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의 빛과 어둠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이 땅에 찾아오는 8월

해마다 8월은 이 땅에 무심히 찾아오지 않는다. 이 민족이 맞이하는 8월은 수많은 항일선열들이 산야와 거리에서, 감옥과 형장에서 흘린 항일투쟁의 피눈물로 되찾은 8월이다. 이 땅에 찾아오는 8월이 항일의 위대한 역사를 전해주기에, 백두산은 백두산으로 솟아있고 동해는 동해로 출렁이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민족의 역사에 광복의 8월이 없었다면, ‘황군(皇軍)’ 육군소위 다까기 마사오(高木正雄, 박정희의 일본이름)는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그리고 만주국 ‘황제’가 있는 서쪽을 향해 아침마다 ‘궁성요배’를 ‘봉행’하며 항일투사들에게 ‘토벌’의 총질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고,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이광수의 일본이름)는 일제의 일급전범 도꾸또미 소호(德富蘚峰)의 정신적 사생아가 되어 조선인의 정신을 말살하는 ‘문장보국(文章保國)’의 만행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이 민족의 역사에 광복의 8월이 없었다면, 김대중은 오늘도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로, 김영삼은 지금도 가네무라 고유(金村康石)로 ‘경성’(일제시대 서울 지명)의 어느 길거리를 걷고 있을지 모른다. 다까기 마사오의 손에서 반역의 총을 내려놓게 하였다는 뜻에서, 그리고 도요다 다이쥬를 김대중으로, 가네무라 고유를 김영삼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였다는 뜻에서, 이 나라의 8월은 어둠을 물리치고 빛을 되찾은 위대한 광복의 8월이다.

그래서 이 민족은 조선독립만세를 목놓아 부르며 광복의 기쁨을 노래하였다. 광복의 기쁨을 담아 불렀던 옛 노래들 가운데는 이런 노래도 있었다. 64년 전에 북위 38도선 이남에서 많이 불려진 대중가요 ‘독립행진곡’이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깊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텃네
동무야 자리차고 일어나거라
산 넘어 바다 건너 태평양 넘어
아아 자유의 자유의 종이 울린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통치를 물리친 이 민족에게 밝은 햇빛만 비친 것은 아니었다. 그 때는 해방의 기쁨에 겨워 누구도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햇빛을 가리는 어둠이 소리 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 민족에게 전쟁과 분단과 반공독재를 강요한 어둠의 세력은 이 민족이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 훨씬 이전부터 은밀한 침입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여운형을 선택한 까닭

1945년 7월 26일 미국, 영국, 중국(국민당 정부)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Potsdam Decralation)을 발표하고 일제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러나 일제는 즉각 항복하지 않았다.

항복하지 않고 버티던 일제에게 결정타를 가한 것은 소련의 대일전 개전이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은 일제에 대한 선전포고를 내고 관동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극동군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Aleksandr Vasilevsky)가 지휘하는 소련군과 관동군사령관 야마다 오토조(山田乙三)가 지휘하는 관동군이 전면전으로 맞붙었다. 소련에서 만주전략공격작전(Manchurian Strategic Offensive Operation)이라고 부르고, 미국에서는 만주전투(Battle of Manchuria)라고 부르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소련군의 만주공격이 시작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미국은 대일전쟁의 주도권을 소련에게 빼앗기기 않기 위해 애썼다. 다급해진 미국은 소련군이 관동군을 공격하기 사흘 전에 서둘러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핵공격을 가했다. 그들이 히로시마 핵공격에 사용한 우라늄탄은 아직 폭발실험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소련군이 관동군을 공격하기 시작한 8월 9일 미국은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두 번째 핵공격을 가했다.

만주에서 소련군이 관동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하고 있을 때, 미국군은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섬 오키나와(沖繩)에 있었다. 당시 일본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있었던, 조셉 스틸웰(Joseph H. Stilwell)이 지휘하는 제10군(Tenth Army)에게 조선을 점령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려진 날은 8월 11일이었다. 나중에 조선의 38도선 이남지역을 점령하게 될 미국 육군 제24군단은 제10군 산하에 있었다.

만주에서 관동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하면서 빠른 속도로 남진하는 소련군이 8월 11일에 함경북도 웅기와 나진에 상륙하였다는 다급한 전황을 보고 받은 조선총독부는 소련군이 일주일 안에 서울을 점령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조선총독부는 밤늦게까지 소련군의 서울 점령에 대비하기 위한 비상대책회의를 진행하였다.

조선총독부 제9대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소련군의 서울 점령에 대비하여 짜낸 계략은, 조선인에게 치안유지권을 미리 넘겨줌으로써 소련군의 서울 점령 이후에 자기들의 안전철수를 보장받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제124대 소와천황(昭和天皇)이라고 부른 일왕 히로히도(裕仁)가 직접 지휘하는 일본군 최고사령부인 대본영(Imperial General Headqurters)은 그때가지만 해도 조선총독에게 패전대비에 관한 지령을 내리지 않았지만, 조선총독부는 자발적으로 패전대비책을 세운 것이다. 당시 조선총독은 대만총독과 달리 일왕 이외에 누구로부터도 감독이나 지시를 받지 않고 조선에 대한 통치권과 군사권을 행사하는 절대군주의 지위에 있었으므로, 독자적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소련군이 한반도 최북단에 상륙하였다는 전황보고를 듣고 조선총독부의 불안이 한층 더 커진 8월 11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는 조선인 관리를 통하여 여운형에게 총독부의 치안유지권을 넘겨줄 의사가 있음을 알렸다. 조선주둔 제17방면군도 8월 14일 참모부의 육군중좌를 여운형에게 보내어 총독부의 치안유지권 이양제의를 조선주둔군이 양해하였음을 알려주었다. 조선주둔 일본군은 1945년에 들어오면서 일본제국 제17방면군으로 개칭되어 관동군사령부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인 지도자들 가운데서 좌파성향을 지닌 여운형을 택한 까닭은, 그가 당시 조선의 저명한 지도자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까닭은 소련군이 서울로 진격해올 때 소련군과 항복교섭을 벌이기 위해서는 소련군이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을 좌파성향의 조선인 지도자가 나서주는 것이 자기들에게 유리할 것으로 타산하였기 때문이다.

8월 15일 오전 6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는 여운형을 직접 만나 치안유지권 이양문제를 협의하였다. 그 자리에서 엔도는 “소련군이 8월 17일에 경성을 점령할 것이고, 미국군은 부산과 목포를 잇는 반도의 최남단을 점령할 것”이라는 정보를 여운형에게 전했다.

그로부터 약 다섯 시간 뒤인 정오, 일왕 히로히도가 종전선언문인 대동아전쟁종결조서(大東亞戰爭終結詔書)를 읽어내려가는 녹음방송이 라디오를 통해 중계되었다. 그러나 히로히도가 라디오방송을 통해 종전을 선언했다고 해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일왕의 종전선언은 그야말로 선언에 지나지 않았고, 일본군은 동아시아 각지에서 여전히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들에게 치안유지권을 넘겨주겠다고 여운형에게 말한 이양약속을 전혀 이행하지 않았다. 8월 16일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산하에 보안대가 조직되었으나, 조선총독부는 치안유지권을 넘겨주지 않았다. 조선총독부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치안유지권을 넘겨주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주둔 제17방면군은 민심을 교란하고 치안을 문란하게 하는 자들을 엄벌에 처한다는 8월 16일자 포고문을 내고 서울 시내 곳곳에 방책(barricade)를 설치하였다. 일제가 조작한 괴뢰국인 만주국의 수도 신경(新京, 현재는 장춘[長春])에 있던 관동군사령부는 8월 16일 소련군에게 항복하였으나, 관동군사령부 휘하에 있는 조선주둔 제17방면군은 항복은커녕 되레 더 날뛰고 있었다. 8월 2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인들이 결성한 정치단체와 치안유지단체는 즉시 해산하라고 명령하였다.

소련군이 곧 서울에 입성한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하게 퍼졌는데도 조선총독부는 움츠러들기는커녕 이전보다 더 강압적인 태도로 조선인들을 짓눌렀다. 이것은 한 쪽에서는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해방을 기뻐하는 군중들의 환호성이 터져나오고 있었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조선총독부의 무력강압이 여전히 계속되었음을 말해준다.

해방의 환호와 무력강압의 지속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모순이 생겨난 원인은 무엇일까? 그러한 모순이 발생한 원인을 밝혀내줄 자료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기밀문서들인데, 일왕의 종전선언방송이 나오자마자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긴급명령을 내려 총독부의 기밀문서를 모조리 태워버렸다. 그들이 저지른 문서소각은 패망에 직면한 조선총독부의 움직임을 밝혀줄 자료가 사라져버렸음을 뜻한다.

맥아더-가와베의 마닐라 비밀회담

조선총독부가 1945년 8월 15일 오후에 기밀문서를 모두 태워버렸는데, 그들의 동향을 알려주는 흔적이 어디에 남아있을까? 1959년 11월 2일에 발행된 미국의 유력한 시사주간지인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 제47호에 실려있는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샬(George C. Marshall)의 언론대담에 남아있는 흔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대담기록은 이런 사실을 전해준다.

“우리는 일본의 연락문(message)을 감청하였다(intercepted). 그 연락문은 조선주둔 일본군사령관이 그들의 본국에 있는 사령부로 보내는 것이었다. 연락문은 공산주의자들(소련군을 뜻함-옮긴이)이 조선으로 밀려들어오고 있는 상황이므로, 미국이 조선을 공격(attack)하면, 그들(조선주둔 일본군)은 모두 (미국군에게) 항복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들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서 두려워하였는데, 그것은 이치에 맞는 걱정(legitimate worry)이었다.”

태평양전쟁에서 미국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일본군의 무선교신을 엿듣는 감청기술이었다. 미국군이 전선에 배치한 이동무선교신정보단(Mobile Radio Intelligence Unit)은 일본군의 무선교신을 속속들이 감청하면서 그들의 작전동향을 사전에 파악하였다. 조지 마샬의 대담기록은 그러한 상황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 대담기록에 따르면, 소련군의 남진을 두려워한 조선총독부는 미국군에게 항복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 고위관리들은 미국군에게 항복하여야 패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조선총독부의 고위관리들만 대미항복을 생존의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 아니라 일왕 히로히도를 비롯한 대본영(大本營)의 고위관리들도 그러하였다. 대본영을 지휘하던 히로히도는 8월 15일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종전을 선언한 직후인 8월 17일 필리핀 마닐라에 주둔하고 있던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에게 항복조건을 수락하는 임무를 준 특사를 파견하였고, 8월 20일에는 육군대장 가와베 토라시로(河邊虎四郞)를 단장으로 하여 16명으로 이루어진 항복교섭단을 사절단이라는 이름으로 맥아더에게 보냈다.

맥아더는 일본군이 소련군에게 저항하다가 미국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가와베가 자기를 찾아오기 전에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맥아더와 가와베가 비밀회담에서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를 알려주는 문서는 없지만, 그들은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비밀회담을 진행하였을 것이다.

소련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일제가 조작한 괴뢰국인 만주국이 무너지고, 소련군이 원산에 상륙하였던 8월 18일, 맥아더는 아시아 각지에 주둔하는 일본군과 일본의 통치기구는 공인되지 않은 현지 세력에게 항복하지 말고 각자 기존의 법과 질서를 따르라는 명령을 발표하였다.

계속되는 적과의 내통

맥아더와 가와베가 필리핀 마닐라에서 비밀회담을 진행한 직후인 1945년 8월 22일, 일본 내무차관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에게 전문을 보내 “조선에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는, 북위 38도선 이북에서는 소련군이 맡게 되고, 그 이남에서는 미국군이 맡게 된다”고 알려주었다. 그 전문은, 미국군이 북위 38도선 이남에 있는 서울을 점령할 것이므로, 서울에 있는 조선총독부는 소련군의 서울 점령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패망한 조선총독부가 움츠러들기는커녕 일본군과 일제경찰을 앞세워 해방된 조선을 짓누르는 사태는 그러한 정보판단을 배경으로 하여 발생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제42대 총리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郞)가 8월 16일 해임되고 그 후임에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稔彦王)가 제43대 총리가 되어 패전처리를 맡아보게 되었지만, 조선에서는 조선총독부가 그대로 권한을 행사하였다.

관동군사령부가 소련군에게 항복한 날은 8월 16일이었는데, 관동군사령관 야마다 오토조가 소련군에게 생포된 날은 그로부터 1주일 뒤인 8월 23일이다. 이것은 관동군이 항복한 뒤에도 소련군에게 저항하였음을 말해준다. 소련군이 관동군사령관을 생포하고 만주전역과 사할린을 점령하였던 8월 23일, 일왕 히로히도는 대본영 명의로 된 전문을 맥아더에게 보내어, 만주와 조선에서 일본인들이 안전하게 철수할 때까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하였고,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총독부 회의에서 “조선의 치안유지는 계속 제국의 경찰이 맡으라”고 지시하였다.

8월 28일 일왕 히로히도는 일본 내각 명의로 된 전문을 맥아더에게 보내어, 미국군이 조선주둔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해주기를 바라며, 일본은 미국군이 하루빨리 조선에 상륙해주기를 “열렬히” 기다린다고 하였다. 맥아더는 히로히도의 다급한 요청에 대해 답신을 보냈다. 답신의 내용은, 미국군이 8월 28일 일본에 상륙할 것이고 미국 육군 제24군단은 9월 7일 조선에 상륙할 것이므로, 자기가 지휘하는 군대가 상륙하여 임무를 맡을 때까지 현지에 있는 일본의 통치기구를 그대로 보전하라는 것, 그리고 8월 31일부터는 조선주둔 제17방면군 사령관이 직접 미국군 제24군단 사령관과 연락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8월 31일부터 9월 4일까지 조선주둔 제17방면군사령관 고즈키 요시오(上月良夫)와 제24군 사령관 존 하지(John R. Hodge)는 40차례 이상 연락을 주고받았다. 적과의 내통은 긴밀하였다.

8월 28일 조선주둔 제17방면군은 참모장 명의로 된 ‘미국군에 대한 정전협정 준비사항’에 관한 특별긴급전보문을 대본영에 보냈다. 그 전보문은 “조선이 황토(皇土)로서 현재에 이르는 특수사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미국군이 인정하도록 할 것”을 제안하고, “조선은 아직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군이 유혈파괴의 참상을 입지 않도록 정전협정을 급속히 잘 처리할 것”을 제안하였다. 맥아더와 내통하던 그들은 어느새 항복이 아니라 정전을 말하고 있었다. 그들이 말한 정전이라는 개념은, 최고위급 전범으로 기소하여 처단해야 마땅한 히로히도를 ‘천황’의 자리에 그대로 남겨둔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이었다.

8월 30일 미국군 7천500 명과 영국군 450 명으로 이루어진 연합함대 380 척이 일본 도쿄 남쪽에 있는 항구 요코스카(橫須賀)에 입항하였고, 맥아더는 마닐라에서 전용기를 타고 도쿄 인근 가나가와현(神奈川縣)에 있는 아츠키(厚木)비행장에 내렸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는 9월 2일 오전 9시 도쿄만에 정박해 있는 4만5천t급 미국 해군 전함 미주리호(USS Missouri) 함상에서 진행된 일본의 항복조인식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제 전범집단의 우두머리인 일왕 히로히도가 항복문서에 조인해야 마땅한 데도, 맥아더는 그를 항복조인식에 나오라고 명하지 않았다. 히로히도 대신에 일본 외상 시게미츠 마모루(重光葵)가 지팡이를 집고 절룩거리며 나타났고, 일본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郞)가 그와 함께 나왔다.

그들이 항복문서에 조인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맥아더는, 시게미츠 마모루가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조선의 독립투사 윤봉길이 던진 폭탄에 한 쪽 다리를 잃고 의족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1939년 9월 7일부터 1944년 7월 18일까지 제14대 관동군사령관을 지낸 우메즈 요시지로가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 20만 대병력을 동원하였던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에서 조선인민혁명군과 정면대결을 벌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와 아베가 서명한 통치권 이양문서

1945년 9월 2일 재조선미국군사령관 존 하지의 이름으로 작성된, 영어, 일어, 우리말로 쓰여진 ‘남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된 포고문이 서울 상공에서 비행기로 뿌려졌다.

9월 4일 존 하지는 제24군단 제10방공포부대 대장 찰스 해리스(Charles S. Harris)에게 보낸 정책설명서에서 “조선은 일본제국의 일부이므로 미국의 적이며, 따라서 조선은 항복조건들을 따라야 하며, 미국군은 그런 조건을 이행하기 위해 조선에 상륙할 것”이라고 하였다.

9월 7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는 ‘포고령 제1호’를 발표하였다. 미국군은 오늘 조선의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을 점령한다는 것, 남조선 지역의 행정권은 자기가 행사한다는 것, 점령군에 반항하거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는 엄벌한다는 내용이다. 맥아더가 ‘포고령 제1호’를 발표하던 날, 존 하지가 지휘하는 제7상륙부대와 미국 해군제독 토머스 킨케이드(Thomas G. Kinkcaid)가 지휘하는 미국 태평양사령부 제7함대는 서해에서 만나 25척으로 상륙함대를 구성하였다. 그 상륙함대는 이튿날 인천항에 들어왔다.

9월 9일 오후 3시 45분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조인식이 진행되었다. 조인식장에는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 조선주둔 제17방면군 사령관 고즈키 요시오, 경비사령관 야마구치 기이치(山口儀一)가 나왔고, 제24군단 사령관 육군중장 존 하지, 제7함대 사령관 해군대장 토머스 킨케이드, 제7사단장 육군소장 아놀드(A. Arnold)가 나왔다. 조선총독부를 대표한 아베 노부유키와 남조선점령군을 대표한 존 하지는 조선의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통치권을 미국군에게 넘긴다는 통치권 이양문서에 서명하였다.

조인식을 마치고 오후 4시 35분에 조선총독부 앞마당에서 국기 교체식이 진행되었다. 총독부 국기게양대에 올라갔던 일본 국기가 내려지고 미국 국기가 올라갔다. 그러나 총독부 이외의 지방관청에는 그 날 이후에도 여전히 일본 국기가 걸려있었다. 지방관청들에서 일본 국기가 내려진 날은 10월 10일이었다. 해방된 조선에서 일본 국기가 여전히 걸려있었던 까닭은, 존 하지가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 정무총감 엔도, 그리고 총독부 관리들을 9월 14일에 가서야 해임하였기 때문이다. 해임된 그들은 존 하지가 제공해준 군용기를 타고 9월 19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존 하지가 지방관청의 일본인 관리들을 해임한 날은 10월 17일이었다.

존 하지는 군정청을 세우기 전에 조선총독부의 통치업무를 습득해야 한다고 하면서 총독부의 기존 직제에 자기 부하들을 임명하였다. 정무총감에 찰스 해리스(준장), 재무국장에 찰스 고든(Charles J. Gorden, 중령), 광공국장에 존 언더우드(John C. Underwood, 대령), 농상국장에 제임스 마틴(James Martin, 중령), 법무국장에 에머리 우달(Emery J. Woodall, 소령), 학무국장에 얼 락카드(Earl N. Lockard, 대위), 교통국장에 워드 해밀튼(Ward L. Hamilton, 중령), 체신국장에 윌리엄 헐리히(William J. Herlihy, 중령)이 임명되었다.

10월 1일 미국군은 제주도에서 일본군 제58군의 무장을 해제함으로써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에서 무장해제의 임무를 모두 마쳤다. 존 하지가 조선주둔 제17방면군의 무장을 해제하면서 미국군을 가장 먼저 배치한 곳은 부산이었다. 그가 부산에 미국군을 가장 먼저 배치한 까닭은, 조선에서 철수하는 일본인들이 부산에 집결하여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야 하였고, 미국군은 일본인들의 안전귀환을 보장해주어야 하였기 때문이다.

존 하지가 미국군 배치를 마친 날은 1945년 10월 31일이었고, 그가 군정청을 설립한 날은 1946년 1월 4일이었다. 조선의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일본군의 점령은 미국군의 점령으로 교체되었고, 그 지역의 통치권은 조선총독부에서 미군정청으로 이양되었다. 어둠의 세력은 그렇게 서로 내통하면서 이 민족이 누려야 할 해방의 기쁨을 앗아갔다.

이 땅에 남아있는 점령군 깃발

극소수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이 민족의 절대다수는 1945년 8월 15일 이후 조선독립만세를 불렀고 광복의 기쁨을 노래하였다. 64년 전 광복의 기쁨을 담아 불렀던 대중가요 ‘독립행진곡’의 2절은 이렇다.

한숨아 너 가거라 현해탄 건너
설움아 눈물아 너와도 하직
동무야 두 손 들어 만세부르자
아득한 시베리아 넓은 벌판에
아아 해방의 해방의 깃발 날린다

그러나 조선의 북위 38도선 이남에서 휘날린 깃발은 그들이 노래한 해방의 깃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별 50개와 열 세 줄이 그려진 낯선 점령군의 깃발이었다. 맥아더는 히로히도와 내통하고, 하지는 아베 노부유키와 내통하면서 조선의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을 점령하였다. 일제는 조선에게 항복한 것이 아니라 미국에게 항복하였고, 미국은 자기들에게 항복한 일제를 패망시키지 않고 비호해주었으며, 자기들이 점령한 조선에서 처벌을 받고 사라졌어야 할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반역의 무대로 다시 이끌어냈다. 1945년 8월의 어둠은 이 땅에 그렇게 몰려왔고, 이 땅은 64년이 지난 오늘도 그 어둠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였다.

1945년 9월 8일 점령군사령관 존 하지가 들고 이 땅에 들어왔던 그 깃발을 오늘은 주한미국군사령관 월터 샤프(Walter Sharp)가 2009년 8월 17일부터 시작되는 한반도 핵전쟁연습인 을지 프리덤 가디언(Ulji Freedom Guardian) 현장에 들고 나갔다.

1945년 8월 점령군이 이 땅에 몰려온 역사를 잊은 사람은 자신이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어두움을 느끼지 못한다. 이 민족이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날, 이 땅은 어둠에서 벗어나게 된다. 광복의 역사는 통일의 미래에 완성될 것이다. (2009년 8월 17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