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은하’를 ‘대포동’이라 하는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민감한 시기에 민감하게 등장한 위성발사체

2009년 2월 24일 북측의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가 대변인 담화를 발표하였다.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는 남측 언론에 등장하지 않은 낯선 이름이다. 북측이 그 위원회를 외부세계에 알린 것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런민리바오(人民日報)〉 국제부가 발행하는 국제시사주간지 〈환귀쉬바오(環球時報)〉 1998년 10월 25일자에 실은 〈런민리바오〉 평양특파원의 대담기사를 통해서였다. 그 기사는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 기술국 부국장 등 북측의 우주과학자 세 사람과 대담한 것이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가 북측의 위성발사에 참여한 우주과학자들과의 대담기사를 실었다는 말은, 중국이 북측의 위성발사를 반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북측이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실은 위성발사체 백두산 1호를 쏘아올리기 약 한 달 전인 1998년 7월 중국은 시창(西昌)위성발사장에서 상업용 통신위성 신눠(鑫諾) 1호를 실은 위성발사체 창정(長征) 3호 비(B)를 3만6천km 상공에 있는 지구정지궤도(geosynchronous orbit)에 쏘아올린 바 있다. 1998년에 중국이 북측의 위성발사를 반대하지 않았다면, 2009년에 북측이 준비하고 있는 위성발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번에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가 발표한 대변인 담화는, 북측의 위성발사에 관한 외부세계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에 있는 위성발사장의 이름은 동해위성발사장(East Sea Launching Site)이다. 전세계에서 위성발사장을 자체로 운영하는 나라는 북측을 포함하여 13개국이다. 남측은 전라남도 고흥군 봉래면 예내리 외나로도에 공사비 2천650억원을 들여 나로우주센터(Naro Space Center)를 세우는 중인데, 2009년 3월이나 4월에 완공할 예정이다. 충청남도 대전시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1989년에 설립된 한국항공우주연구원(KARI)에서 만드는 인공위성 아홉 기를 2015년까지 나로우주센터에서 쏘아올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해오고 있다.

둘째, 북측에서 발사준비에 들어간 새로운 위성발사체 이름은 은하 2호다. 1998년 8월에 쏘아올린 위성발사체가 백두산 1호였으므로, 이번에 쏘아올릴 위성발사체는 백두산 2호가 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그 예상은 빗나갔다. 위성발사체 이름을 백두산에서 은하로 바꾼 것은, 백두산 계열의 위성발사체 대신에 은하 계열의 위성발사체를 제작하였다는 뜻이다. 은하 계열의 위성발사체를 제작하였다는 말은, 백두산 계열의 위성발사체보다 더 성능이 향상된 위성발사체를 제작하였다는 뜻이다.

대변인 담화는 “지난 10년간 나라의 우주과학기술을 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투쟁이 힘있게 벌어져 위성발사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이 이룩되였다”고 지적하였는데, 인공위성제작과 구별되는 위성발사체제작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고 말한 것은 은하 2호가 성능을 크게 향상시킨 위성발사체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셋째, 은하 2호가 실어나를 인공위성은 시험통신위성 광명성 2호다. 통신위성이 아니라 시험통신위성(experimental communication satellite)이라 한 것을 보면, 완성된 통신위성이 아니라 시험적으로 쏘아올리는 통신위성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에 시험통신위성을 쏘아올리고, 다음에는 완성된 통신위성을 쏘아올릴 것으로 보인다. 대변인 담화는 “가까운 몇 해 안에 나라의 경제발전에 필수적인 통신, 자원탐사, 기상예보 등을 위한 실용위성들을 쏘아올리고 그 운영을 정상화할 것을 예견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북측은 통신위성 이외에 자원탐사위성(earth resources observation satellite)이나 기상위성(meteorological satellite)도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은하 1호는 언제 쏘아올렸을까?

북측이 이번에 쏘아올릴 위성발사체를 은하 2호라고 부르는 것은, 이전에 은하 1호를 쏘아올린 적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북측은 1998년 8월 31일에 쏘아올린 백두산 1호 이외에 어떤 다른 위성발사체를 쏘아올리지 않았다. 북측이 2006년 7월 5일에 쏘아올린 것은 위성발사체가 아니라 위성발사체로 위장한 순항미사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2006년 7월 28일에 발표한 나의 글 ‘반제국주의 미사일강령과 한(조선)반도 정세인식’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다.

북측이 이번에 은하 계열의 위성발사체를 처음 만들고서도 은하 2호라고 이름을 붙인 것일까?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제작순서를 2호부터 시작해야 할 아무런 까닭이 없다. 그렇다면 은하 1호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북측이 은하 1호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도 공개하지 않았으므로 외부에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은하 1호를 다른 나라에서 원정발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한 추정을 뒷받침해주는 정보를 이란의 위성발사경험에서 찾아낼 수 있다.

이란의 미사일 개발기술이나 위성발사체 개발기술은 전적으로 북측에 의존한 것이다. 그 분야의 개발기술에 관한 한, 이란이 북측에 의존해온 역사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 9월부터 1988년 8월까지 8년 동안 계속된 이란-이라크전쟁은 세계전쟁사에 최초의 미사일전쟁으로 기록되었는데, 당시 미사일 제작능력이 없었던 이란은 북측에서 급히 미사일을 수입하여 이라크의 미사일공격에 대응하였다. 이란의 다급한 요청을 받은 북측은 이란에게 아예 미사일 설계도를 넘겨주었을 뿐 아니라, 미사일 기술자들과 건설기술자들을 파견하여 미사일 공장을 통째로 지어주기까지 하였고, 북측에서 수입해간 미사일을 실전에서 쓸 수 있도록 군관(장교)을 파견하여 전술지도까지 해주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대통령이 지휘하는 이라크군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이라크가 승리하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1982년 6월에 천명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의 국가안보결정서(NSDD)에 따라 이라크군은 미국의 군사지원을 받기 시작하였으나, 이슬람혁명을 막 끝낸 직후라서 전면전 경험이 전혀 없는 이란혁명수비대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이란에 파견된 수많은 조선인민군 군관들은 이란혁명수비대 대대장으로 참전하여 직접 전투를 지휘하였다. 그 전쟁은 북측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이란과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이라크가 맞붙은 격전이었다. 북측과 이란은 비록 사상과 체제는 달라도 반제국주의전선에서 함께 싸운 것이다.

그 전쟁이 끝난 때로부터 15년이 지난 2003년 3월 20일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하여 강점하고 사담 후세인을 처형하였고, 이란은 2005년 10월 28일 러시아의 위성발사체(Cosmos-3M)에 실은 인공위성 시나(Sina) 1호를 러시아의 위성발사장에서 쏘아올림으로써 마침내 인공위성 보유국 대열에 들어섰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란은 2008년 2월 4일 3단형 위성발사체 카보쉬가(Kavoshgar) 1호를 쏘아올렸다. 그러나 그 위성발사체에는 인공위성이 실려있지 않았고, 바람, 온도, 압력을 탐측하는 소형 탐측장비만 실려있었다. 아직 인공위성을 실을 만큼 위성발사체 제작기술이 충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2009년 2월 2일 이란의 3단형 위성발사체 사피르(Safir) 2호가 화염을 뿜으며 지구궤도를 향해 날아갔다. 사피르 2호의 탄두부에는 오미드(Omid)라는 이름의 인공위성이 실려있었다. 이란의 국영텔레비전방송 프레스 티뷔(Press TV)는 이튿날 사피로 2호 발사장면을 방영하였는데, 인공위성 오미드는 앞으로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석 달 동안 하루에 열 다섯 번씩 지구궤도를 돌며 자료수집활동을 벌이게 된다고 한다. 이란은 2010년까지 인공위성을 두 기 더 쏘아올려 모두 네 기를 보유하게 될 것이다. 이란항공우주기구(Iranian Aerospace Organization)의 레자 타키푸어(Reza Taqipour) 대표는 “앞으로 6-12년 안에 이란의 첫 우주비행사가 우주로 진출할 것인데, 늦어도 2012년까지는 이란의 첫 우주인이 탄생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하였다.

2005년까지만 해도 위성발사체를 아직 만들지 못해서 러시아가 만든 위성발사체에 자국의 인공위성을 실었던 이란이 불과 3년 뒤인 2008년 2월에 자국의 위성발사체를 쏘아올린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란이 그처럼 비약적으로 발전시켜온 우주산업 개발과정의 이면에서 그들의 개발사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준 나라는, 이미 25년 전에 이란의 미사일 개발사업을 지원하기 시작한 북측이다. 이란이 3단형 위성발사체 제작기술에 이용한 탄도미사일 샤합(Shahab) 3호는 원래 북측이 독자생산한 탄도미사일 ‘노동 1호’의 완전한 복제품이다. 사거리 2천km의 샤합 3호는 2002년 5월에 실시한 네 번째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였고, 2004년 11월부터 생산에 들어갔다.

2008년 2월 4일 카보쉬가 1호를 쏘아올린 이란은 아홉달 뒤인 11월 26일 카보쉬가 2호를 쏘아올렸다. 카보쉬가 2호를 쏘아올리기 석 달 전인 2008년 8월 16일 이란은 모형위성을 실은 위성발사체를 또 쏘아올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란이 그 위성발사체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익명의 위성발사체가 혹시 은하 1호가 아니었을까?

2007년 4월 25일 북측의 조선인민군 창건 75주년 군사행진에서 처음 공개된 12기의 신형 순항미사일은 사거리가 4천km에 이르는, 괌과 알래스카를 타격할 수 있는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인데, 미국군 정보당국은 그 신형 미사일을 제멋대로 ‘무수단 미사일’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북측이 그 신형 미사일을 한 차례도 시험발사해보지 않고서 실전배치하였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한 것일까? 미국군 정보당국에 따르면, 북측이 그 신형 미사일을 이란에 가져가 원정발사실험을 하였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고 한다. 북측이 은하 1호를 이란에 가져가 쏘아올렸다고 보는 것은 무리한 상상이 아니다.

완성을 앞둔 케이에스엘뷔(KSLV) 1호

우주산업은 21세기를 이끌어 가는 첨단산업이다. 우주개발에서 앞선 7개국 러시아, 미국, 프랑스, 이스라엘, 중국, 일본, 인도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주산업을 발전시키지 못하면 휴대전화, 인터넷, 고화질 텔레비전, 지상항법장치(GPS) 자동차를 만들어낼 수 없으며, 자원개발, 생명공학개발, 기상예보, 재해예방, 국토관리, 지리정보측정도 불가능하다.

이번에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 대변인 담화에서 북측이 국가우주개발전망계획을 추진해오고 있음을 밝힌 것은, 북측이 우주산업 선진 7개국을 따라잡기 위해 힘쓰고 있음을 뜻한다. 조선우주과학기술위원회 소속 우주과학자들은 1998년 10월 〈런민리바오〉 평양특파원과 진행한 대담에서 북측이 1980년대 초에 벌써 3단형 위성발사체를 개발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북측이 추진해온 우주개발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지금 남측의 교육과학기술부도 우주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2005년 5월 31일 국가우주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설치한 우주개발진흥법을 제정하고 그 이듬해부터 시작한 우주개발중기계획을 2010년까지 추진하는 중이다. 남측이 개발비 5천98억원을 들여 만들고 있는 위성발사체 케이에스엘뷔(KSLV) 1호는 2009년 여름에 쏘아올릴 예정인데, 지금 그 이름을 공모하는 중이다. 케이에스엘뷔 1호는 남측에서 처음으로 만들어내는 2단형 위성발사체이다.

현대과학기술의 최고결정체인 위성발사체를 만들어내려면 신소재공학, 기계공학, 전자공학, 화공학, 컴퓨터, 광학, 통신이 고도로 발전되어야 한다. 발전된 과학기술력을 가진 나라도 위성발사체를 독자기술로 개발하기 버거워 다른 나라와 공동으로 개발하는 경우가 있다.

남측은 케이에스엘뷔 1호 제작에 필요한 핵심기술을 지도해달라고 미국에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러시아 기술에 의존하여 만들기 시작했다. 위성발사체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액체연료를 쓰는 1단 로켓인데, 위성발사체를 만드는 핵심기술이 없는 남측은 러시아의 흐루니세프 우주센터(Khrunichev Space Center)에서 만든 1단 로켓 앙가라(Angara)를 2천억 원이나 주고 수입하였다.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흐루니세프 우주센터는 2001년 8월 5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시찰한 러시아의 1급 비밀시설인데, 러시아가 자랑하는 고성능 로켓들인 프로톤(Proton)과 로콧(Rokot)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흐루니세프 우주센터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내방을 기념하여 제작한 프로톤 로켓모형을 선물로 증정한 바 있다.

지금 흐루니체프 우주센터가 파견한 러시아인 기술자들은 고흥군 고흥읍에 있는 호텔에 장기투숙하면서 위성발사 관련기술을 지도해주고 있다. 물론 흐루니세프 우주센터가 남측에 파견한 러시아인 기술자들은 미국 당국의 엄격한 감시를 받으며 남측에게 기술지도를 해주고 있다. 미국은 남측이 초당 45kg 이상의 추력을 내는 고체연료 로켓을 개발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으므로, 남측은 위성발사체 핵심기술을 자력으로 개발하고 싶어도 개발할 수 없는 것이다. 남측이 2001년에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에 가입하였으니, 미국의 엄격한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

남측은 1단 로켓을 러시아에서 수입한 것만이 아니라, 발사대도 러시아 설계기술로 세웠고, 레이더 통제기술도 프랑스에서 사왔고, 정밀측정촬영장비도 이스라엘에서 사왔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흐루니세프 우주센터와 공동으로 위성발사체를 개발하고 있다는 언론보도는 사실이 아니다. 다른 산업분야에서도 그러한 것처럼, 우주산업에서도 북측은 자력갱생으로 기술적 난관을 돌파하였으나, 남측은 미국의 통제와 감시에 발목이 잡힌 채 러시아, 프랑스, 이스라엘의 기술과 장비에 의존하고 있다.

이처럼 남측과 북측이 각자 우주산업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지금, 미국이 남측의 우주산업개발은 반대하지 않고 북측의 우주산업개발만 반대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한반도의 인접국들인 중국, 러시아, 일본은 우주산업개발에 열중하고 있는 데, 북측의 우주산업개발만 반대하는 어떤 명분도 논리도 근거도 있을 수 없다. 은하 2호는 지구궤도를 향해 날아올라야 한다.

백두산 2호의 발사준비와 발사유보

‘핵문제’가 사실상 핵문제가 아닌 것처럼, ‘미사일문제’도 사실상 미사일문제가 아니다. ‘핵문제’가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을 포기하는 문제인 것처럼, ‘미사일문제’도 그러하다.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풀기 위한 모든 종류의 회담이 이르게 될 종착점은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완전포기이며,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완전포기는 주한미국군을 완전히 철군할 때 완료된다.

북측이 백두산 1호를 쏘아올린 1998년을 전후하여 북측과 미국이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풀기 위한 두 갈래의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 갈래는 1997년 12월 9일 북측과 미국에 더하여 남측과 중국까지 참가한 가운데 제네바에서 시작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4자회담’이고, 다른 한 갈래는 1996년 4월 20일 북측과 미국이 베를린에서 시작한 미사일회담이다.

1997년 12월에 제네바에서 시작된 4자회담은 북측이 백두산 1호를 쏘아올린 이듬해인 1999년 8월 5일 제네바에서 진행한 제6차 본회의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4자회담은 백두산 1호를 발사한 지 1년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다른 한편, 1996년 4월에 시작된 미사일회담은 진척을 보지 못하다가 북측이 백두산 1호를 쏘아올리자 급진전되었다. 1998년 10월 1일 제3차 미사일회담이 뉴욕에서 열렸고, 1999년 4월 24일 제4차 미사일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10년이 지난 오늘 사람들의 기억에서 거의 지워지고 말았지만, 미사일회담과 4자회담이 진행되던 기간에 북측은 백두산 2호 발사준비로 클린턴 정부를 강하게 압박한 일이 있었다. 북측이 백두산 2호 발사준비를 완료한 시점은 1999년 6월이었다. 1999년 8월 2일 베이징에서 열린 4자회담 제6차 본회의에 참석한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기자들에게 “(미국이 백두산 2호를) 쏘지 말라고 하는데, 적대정책을 그만두면 쏘지 않을 것이고, 그때 가서 보겠다”고 말하였다.

1999년 8월 11일 비공개로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천용택 국가정보원장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북측은 1999년 5월 초에 무수단리 발사장에 있는 수직발사대를 보강하기 위한 작업대를 네 개에서 다섯 개로 증설하고, 수직발사대를 지름 2.7m짜리 대형발사대로 교체하고, 연료저장소와 발사대를 연결한 송유관을 보수하고, 5월 5일과 21일에는 시험장에서 로켓엔진 연소시험을 실시함으로써, ‘대포동 2호’ 발사준비를 완료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백두산 2호 발사준비를 끝마친 북측의 대미압박공세는, 1999년 9월 7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5차 미사일회담에서 가시적 성과를 이끌어냈다. 그 회담에서 미국은 정전협정 이후 46년 동안이나 붙들고 있던 대북경제제재를 완화하고, 그에 상응해서 북측은 백두산 2호 발사를 일시적으로 유보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 합의에 따라, 1999년 9월 17일 빌 클린턴(William J. Clinton) 대통령은 대북경제제재조치를 완화한다고 발표하였고, 9월 24일 북측 외무성 대변인은 “조미회담에 좋은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이 회담이 진행되는 기간에는 미싸일을 발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1999년 11월 15일 베를린에서 열린 조미(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미국은 백두산 2호를 발사하지 않으면 자기들이 일본을 설득하여 대북경제협력 명분으로 20억 달러를 ‘보상’하게 하겠다고 비공식적으로 약속하였다. 남측의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이 워싱턴에 있는 한반도 전문가의 제보를 인용하여 보도한 2002년 9월 19일자 기사에 따르면, 2002년 9월 17일 평양에서 조일(북일)정상회담이 열리기 얼마 전에 진행된 비공개협상에서 일본이 우선 ‘보상금’ 20억 달러를 북측에게 일시불로 지급하는 문제가 거의 합의되었다고 한다. 클린턴 정부가 북측에게 제시하고 일본이 행동에 옮기려고 하였던 ‘금전보상’은 북측의 백두산 2호 발사유보에 상응한 조치였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1994년 10월에 체결한 조미(북미) 기본합의를 부쉬 정부가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양자회담을 중단하자, 북측도 백두산 2호 발사유보공약을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다. 부쉬 정부가 기본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였어도 북측은 2003년까지 백두산 2호 발사유보공약을 지켰다. 그 공약은 2000년 10월 12일 워싱턴에서 발표한 조미(북미)공동코뮈니케에서 천명한 것이다. 공동코뮈니케에 따르면, “쌍방은 미싸일문제의 해결이 조미관계의 근본적인 개선과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의 평화와 안전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라는데 대하여 견해를 같이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은 새로운 관계구축을 위한 또 하나의 노력으로 미싸일문제와 관련한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모든 장거리미싸일을 발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하여 미국측에 통보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1년 5월 3일 평양을 방문한 요란 페르손(Yoran Pershon) 스웨덴 총리 겸 유럽연합 순회의장과의 정상회담에서 2003년까지 (백두산 2호) 발사유보조치를 연장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방북하여 열린 조일(북일)정상회담에서 채택한 평양선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은 이 선언의 정신에 따라 미싸일발사의 보류를 2003년 이후 더 연장할 의향을 표명하였다”고 천명하였다.

그러나 두말할 나위 없이, 발사유보(moratorium)는 ‘미사일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아니다. ‘미사일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길은 미사일협정을 체결하는 것이다.

‘최소한의 입장수준’과 미사일협정

1999년 6월 북측이 백두산 2호 발사준비를 완료해놓고 클린턴 정부를 강하게 압박하자, 미사일회담이나 4자회담이 사라지고 그 대신 북측과 미국의 고위급회담이 새로 시작되었다. 백두산 2호 발사준비라는 대미압박이 클린턴 정부를 고위급회담으로 끌어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9년 9월 24일 북측 외무성은 대변인 담화에서 “당면하여 우리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조미 사이의 현안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고위급회담을 진행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고, 1999년 11월 15일 베를린에서 열린 조미(북미) 양자회담에서는 워싱턴에서 고위급회담을 열기로 합의하였다.

그 합의에 따라 2000년 10월 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인 조명록 차수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서를 들고 역사상 처음으로 워싱턴을 방문하여 10월 12일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고, 같은 날 조미(북미)공동코뮈니케가 발표되었고, 10월 23일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K. Albright) 국무장관이 미국 국무장관으로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였고,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방문이 준비되었다. 북측의 백두산 2호 발사준비가 이끌어낸 고위급회담은 결국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클린턴 대통령이 만나는 정상회담을 위한 일종의 준비회담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북측이 은하 2호 발사준비를 외부세계에 알린 까닭은, 2000년 11월 1일에 마지막으로 열린 뒤 지금까지 중단된 미사일회담을 재개하자고 오바마 정부에게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다. 위성발사체임을 미리 공개한 북측이 오바마 정부에게 미사일회담을 재개하자고 요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으며, 그렇다고 위성발사체회담을 시작하자고 요구할 것도 아니다. 북측의 당면요구는 1999년에 열린 미사일회담을 재개하자는 것이 아니라 2000년에 열린 고위급회담을 재개하자는 것이다.

오바마 정부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미국에서 정권교체가 있었던 2001년 10월 23일 북측 외무성이 발표한 대변인 담화의 마지막 문장일 것이다. 그 문장은 이렇게 되어 있다. “신의있는 조미대화의 재개는 부쉬 행정부가 최소한 클린턴 행정부의 마지막 시기에 취했던 입장수준에 도달해야 논의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클린턴 정부가 임기말에 취했던 ‘최소한의 입장수준’을 당시 새로 출범한 부쉬 정부에게 북측이 요구한 것처럼, 오늘 북측은 새로 출범한 오바마 정부에게도 ‘최소한의 입장수준’을 요구하고 있을 것이다.

‘최소한의 입장수준’이란 무엇일까? ‘최소한의 입장수준’에 대해서는 클린턴 정부 임기말에 대북정책 실무집행에서 핵심역할을 맡았던 두 전직관리에게서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대북정책조정관이었던 웬디 셔먼(Wendy Sherman)과 국무부 정책기획담당 차관보였던 몰튼 핼퍼린(Morton H. Halperin)이 그들이다. 웬디 셔먼 조정관은 2001년 4월 3일 일본 〈교도통신(共同通信)〉과 회견하면서 “모든 종류의 미사일 개발, 배치, 시험을 중단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진지한 협상을 벌였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당일에 끝났더라면 북측과 합의에 도달하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몰튼 핼퍼린 차관보는 같은 날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RFA)과 회견하면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놓고 말이 많았지만 내가 볼 때는 가야했다고 보며 그러했을 경우 어떤 식으로든 미사일협정이 나왔을 것이다. 북측은 장거리미사일 발사유보선언을 항구적인 미사일협정으로 전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클린턴 대통령 자신도 2001년 1월 12일 〈로이터통신(Reuters)〉과 가진 회견에서 “북측과의 미사일협상은 부쉬 행정부가 들어선지 몇 달 안에 타결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한다”고 말하였다.

워싱턴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방문문제가 한창 논의되고 있었던 2000년 11월 3일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마지막 미사일회담에서 클린턴 정부는 북측에게 일괄타결안을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북측은 장거리미사일의 연구, 개발, 시험발사를 포기하고, 중거리미사일 및 단거리미사일 수출을 중단하며, 실전배치된 중거리미사일을 철수한다.

둘째, 그에 상응하여 미국은 북측의 인공위성을 대리발사해주고, 북측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하고, 북측에 식량을 제공하고 금융지원을 한다.

그러나 북측은 클린턴 정부가 제시한 일괄타결안을 거부하였다. 북측은 중거리미사일 및 단거리미사일 수출을 중단하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미국이 해마다 10억 달러씩 3년 동안 총 30억 달러를 현금으로 보상해주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실전배치한 중거리미사일을 철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처럼 미사일회담이 결렬되고 말았으니,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클린턴 대통령이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그 자리에서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방문이 추진되었다.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목적은, 몰튼 핼퍼린 차관보가 나중에 밝혔듯이, 항구적인 미사일협정을 체결하기 위함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클린턴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요구한 것이 항구적인 미사일협정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방문은 워싱턴의 완고한 반대파가 저지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항구적인 미사일협정을 체결하는 의제까지 폐기된 것은 아니다. 다만 항구적인 미사일협정에서 미국이 취해야할 상응행동의 내용이, 그 동안 정세변화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 것뿐이다.

첫째, 미국이 북측의 인공위성을 다른 나라에서 대리발사해주는 방안은 독자적 우주개발을 추진하는 북측의 반대로 합의될 수 없을 것이다. 위성발사는 미사일협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7월 19일 평양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V. Putin) 러시아 대통령에게, 그리고 2000년 10월 23일 평양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에게 인공위성 대리발사 가능성을 언급하였다는 보도는 오보이다.

둘째, 북측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하는 조치는 이미 부쉬 정부가 취하였으므로 거론할 필요가 없다.

셋째, 북측은 지금 식량난을 겪고 있지 않으므로, 식량제공은 북측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식량이나 받겠다고 수 십 억 달러를 들여 위성발사체를 개발한 나라는 이 세상에 없다. 북측에 대한 금융지원은 다국적 자본의 대북진출을 허용하는 시장개방을 뜻하므로 북측이 거부할 것이다.

이제 오바마 정부는 클린턴 정부가 추진했던 항구적인 미사일협정을 맺기 위해서 미국이 취해야 할 새로운 상응행동을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은하 2호 발사준비를 둘러싸고 한반도 주변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긴장국면을 뚫고나갈 정치적 돌파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오바마 대통령이 평양에서 만나는 정상회담에서 의외로 쉽게 마련될 것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대국의 체면’이나 차리려고 공연히 시간만 보내면서 전전긍긍할 것이 아니라, 클린턴 대통령 임기말의 경험을 계승하여 북측과 정상회담을 개최하겠다는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 은하 2호가 지구궤도를 향해 날아오른 뒤에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오바마 대통령이 항구적인 미사일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해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2009년 3월 2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