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의 눈으로 본 2009년의 진보정치운동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미국에서 찾아낸 여운형 선생의 비밀문서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14분, 여운형 선생이 승용차 안에서 암살범의 흉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의 곁에는 피묻은 가방이 놓여있었다. 당연히 유가족이 고인의 유품으로 넘겨받았어야 하는 그 가방은 수도경찰청을 거쳐 미군정청에게 넘어갔다. 미군정청은 여운형 선생의 가방을 뒤져 그가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지니고 있었던 문서를 가로챘다.

그로부터 근 반세기가 지난 뒤에, 워싱턴 근교 칼리지 팍(College Park)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여운형 선생이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녔던 유품에서 나온 문서가 발굴되었다. 그 문서는 점령군사령관 존 하지(John R. Hodge)의 정치고문 조셉 제이콥스(Joseph Jacobs)가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샬(George C. Marshall)에게 1947년 8월 26일자로 작성하여 보낸 제60호 기밀문서로 분류되어 있었다.

미군정청은 여운형 선생의 유품 가운데서 그 문서를 왜 미국 국무장관에게까지 보고하였을까? 그 문서에는 무슨 비밀이 들어있었던 것일까? 그 문서 가운데 ‘인민당의 요구’라는 제목이 달린 부분은 이렇다.

1. 두 주일 전, 공산당(조선공산당을 뜻함-옮긴이)은 합작운동에 찬성했고 공위촉진 대중집회를 개최했다. 그들은 미국과 협력해 왔으나 갑자기 다음과 같이 행동했다.

1) 합작분쇄, 우익타도 주장을 폈다.

2) 그들은 전평 기념식에서 공위촉진 슬로건을 제외했다.

3) 조선공산당 대표들이 반미강좌를 주최했다.

우리는 이같은 행동에 대해 해명을 요구한다.

2. OOO씨가 서울을 떠나기 전, 인민당은 연막전술을 동의했다. 우리는 인민당이 이 전술계획을 포기하고 적극적 투쟁수단을 사용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고 싶다.

3. 우리는 인민당 전술계획에 대한 솔직한 충고를 원한다.

4. 우리는 좌익통일의 실현과 통일의 시점에 대한 정직한 충고를 원한다.

5. 인민당은 북조선과 모스크바에서 정부설계를 배울 대표를 파견하고 싶다.

6. 우리는 또 북조선과 소련에서 민주주의를 배울 대표를 파견하고 싶다.

여운형 선생이 남긴 문서에는 매우 중대하고 민감한 정치문제들, 그리하여 그 이후 이 땅의 진보운동사에서 지워진 정치문제들이 담겨있었다. 유가족에게 돌려주어야 할 그 문서를 미군정청이 가로채서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고하였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청에서 발굴된 그 문서를 읽으면 아래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여운형 선생은 누구를 만나서 그의 견해를 듣고 결정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 그 문서를 작성하였다. 여운형 선생이 만나려고 한 사람은, 당시 북조선인민위원회의 김일성 위원장이다. 이 나라가 민주주의의 길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극우독재의 구렁텅이에 빠지느냐, 일제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조선이 분단국가로 전락하느냐 아니면 자주적 통일국가로 일어서느냐를 판가름하는 중대한 시기에 여운형 선생은 김일성 위원장의 결정적인 도움을 받으려고 하였다.

여운형 선생은 1946년 2월 10일 북조선인민위원회 김일성 위원장과 처음으로 상봉한 이후, 같은 해 4월 19일부터 25일까지 평양에서, 7월 31일 경기도 연천에서, 9월 23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그리고 12월 28일부터 이듬해 1월 8일까지 평양에서 다섯 차례 만났다.

둘째, 그 문서를 찾아낸 역사학자들은, 그 문서에 담긴 내용으로 봐서 여운형 선생이 1946년 8월 중에 그 문서를 작성하였다고 보았다. 그 문서는 여운형 선생이 1946년 7월 31일 경기도 연천에서 김일성 위원장을 만난 뒤에 작성한 것이며, 같은 해 9월 23일부터 30일까지, 그리고 12월 28일부터 이듬해 1월 8일까지 두 차례 더 김일성 위원장을 만나 그 문서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김일성 위원장의 견해를 들은 뒤에도 흉탄에 쓰러지는 순간까지 계속 지니고 다닌 것이다.

셋째, 미국 국무부가 그 문서를 국립문서기록보관청으로 보낼 때 그 문서에 나오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000으로 지운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름의 주인공은 1946년 당시에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였던 박헌영이다. 여운형 선생이 남긴 문서에 따르면, 박헌영은 갑자기 종래의 온건한 태도를 바꿔 여운형 선생이 좌우합작이라는 말로 표현한 연합전선운동을 분쇄하고,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촉진하라는 요구를 외면하고, 미군정에 대한 정면대결을 선동한 것으로 나온다. 박헌영 계열이 지도부를 장악한 조선공산당이 이처럼 갑작스럽게 전술을 전환한 것과 관련하여, 여운형 선생은 김일성 위원장의 견해를 듣고자 하였다.

그 문서에 “인민당 전술계획에 대한 솔직한 충고를 원한다”고 쓴 것은, 여운형 선생 자신이 위원장으로 있는 조선인민당이 1946년 7월 26일에 발표된 박헌영의 이른바 ‘신전술’에 대처하여 어떠한 전술을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김일성 위원장의 견해를 듣고자 한 것이다. 또한 그 문서에 “좌익통일의 실현과 통일의 시점에 대한 정직한 충고를 원한다”고 쓴 것은, 조선공산당(좌파정당), 조선인민당(중도좌파정당), 남조선신민당(중도좌파정당)이 어떻게 합당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김일성 위원장의 견해를 듣고자 한 것이다.

여운형 선생이 남긴 그 문서에 짧은 문장으로 적혀있는 내용을 파악하려면 1946년의 정치정세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1946년은 이 땅의 정치활동가들이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해 활발히 움직였던 매우 특별한 시기였고, 그 움직임의 한 복판에 여운형 선생이 서 있었다.

이 글에서 1946년에 벌어진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정치활동을 다시 인식하려는 까닭은, 63년 전의 진보정치운동이 오늘 이 땅의 진보정치운동에게 ‘절대로’ 잊어서는 아니될 역사적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63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면서 시대가 바뀌고 정치지형이 매우 달라졌지만, 각당각파 각계각층이 참가하는 폭넓은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그 전선역량으로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역사적 과제는 사라지지 않았고 현 시기 진보정치운동에게 넘겨진 것이다. 각당각파 각계각층이 참가하는 폭넓은 반이명박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그 전선역량으로 정권퇴진운동을 밀고 나가는 당면과제가 제기된 2009년의 진보정치운동이 여운형 선생의 진보정치운동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긴박했던 1946년의 한반도 정치정세

19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 회의가 개최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목적은, 1945년 12월 6일부터 26일까지 미국, 소련, 영국 세 나라 외상들이 모스크바에 모여 회의를 진행하고, 점령국들인 조선, 일본, 독일,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후 처리문제를 합의한 모스크바 국제협정(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이행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모스크바 국제협정 가운데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이행할, 조선문제에 관련된 합의사항은 두 가지였다.

첫째, 점령지 조선에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세운다.

둘째, 미국군 사령관과 소련군 사령관으로 구성된 공동위원회를 내오고, 조선의 임시정부와 민주단체들이 그 위원회에 참가한 가운데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을 결정한다.

모스크바 국제협정의 조선문제에 관한 합의사항들 가운데는 임시정부와 민주단체들이 참가한 미소공동위원회에서 5년 이내의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하는 문제를 논의한다는 대목도 있었지만, 임시정부와 민주단체들이 참가한 미소공동위원회에서 국제신탁통치안이 채택될 가능성은 전무하였다. 그러므로 1946년에 한반도에서 해결해야 하였던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과제는, 실현될 가능성이 전무한 국제신탁통치안을 반대함으로써 모스크바 국제협정 자체를 파기시키는 정치적 자해를 저지하고, 모스크바 국제협정에 명시된 대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세워야, 그 정부가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여 자주독립국가 건설과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정책을 협의, 결정하고 미국이 제기한 국제신탁통치안을 파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임시정부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와 성격의 정부이었던가? 한 마디로 말해서, 민주주의 임시정부의 형태는 인민위원회였고, 그것의 성격은 중도연립정부였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중도좌파정당과 중도우파정당이 공동으로 집권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세우는 방안 이외에 다른 방안은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국제협정이 소련과 미국의 정치타협에 의해서 채택된 것이므로, 그 협정을 이행하는 미소공동위원회도 역시 중도좌파정당과 중도우파정당의 공동집권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좌파정당과 중도좌파정당이 공동으로 집권하는 좌파정부 수립방안은 미국이 반대하고 이 땅의 우파세력이 반대할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실현될 수 없었고, 우파정당과 중도우파정당이 공동으로 집권하는 우파정부 수립방안은 소련이 반대하고 이 땅의 좌파세력이 반대할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실현될 수 없었다.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중도좌파정당과 중도우파정당이 공동으로 집권한 중도연립정부로 세워진다고 해서, 임시정부 수립과정에서 좌파정당이 배제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좌파정당이 중도좌파정당과 합당하여 새로운 진보적 대중정당을 창당하면, 그 진보적 대중정당이 중도우파정당과 공동으로 집권하여 중도연립정부를 세우는 것이다. 중도연립정부는, 여운형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노동자, 농민, 소시민(중산층이라는 뜻으로 쓴 개념)이 세우는 ‘인민의 정부’이지만, 중도좌우파가 임시정부의 수립과 운영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중도연립정부인 것이다.

여운형 선생은 <독립신문> 1946년 10월 18일자와 22일자에 발표한 글 ‘건국과업에 대한 사견’에서 “이 정부(민주주의 임시정부를 뜻함-옮긴이)는 인민의 정치적 자유를 위한 기본 제 권리를 보장할 뿐 아니라 광범한 민중을 국가생활의 제 문제에 직접적으로 능동적으로 동원참여”시킴으로써 “인민주권을 실질상으로 보장하는” 정부이며, 이 정부는 “선진제국이 봉착한 민주주의의 형해화와 기만적 마비의 해독에서 예방될 수 있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한다고 말했다.

그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당면과제다. 중도좌파정당과 중도우파정당이 공동으로 집권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세우려면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였을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3당합당과 연합전선운동을 추진하여야 하였다. 3당합당이란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을 합당하여 새로운 진보적 대중정당을 창당하는 과제를 말한다.

3당합당은 어느 정당이 주도하여야 하였을까? 두말할 나위 없이, 중도좌파정당인 조선인민당이 주도하여야 하였다. 그 까닭은, 3당합당이 중도연립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합당이기 때문이다. 만일 좌파정당과 중도좌파정당이 공동으로 집권하는 좌파연립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3당합당이라면, 좌파정당인 조선공산당이 합당을 주도해야 마땅하였겠지만, 1946년의 정치정세는 좌파연립정부 수립이 아니라 중도연립정부 수립을 요구하였다.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세우려면, 미소공동위원회의 후원과 방조가 요구되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요구된 것은 민주정치역량이었다. 민주정치역량이 준비되지 못한 조건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아무리 후원과 방조를 준다한들, 자주독립국가 건설과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해 민주정치역량을 준비한다는 말은, 각당각파 각계각층에 분산되어 있는 민주정치역량이 단일한 전선에 결집한다는 뜻이다. 연합전선을 형성하지 않고 민주정치역량을 준비하는 방도는 없다. 다시 말해서, 민주정치역량을 결집하여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그 전선에 의거하여 인민위원회를 세우고, 인민위원회를 강화발전시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세우는 것이다. 민주정치역량이 결집한 연합전선 위에 인민위원회를 세우고, 인민위원회를 강화발전시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세워야, 그 정부가 민중 주체의 민주정부로 될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세우는 것은 연합전선 형성에 의해서만, 오로지 그것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여운형 선생은 <중외신보> 1947년 5월 25일자에 실린 근로인민당 창당대회 개회사에서 “노동자와 농민만이 민주조선을 건설할 수 없을 것이고, 소시민만으로 조선건설이 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의 건국은 오로지 이 각계각층이 한데 뭉쳐야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연합전선은 어떻게 형성할 수 있었던가?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하는, 그리고 3당합당으로 창당될 새로운 진보적 대중정당과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부분적으로 지지하는 중도우파정당의 정치연합을 중심으로 다종다양한 민주정치역량이 총결집하면 그것이 바로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3당합당을 실현하지 못하여 새로운 진보적 대중정당을 창당하지 못한 조건에서는 아무리 연합전선을 형성하려고 해도 형성할 수 없었다. 3당합당→진보적 대중정당 창당→중도좌파정당과 중도우파정당의 정치연합을 중심으로 민주정치역량이 총결집한 연합전선 형성→연합전선에 의거한 인민위원회 결성→인민위원회의 강화발전에 의한 중도연립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집권전략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그렇다면 1946년의 정치정세에서 3당합당으로 시작하여 중도연립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집권전략은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이 있었을까? 1945년이나 1947년과 달리, 1946년의 정치정세는 중도연립정부를 세울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높여주었다. 그 까닭은 아래와 같다.

첫째,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에 따르면, 1946년에 38도선 이남지역의 군(郡)들 가운데 인민위원회가 조직된 군은 약 절반에 이르렀다고 한다. 인민위원회는 지역에 따라 그 성격이 조금씩 달랐지만, 대체로 좌파, 중도좌파, 중도우파의 결집체로 조직되었다. 이것은 인민위원회를 강화발전시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세울 가능성이 매우 높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미군정청이 인민위원회를 전면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 때는 1947년이었다.

둘째,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이행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활동을 개시하였다.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 제1차 회의가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가 활동을 개시한 것은, 중도연립적 성격의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세우기에 유리한 합의사항을 담은 모스크바 국제협정이 이행되기 시작하였음을 뜻이다. 1946년 이전이나 이후에는 중도연립정부를 세우기에 유리한 국제정세가 조성되지 않았다. 1946년은 중도연립정부 수립을 위한 첫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셋째, 미국 국무부는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김구 계열과 이승만 계열의 우파세력들을 거세하라는 지침을 점령군사령관 존 하지에게 보냈다. 1946년 6월 6일 국무부 점령지구담당 차관보 존 힐드링(John H. Hildring)이 육군성 작전처에 보낸 조선정책각서가 그러한 지침이 내려졌음을 입증한다.

미국 국무부가 박헌영 계열의 좌파세력을 거세하라는 지침을 존 하지에게 내렸다는 문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아 자료적으로 입증하지 못하지만, 미국 국무부가 김구 계열과 이승만 계열의 우파세력들보다 박헌영 계열의 좌파세력을 더 먼저 거세하려고 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1946년에 미국 국무부의 조선정책은 우파세력과 좌파세력을 거세하기 위해 여운형 계열의 중도좌파세력과 김규식 계열의 중도우파세력을 내세우는 정치공작으로 추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국무부의 지침에 따라 미군정청이 추진한 정치공작을 좌우합작공작이라 부른다. 1946년 6월 30일 존 하지는 좌우합작을 적극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1946년 7월 미국 국무부가 미군정청에 직접 보낸 또 다른 정책지침은, 6월 6일자로 발송했던 조선정책각서를 재확인하면서 미군정청이 김구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우파세력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중도세력을 지지할 것과 중도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된 과도입법기구를 설립할 것을 명시하였다.

물론 미국 국무부의 정책지침에 따라 미군정청이 추진한 좌우합작공작은 한반도에서 좌파정당의 집권을 저지하고 친미정부를 세우려는 정치음모의 산물이었지만, 중도좌파정당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운동은 미군정청의 좌우합작공작을 돌파할 수 있었다. 그 움직임의 중심에 서 있던 사람이 여운형 선생이다.

만일 여운형 선생이 정열적으로 추진하였던 3당합당과 진보적 대중정당 창당이 실현되고, 폭넓은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더라면, 38도선 이남지역에 중도연립정부가 세워졌을 것이다. 중도연립정부는 북측에 세워진 정부와 통합하여 38도선을 철폐하고 한반도에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좌파정당과 중도좌파정당은 자기들에게 절대적 과업으로 주어진 3당합당에 실패하였고, 진보적 대중정당을 창당하지 못하였으며, 폭넓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실패의 연속은 중도연립정부 수립전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물거품이 꺼져버린 절망의 공간에 밀어닥친 것은 극우독재와 분단 고착화, 그리고 미국의 반공전쟁이었다.

3당합당에 목숨을 바친 몽양

여운형 선생이 추진한 3당합당과 진보적 대중정당 창당은 왜 좌절되었을까? 그리고 그가 구상한 폭넓은 연합전선은 왜 형성되지 못하였을까? 이 물음은 1946년 이후 역사박물관으로 들어가버린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은 각당각파 각계각층이 참가하는 폭넓은 반이명박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정권퇴진운동을 추진해야 할 2009년의 정치현실에서 제기되는 관심사에 직결된 것이다. 이에 관해서 아래와 같은 논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째, 3당합당을 저지, 파탄시킨 장본인은 미군정청과 박헌영 계열의 좌파세력이었다. 존 하지가 지휘한 미군정청이 여운형 선생이 추진한 3당합당을 저지, 파탄시켰음을 입증하는 자료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운형 선생이 남긴 기록에 따르더라도, 미군정청은 3당합당을 격렬하게 반대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북조선주둔 소련군 민정담당 부사령관 안드레이 로마넨코(Andrei A. Romanenko) 소장이 소련 연해주 군관구 군사회의 위원 테렌티 슈티코프(Terenti F. Shtykov) 상장(중장)에게 1946년 9월 28일자로 보낸 장문의 보고서다. 그 보고서를 작성한 로마넨코는 여운형 선생이 1946년 9월 23일부터 30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위원장과 만난 자리에 동석하였으므로 여운형 선생의 발언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로마넨코의 보고서에 따르면, 1946년 9월 26일 여운형 선생이 김일성 위원장을 만나 두 시간에 걸쳐 38도선 이남지역의 정치정세에 대해 보고하면서, “미국인들은 좌익정당들의 합당을 남조선에서 미군정의 정책을 반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치라고 이해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합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3당합당을 격렬하게 반대한 미군정청의 행동이 역사자료에서 드러나지 않은 까닭은, 그들의 반대행동이 비밀공작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3당합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여운형 선생을 암살한 극우테러단체 백의사가 존 하지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는 제971 방첩대 파견대(CIC Department)의 산하조직이었다는 사실이야말로, 미군정청이 3당합당을 얼마나 격렬하게 반대하였는지를 말해준다.

3당합당을 격렬하게 반대한 것은 미군정청만이 아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도 3당합당을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46년 11월 23일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이 박헌영의 주도로 합당되어 남조선로동당(약칭 남로당)을 창당한 것을 두고 3당합당이 실현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남로당 창당은 진보적 대중정당을 창당한 것이 아니라 좌파정당을 개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원래 3당합당의 목적은 좌파정당 개편이 아니라 진보적 대중정당 창당이었으므로, 박헌영이 좌파정당 개편을 주도한 것은 3당합당을 사실상 저지, 파탄시킨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면 3당합당 문제에 대한 김일성 위원장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1946년 7월 16일 평양에서 박헌영을 참석시킨 가운데 진행된 북조선공산당 상무위원회에서 김일성 위원장은 3당합당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혔고, 그 회의는 그 견해에 따라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첫째, 3당합당으로 건설할 새로운 당은 계급정당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 근로인텔리 중심의 대중정당이다.

둘째, 3당합당으로 건설할 새로운 당의 대표로는 인민당의 대표적인 인물(여운형을 뜻함)을 추대하고, 공산당 지도자(박헌영을 뜻함)는 부위원장을 맡는다.

김일성 위원장은 1946년 7월 31일 경기도 연천에서 여운형 선생을 만나 3당합당 문제에 관해 협의하면서, 조선인민당이 3당합당을 발의하고, 3당 지도부가 완전히 합의하여 합당을 추진하고, 조선인민당이 합당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하였다.

이러한 협의를 배경으로, 여운형 선생이 이끄는 조선인민당은 1946년 8월 3일에 3당합당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박헌영은 여운형 선생이 추진하는 3당합당을 저지하였을 뿐 아니라 여운형 선생을 배제하고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1946년 9월 4일에 남조선로동당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여운형 선생이 추진하던 3당합당을 박헌영이 어떻게 저지, 파탄시켰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2008년 4월 11일에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총선정국에 다시 읽는 진보정당사의 교훈’에서 자세히 논하였다.

여운형 선생이 추진하는 3당합당을 박헌영이 노골적으로 방해하고 있었던 1946년 9월 26일, 평양을 방문 중이던 여운형 선생은 김일성 위원장과 만난 자리에서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사업해야 할지 여러분에게 조언을 받고자 여기에 왔다. 내 의견으로는 합당이 이루어진다면 미국인들의 압박 아래 있게 될 것이며, 로동당(남조선로동당을 뜻함-옮긴이)은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하로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합당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3당합당의 가능성을 비관하던 여운형 선생에게 김일성 위원장은 “우리는 조선의 남부에서 좌익정당 합당이 보다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승리하는 결과가 되었다. 만약 이 사업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으로 드러난다면, 일시적으로 연기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 때 여운형 선생은 의자에서 일어나 잠시 방안을 서성거리더니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합당은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의 노동당 합당을 수행할 것이다. 남으로 돌아가게 되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을 해낼 것이다. 나는 노동당의 지도자가 될 것이고, 우리 당은 이남에서 가장 강력한 당이 될 것이다. 나는 미국인들이 나를 체포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줄임) 나는 끝까지 남쪽의 노동당 창립을 위해 투쟁할 것이며, 노동당은 무조건적으로 창립될 것이다.”

여운형 선생은 미군정청의 탄압을 무릅쓰고 진보적 대중정당을 창당하려고 결심하였다. 미군정청과 박헌영이 극렬하게 저지, 파탄시키려는 3당합당과 진보적 대중정당 창당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던 여운형 선생은 결국 미군정청의 암살지령을 받은 극우테러조직의 흉탄에 목숨을 잃었다.

몽양의 눈으로 본 2009년의 진보정치운동

1946년에 좌파, 중도좌파, 중도우파가 총결집한 폭넓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지 못한 원인은, 좌파정당의 조급증과 박헌영의 방해공작에 있었다.

위에서 논한 대로, 3당합당으로 진보적 대중정당을 창당하고, 그 대중정당과 중도우파정당의 정치연합을 중심으로 하여 폭넓은 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여운형 선생은 <독립신문> 1946년 10월 18일과 22일에 발표한 글 ‘건국과업에 대한 사견’에서 폭넓은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과업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이 합작은 원래가 계급적 기초와 정치적 이념을 달리하는 당파와 세력 간에 성립되는 일정한 한계성을 가진 정치적 협상이 아닐 수 없는 만큼, 합작에 참가한 각 성원은 각기 자체의 독자성을 보유하는 동시에 서로 양보하고 협조하는 공동정신을 발휘하여야 할 것이며, 중대한 문제에 관하여 견해의 차이가 생길 때에는 광범한 전 민족 대중의 비판에 맡겨 그 옳고 그름을 결정할 아량과 자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1946년의 역사는 좌파정당이 주도하는 폭좁은 연합전선만 형성하는 것으로 끝났다. 진보적 대중정당이 창당되지도 않았는데, 좌파정당이 주도하여 좌파연합전선을 형성하였으니, 그 전선의 폭이 좌파계열만 결집하는 범위로 좁아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정부수립과정이나 정권교체과정에서 선도역할을 맡은 좌파정당이 주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 정당은 대중을 멀리 뒤에 떨어뜨려놓고 자기들끼리만 앞으로 달려나가는 조급증에 빠지게 된다. 대중이 아직 요구하지 않고 있거나 아직 준비하지 못하였는 데도, 조급하게 자기를 중심으로 투쟁하려는 병폐가 조급증이다. 조급증은 좌경적 오류를 낳는다.

좌파정당인 조선공산당이 주도하여 좌파와 중도좌파만 결집시킨 폭좁은 좌파연합전선은, 1946년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의 결성으로 형성되었다. 민전은 조선공산당,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선농민조합전국총동맹, 남조선민주청년동맹 등을 중심으로 한 좌파세력의 결집체였다.

그러나 좌파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고 해서, 그것을 무턱대고 탓할 일은 아니다. 민전을 확대강화하여 폭넓은 연합전선을 형성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민전을 확대강화하여 폭넓은 연합전선을 형성할 가능성은 여운형 선생이 주도하여 결성한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은 좌우합작위원회를 미군정청이 친미정부를 세우기 위해 추진한 좌우합작공작의 산물로만 규정하였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여운형 선생은 미군정청이 좌우합작공작을 추진하는 정세변화를 이용하여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여운형 선생은 김규식을 여러 차례 만나 설득한 끝에 그를 좌우합작운동에 끌어들였고, 마침내 1946년 6월 14일 4인회담을 성사시켰다. 4인회담에는 좌파에서 여운형과 허헌, 우파에서 김규식과 원세훈이 각각 참석하였다. 7월 10일에는 좌우합작위원회 결성을 합의하였는데, 좌파에서 여운형 선생을 주석으로, 허헌, 이강국, 정노식, 성주식이 대표로 참가하였고, 우파에서는 김규식 선생을 주석으로, 원세훈, 안재홍, 최동오, 김붕준이 대표로 참가하였다. 1946년 10월 7일에 결성된 좌우합작위원회는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좌우합작 7원칙은 좌파, 중도좌파, 중도우파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공정한 원칙이었다. 여운형 선생이 주도하여 결성한 좌우합작위원회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2005년 5월 3일에 발표한 나의 글 ‘8.15 이후 3년 동안 전개된 통일전선운동의 역사적 경험’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다.

만일 민전이 좌우합작 7원칙을 받아들여 좌우합작위원회와 손잡고 폭넓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더라면 이 땅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박헌영은 1946년 10월 26일과 27일에 <독립신보>에 ‘좌우합작 7원칙 비판’이라는 제목의 글을 연재하면서 좌우합작위원회를 극렬하게 비방중상하였다. 박헌영의 비방중상은 민전과 좌우합작위원회가 연대하여 폭넓은 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없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3당합당으로 진보적 대중정당을 창당하지 못한 데다가, 박헌영의 격렬한 비방중상까지 나도는 판이었으니, 폭좁은 연합전선을 폭넓은 연합전선으로 확대강화할 가망은 없었다.

만일 1946년 말에 또는 1947년 초에 3당합당을 실현하고 진보적 대중정당을 창당하였더라면, 민전과 좌우합작위원회가 손잡고 폭넓은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문제를 원만히 풀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46년의 정치정세는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하였다.

여운형 선생이 추진한 3당합당과 좌우합작운동이 63년의 시대적 간극을 뛰어넘어 오늘의 정치현실에게 말하는 것은, 중도좌파정당과 중도우파정당이 연대하여야 각당각파 각계각층이 참가하는 폭넓은 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고, 폭넓은 연합전선을 형성할 때 비로소 우파정부와 우파집권정당에 맞서 정권퇴진운동을 추진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중도우파정당을 배제하고 중도좌파정당만 참가하는 ‘진보정치연합’은 각당각파 각계각층이 참가하지 못한 폭좁은 중도좌파전선이므로, ‘진보정치연합’의 힘으로는 우파정부와 우파집권정당을 고립시키기는커녕 그들의 탄압공세에 대응하기도 버거워 정권퇴진운동을 추진하지 못한다.

중도좌파정당과 중도우파정당의 연대로 폭넓은 반이명박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정권퇴진운동을 밀고 나갈 때, 중도좌파정당과 중도우파정당이 공동으로 집권하는 중도연립정부 수립을 2012년의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다. 중도좌파정당과 중도우파정당의 공동집권으로 중도연립정부를 세울 때,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길을 열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2009년 7월 13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