격침당한 악몽이 되살아난 남측 고속정 네 척은 뱃머리를 돌려 남측 수역으로 퇴각하였다. 만일 남측 고속정들이 사건현장에 끝까지 머무르며 포격하였다면 연발사격포성이 계속 들렸어야 하는데, 대청도 주민의 말에 따르면 나중 10분 동안에는 수동식 함포를 쏘는 포성만 띄엄띄엄 들린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때로부터 네 시간 뒤에 인민군 최고사령부가 발표한 보도는 “우리 해군 경비정은 즉시 도발자들에게 불의의 대응타격을 가하였다. 급해맞은 남조선군 함선집단은 황급히 자기측 수역으로 달아났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남측 전함 여섯 척이 모두 퇴각한 것이 아니라 전방해상에 배치된 고속정 네 척이 퇴각한 것으로 보아야 이치에 맞는다. <연합뉴스> 2009년 11월 10일자 관련보도에는 대청도에서 10km 가량 남쪽으로 떨어진 소청도 주민이 기자에게 한 말도 있다. 소청도 주민 김아무개 씨는 “교전사실을 알고 12시 10분쯤 해발 20-30m 고도의 ‘분바위’에 올라가 보니 북측 해역에는 북한 경비정 3척이 보였으나 우리측 경비정은 보이지 않았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남측 고속정들은 어느새 현장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남북 전함들이 20분 가량 함포사격을 주고받았는데도 합참본부가 2분만에 끝났다고 축소해서 발표한 까닭은, 북측 경비정 한 척이 퇴각하지 않고 계속 응사하는 동안 남측 고속정 네 척이 퇴각하였다는 사실을 차마 공개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북측 경비정이 현장에서 피격파손되었다면 다른 북측 경비정들이 긴급출동하여 치열한 해상교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남측 고속정들이 포격을 멈추고 퇴각하였으므로 다른 북측 경비정들이 사건현장으로 출동할 필요가 없었다. 황해남도 해안절벽 곳곳에 있는 동굴진지에 배치된 인민군 해안포들도 발사태세에 돌입할 필요가 없었고, 황해남도 곳곳에 배치된 지대함 미사일들도 사격통제레이더를 작동시킬 필요가 없었다. 북측 경비정 한 척의 반격과 남측 고속정들의 퇴각으로 치열한 교전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난감해진 주한미국군사령관

자칫 해상교전으로 확대될 뻔한 위험천만한 포격사건은 왜 하필이면 11월 10일에 일어났을까? 2009년 10월 14일 미국군 제7함대 항모강습단과 한국군 2함대가 역사상 처음으로 서해에서 대북공격을 상정한 해상합동훈련을 실시하면서, 한미 해군지휘부가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에서 이례적으로 함상회의까지 가졌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0월 14일 서해에서 있었던 한미 해상합동훈련 및 한미 해군지휘부 함상회의와 11월 10일 서해에서 일어난 포격사건은 무관한 것일까? 이 양자의 연관성을 입증할 자료는 찾을 길 없지만, 이번 포격사건은 오바마 대통령의 서울방문과 연관되었다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

오바마 대통령이 남측을 방문할 때, 긴장하는 사람은 주한미국군사령관 월터 샤프(Walter L. Sharp)다. 오바마 대통령은 주한미국군 전방기지를 찾아가서 병사들을 만날 것이며, 주한미국군사령부에서 월터 샤프의 보고를 받을 것이다. 다른 한편, 주한미국군사령관은 대통령이 내방한 기회를 이용하여 대통령에게 현장학습효과를 안겨줄 것이다. 현장학습효과란 북측의 무력위협이 증가하여 한반도 군사상황이 매우 위험하다는 식으로 작성한 정세평가를 대통령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 ‘효과’에는 대통령이 주한미국군을 감군하거나 철군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강한 만류의지가 들어있다.

그래서 역대 주한미국군사령관들은 미국 대통령의 방한일정에 서부전선의 군사분계선 일대를 시찰하는 관례를 만들어놓았다. 미국 대통령이 대치현장에 가서 짜릿한 체험을 하게 만들어야 주한미국군에 대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정책적 관심을 끌어낼 수 있으며, 군비배정과정에서 유리한 평점을 따낼 수 있음을 주한미국군사령관은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정이 좀 다르다. 경제위기와 재정적자에 허덕이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군비지출을 줄이라는 재정압박을 강하게 받고 있고, 오바마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에 미국군을 추가로 보내는 것을 꺼릴만큼 해외주둔군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미국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계속 전술적으로 패하여 곤경에 빠지는 경우, 오바마 대통령은 주한미국군 일부병력을 빼내어 아프가니스탄에 보낼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코앞에 다가온 북미 양자회담에서 북측이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의제로 꺼낼 것이라는 예상도 주한미국군사령관을 불안하게 만든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북측 국방위원회의 압박공세를 견디지 못하면, 아프가니스탄에 병력을 차출하는 식으로 주한미국군을 단계적으로 철군할 수도 있다. 주한미국군사령관에게 갖가지 악재가 돌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돌출하는 악재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그의 묘책은 한반도 군사정세를 더 첨예한 긴장 속으로 끌어가는 것이다.

주한미국군사령관은 2009년 11월 13일 유엔군 모자를 쓴 주한미국군 요원 7-8명을 2함대사령부에 보내서 사건경위를 자세히 보고받았다. 오바마 대통령 방한 중에 한반도 군사상황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그가 이번 사건을 과장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주한미국군사령관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과장보고를 한다고 해도, 그리고 한국군 합참본부와 언론매체들이 이번 사건을 서해교전으로 규정한다고 해도, 포격사건이 해상교전으로 뒤바뀌는 것은 아니다. 백악관 대변인 로벗 깁스(Robert Gibbs)는 2009년 11월 10일 기자의 물음에 답하면서 교전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사건(incident)라는 말을 썼다. 기자가 “이번 사건에 관련해 북코리아를 비난하는가?”고 묻자, 그는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대한민국에 알아보는 게 좋겠다(I’ll point you to the Republic of Korea for the detail on that)”고 답변하면서 말을 아꼈다. <로이터(Reuters)통신>, <합동(AP)통신>, <워싱턴 포스트>는 이번 사건을 보도한 첫날 기사에서 교전(skirmish)이라는 말을 썼다가 이튿날부터는 충돌(clash)이라는 말로 바꿨다. <씨엔엔(CNN)>, <팍스뉴스(Fox News)>, <앨저지라(Aljazeera)>는 처음부터 수위를 낮춰 충돌이라고 표현했다.

만일 충돌이 교전으로 확대되었더라면, 주한미국군사령관은 오바마 대통령 방한 중에 한반도 군사상황을 과장하여 자극적으로 보고할 기회를 잡았을지 모르나, 그런 기회를 놓친 그의 처지는 난감해졌다. (2009년 11월 16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