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측의 자력갱생, 중국의 개방개혁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정치적 안정과 ‘특유한 통치술’

2008년 1월 3일 미국의 국제전략연구소(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와 미국평화연구소(U.S. Institute for Peace)가 합동보고서(joint report)를 펴냈다. 제목은 “제멋대로 구는 이웃을 주시하여: 북측의 경제개혁과 안정에 대한 중국의 견해(Keeping an Eye on an Unruly Neighbor: Chinese Veiws on Economic Reform and Stability in North Korea)”이다. 이 보고서는 두 연구소의 합동방문단이 2007년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베이징(北京), 창춘(長春), 옌지(延吉)를 돌면서 중국의 ‘북조선 전문가’들과 토론한 내용에 기초하여 작성된 것이다.

그들이 만난 ‘북조선 전문가’들은 중국의 연구자들과 지방관리들이다. 중국의 연구자들과 지방관리들이 북측의 내부사정에 관해서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연구자들과 지방관리들이 다른 나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다른 나라의 내부사정에 대해서는 국가정보기관이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합동보고서는 정보분석의 부정확성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합동보고서의 한계는 정보분석의 부정확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합동보고서의 제목에 고스란히 담겨있듯이, 보고서 작성자들이 북측의 ‘경제개혁’과 ‘정치적 안정’에 대한 중국 전문가들의 견해를 알아보려 한 것은, 합동보고서가 작성자들의 이념적 선택기준에 들어맞는 일방적인 견해들만 반영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들의 이념적 선택기준은, 두말할 나위 없이, 북측의 사회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개혁개방을 요구하는 자본주의적 선택기준이다. 예컨대, 중국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만약 북측의 ‘경제개혁’과 ‘정치적 안정’에 관련해서 상반된 견해가 나오는 경우, 보고서 작성자들은 자기들의 이념적 선택기준에 맞는 견해만을 취하여 합동보고서에 반영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합동보고서에는 북측에게 개혁개방이 불가피한 것처럼 논하는, 이념적으로 선택된 견해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북측의 정치적 안정(political stability)에 관한 미국인들의 질문을 받았을 때 중국의 ‘북조선 전문가’들이 과연 어떠한 견해를 표명하였을까 하는 것이다. 북측에서 식량난이 악화되어 ‘급변사태’가 일어날 것처럼 ‘예언’하는 헛소문이 퍼져있는 남측에서 북측의 정치적 안정을 논하는 것이, 그런 헛소문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좀 이상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합동보고서는 중국의 ‘북조선 전문가’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유한 통치술(unique governing skills)’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북측이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음을 인정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중국의 ‘북조선 전문가’들이 ‘특유한 통치술’이라고 부른 것을 북측에서는 ‘주체의 영도예술’이라고 부른다.

‘성공적인 사상교육’

중국의 ‘북조선 전문가’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유한 통치술’을 언급할 때 지적한 요인은 세 가지이다. 합동보고서에 따르면, 첫째 요인은 ‘엄격한 내부통제체제(tight domestic control system)’이고, 둘째 요인은 ‘성공적인 사상교육(successful ideological education)’이며, 셋째 요인은 ‘외부세계에 관한 정보를 왜곡하여 인민을 기만하는 효과적인 수단(effective means of fooling the people)’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합동보고서는 이 세 가지 요인들이 북측의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는 ‘특유한 통치술’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위의 세 가지 요인들 가운데서 주목하는 것은 ‘성공적인 사상교육’이다. 북측에서는 사상교육이라고 하지 않고 사상사업(ideological work)이라고 한다. 중국의 ‘북조선 전문가’들에 따르면, 북측은 사상사업에서 성공하였다는 것이며, 성공적인 사상사업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유한 ‘영도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옳게 이해하였다.

세계정치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만큼 사상사업을 중시한 정치지도자는 찾아볼 수 없다. 그가 설파한 정치이론의 핵심은 사상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우리는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에서 사람들의 사상이 기본이며 사람들의 사상에 의하여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사상론을 주장합니다”라고 말한 적도 있고, “사상을 기본으로 틀어쥐고 사상사업을 모든 사업에 앞세워나가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이것은 그가 사회주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을 사상사업에서 찾아내었음을 말해준다.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흔히 정신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상이 발동되었을 때 생겨나는 힘이다. 자본주의 정치학에서 정치(politics)라는 개념은 인민에게 권력을 사용하는 통치(governance)라는 개념과 내용적으로 같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말하는 정치는 인민들 속에서 사상의 힘을 발동시키는 사상사업과 내용적으로 같다. 그래서 북측에서는 정치와 사상을 따로 떼어놓지 않고 ‘정치사상사업’이라고도 부른다. 사상사업은 인민들 속에서 전개하는 것이므로, 사상사업을 전개하는 당은 대중노선을 지향하게 된다.

인민에게 권력을 사용하는 통치가 타율성과 강제력에 의존하는 행정관리사업이라면, 인민들 속에서 사상의 힘을 발동시키는 정치는 자발성과 협동력에 의거하는 정치사상사업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중국의 ‘북조선 전문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북측이 ‘성공적인 사상교육’에 의해서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그들이 또 다른 요인들로 지적한 ‘엄격한 내부통제체제’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지며, 더욱이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를 왜곡하여 인민을 기만하는 효과적인 수단’을 사용한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이다.

인민에 대한 통제나 강제에 의존하는 정치가 아니라, 인민들 속에서 사상사업을 벌여 그들의 정신력을 발동시켜 자발성과 협동력에 의거하는 정치에서 ‘엄격한 내부통제체제’는 불필요한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타이르고 깨우쳐주는 설복과 교양의 방법에 의해서만 사람들을 혁명사상으로 무장시키고 그들의 혁명적 열의와 무궁무진한 창조적 힘을 남김없이 발양시킬 수 있으며 당과 대중과의 련계도 더욱 튼튼히 다져나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물론 북측에는 법적 통제도 있다. 다른 나라들처럼 북측에도 사법행정이 있고 교화소(교도소)가 있다. 그러나 사상사업이라는 말조차 모르고 통제를 곧 형벌로 여기는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북측에서 통제보다 우위에 존재하고, 선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상사업이다. 북측의 행형제도에 관한 통계자료를 구할 수는 없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일시적인 물욕이나 과실로 법을 어긴 자들은 사회적 교양을 통하여 개조하여야 합니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북측의 행형제도가 교양을 통한 개조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비방자들은 북측에 있는 교화소의 ‘인권유린실태’를 ‘폭로’하거나, 한술 더 떠서 ‘정치범수용소’가 12곳이나 있다고 하면서 ‘수용소의 참혹한 실상’을 ‘폭로’하는데, 그것은 허무맹랑한 악선전이다. 글의 길이가 제한되었으므로, 이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논한다.

정치의 중심에 사상사업을 두지 못한 까닭에 인민의 자발성과 협동력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순전히 내부통제에만 의존하는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발전시키려고 하였던 소비에트형 사회주의는 이미 오래 전에 무너졌다.

북측에 대해서 잘 안다고 자처하는 전문가들조차 북측의 사회주의와 소비에트형 사회주의가 어떻게 다른지 구분하지 못하지만, 양자는 사회주의라는 큰 범주에서만 서로 통하였던 것 뿐이고 그 내용을 살펴보면 한국의 자본주의와 미국의 자본주의가 서로 다른 것보다 더 달랐다. 북측의 사회주의 건설노선은 이미 1950년대부터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건설노선과 갈라서기 시작하였고, 소비에트형 사회주의가 무너졌던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북측의 사회주의는 사상사업을 앞세운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노선으로 나아감으로써 소비에트형 사회주의와 갈라섰던 것이다. 그런데도 합동보고서는 북측의 사회주의와 소비에트형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차이를 간과하는 오류에 빠졌다.

또한 ‘성공적인 사상교육’에 의존하는 북측의 정치에 대해서 합동보고서가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를 왜곡하여 인민을 기만한다”고 깎아내린 것은 비방으로 들린다. 비방자들이 말하는 ‘외부세계’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사회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북측에서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를 왜곡한다는 말은 북측 인민들이 외부세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북측의 내부사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처럼, 사회주의사회에 살고 있는 북측 인민들이 자본주의사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를테면, 북측 인민들이 뉴욕 금융시장의 시황이나 할리웃 영화배우 톰 쿠르즈의 최근 서울방문이나 이탈리아 명품 죠르지오 아르마니 따위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것은 물론이며, 북측 언론이 그런 ‘외부세계’의 동향을 보도할 리도 만무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북측 인민들이 외부세계에 무지하다고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세계를 판단기준으로 삼은 일방적인 주장이다. 남측 국민들이 미국식 가치관과 미국식 정세관으로 외부세계를 바라본다면, 북측 인민들은 자기들 방식대로 외부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외부세계에 무지한 것이 아니다.

중국의 사상해방과 개혁개방

2008년 12월 18일 오전 10시 베이징에 있는 인민대회당에서 개혁개방 30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기념식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중국의 개혁개방이 1911년의 신해혁명, 1949년의 사회주의혁명에 이어 “중화민족부흥의 미래를 맞을 수 있게 한” 세 번째 혁명이라고 말했다.

후진타오 주석이 중국의 ‘세 번째 혁명’이라고 말한 개혁개방은, 1978년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진행된 중국공산당 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에서 시작된 것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을 중심으로 한 중국 수뇌부는 그 회의에서 계급투쟁이 기본적으로 종결되었다고 선언하고, “사상해방, 실사구시, 일치단결로 미래를 바라보자”는 구호를 제시하였다. 사상해방이란 사회주의사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하고, 실사구시란 실용주의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사상전향’과 더불어 공업, 농업, 국방, 기술분야에서 현대화를 추구하는 ‘4개 현대화 노선’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8년이 지난 때부터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노선에 치명타를 가하는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86년 12월에 안후이성(安徽省), 상하이(上海), 베이징에서 대학생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한 것이다. 1989년 4월에는 베이징 텐안먼(天安門) 광장에 집결한 군중들이 반대시위를 벌였고, 5월 17일에는 참가인원이 1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 사태를 ‘반혁명적 폭란’으로 규정한 중국 수뇌부는 6월 4일에 계엄군을 출동시켜 유혈진압하였고, 10월 31일에는 집회시위법을 공포하였다.

무리한 개혁개방이 결국 ‘반혁명적 폭란’을 불러온 것이 아니냐 하는 개혁개방노선에 대한 불신과 의구심이 커져가고 있을 때, 덩샤오핑은 1992년 1월 18일부터 2월 21일까지 중국 남부지방의 우한(武漢), 선전(深圳), 주하이(珠海), 상하이를 순방하였다. 그는 순방길에서 ‘반혁명적 폭란’으로 제동이 걸린 “당의 개혁개방노선을 100년 동안 흔들림 없이 견지하라”고 역설하였고, 한 발 더 나아가서 선부론(先富論)을 제창하였다. 여든 여덟 살의 노구를 이끌고 선전경제특구에 있는 세계무역중심 고층전망대에 올라 “동방에 바람 부니 봄기운 눈에 가득하여라(東方風來滿眼春)”고 중얼거렸다는 이른바 ‘남순강화(南巡講話)’는 그 때 생겨난 정치신화이다. 덩샤오핑의 선부론이란 중국의 모든 지역, 모든 인민이 한꺼번에 부유해질 수 없으니 능력 있는 지역이나 인민들부터 먼저 부유해진 뒤에 공동부유를 실현한다는 이론이다. 이듬해인 1993년 3월 15일에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8기 1차 회의에서 개정된 헌법 전문에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개념이 자리를 잡았다.

사상해방에서 출발하여 개혁개방으로 전개되고 마침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정착시킨 1978년 이후 30년 역사에 대해서 서방세계의 언론과 전문가들은 비약적인 경제발전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중국의 경제현실이 그러한 평가를 객관적으로 입증해주고 있다. 통계자료를 보면, 지난 30년 동안 중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9.8%에 이르렀고, 1인당 국민총생산(GDP)은 1978년에 379 위안이었는데, 2006년에는 2천 달러로 약 40배나 늘어났다. 대외무역액은 1978년에 206억4천만 달러였는데, 2007년에는 2조1천738억 달러로 약 105배나 늘어나 세계 3위의 무역대국으로 올라섰다.

주목하는 것은, 그러한 통계수치가 아니라 비약적인 경제발전이 중국 사회에서 사회계급의 분화라는,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2002년 1월 중국사회과학원이 작성한 ‘당대 중국 사회계층 연구보고’에 따르면, 오늘 중국의 사회계급관계는 상층 4.7%, 중간층 30.1%, 하층 65.2%로 분화되었다고 한다. 중국 총인구의 4.7%에 이르는 상층은 당정고위간부(2.1%), 기업경영인(1.6%), 민영기업가(1.0%)로 구성되었다. 또한 중국 총인구의 30.1%에 이르는 중간층은 상업 및 서비스업 종사자(11.2%), 정부 및 기업 관리자(7.2%), 개인사업자(7.1%), 전문직, 기술자(4.6%)로 구성되었다. 또한 중국 총인구의 65.2%에 이르는 하층은 농민(42.9%), 노동자(17.5%), 무직, 실업, 반실업자(4.8%)로 구성되었다. 중국에서 일어난 사회계급의 분화는, 오늘의 중국 사회가 자본주의사회의 계급구성과 일치하였음을 말해준다.

통계자료가 말하지 않는 현실

2007년 2월 19일은 덩샤오핑 타계 1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 날 중국 인민들 가운데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으며, 중국 수뇌부마저도 그를 추모하지 않았다. 베이징 주재 특파원이 쓴 〈한겨레〉 2007년 2월 21일자 기사는, “그의 고향인 쓰촨성 광안에서 조촐한 기념행사와 학술토론회가 열렸을 뿐”이며 “오히려 요즘 중국에선 그의 ‘위험한 유산’에 대한 비판이 고개를 들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개혁개방이 중국 인민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였다면, 개혁개방을 설계하고 추진했던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을 중국 인민들이 기억해야 마땅한데,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을까? 그 까닭은 공평분배의 원칙을 저버리고 균등발전의 목표를 내던진 개혁개방이 중국 인민에게 약육강식의 생활방식과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시장경제를 받아들여 사회주의 경제발전에 이용하려고 애썼으나, 시장경제에서는 부익부의 속도보다 빈익빈의 속도가 훨씬 더 빠르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고, 부익부 빈익빈이 사회주의의 명줄을 조이는 ‘독소’라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하였다. 시장경제가 뿜어내는 부익부 빈익빈의 ‘치명적 독소’는 중국의 사회주의시장경제를 빈사상태에 빠뜨릴 기세로 퍼져나갔다. 중국의 빈부격차는 미국의 빈부격차보다 더 심하다. 1978년에 소득격차는 2.17 대 1이었는데 2007년에는 6 대 1로 벌어졌다. 개혁개방이 부익부 빈익빈으로 귀결되고, 시장경제가 빈부격차를 극대화한 현실, 바로 이것이 중국의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입증한 통계자료가 말하지 않는 현실이다.

중국에서 비약적인 경제발전으로 엄청난 부를 거머쥔 사람들은 ‘신귀주(新貴簇)’라고 부르는 극소수의 부유층이다. 중국 인구의 13만 분의 1에 해당하는 대부호 5만 명이 그들이다. 2008년에 실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중국의 부유층은 한 해에 평균 200만위안(4억원)을 사치품 구입, 자녀특수교육, 여행, 오락 등에 쓴다고 한다.

영국의 경제전문지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 편집인 출신인 알렉샌드라 하니(Alexandra Harney)가 2008년에 펴낸 책 ‘중국의 가격: 중국이 지닌 경쟁적 이점의 실제가격(The China Cost: The True Cost of Chinese Competitive Advantage)’에 따르면, 2002년 중국 노동계급의 시간당 평균임금은 0.57 달러로, 선진국 노동계급이 받는 시간당 평균임금의 3%에 지나지 않는다. 전세계 탄광에서 직업병과 안전사고로 목숨을 잃는 산재희생자의 80%는 중국의 탄광노동자들이다. 농촌인구의 79.1%에 이르는 9억 명과 도시인구의 44.8%에 이르는 4억 명은 아무런 의료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인 기업경영전문지 〈포천〉(Fortune)이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경영하는 외자기업수는 4천100개인데, 그 외자기업들은 온갖 편법과 탈법을 동원한 ‘횡포의 주범’으로 되었고, 노동자들의 피땀을 쥐어짜는 ‘착취의 대명사’로 되었다. 직업병과 안전사고를 막아주는 보호조치를 받기는커녕 혹사현장에 내몰린 중국 노동자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중국 노동자들의 생존권투쟁은 1992년에 8만2천 건이었는데, 2004년에는 26만 건으로 급증하였다. 2008년 현재 대학졸업자 실업률은 15%를 넘어섰다. 소수의 ‘모범농촌’을 제외한 농촌에서는 최저생활조차 유지하기 힘들게 되었다. 2007년 현재 농촌인구 1인당 소득은 591 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추진해온 30년은 전사회적으로 부정부패와 흉악범죄가 만연되어온 30년이었다. 2008년 한 해 동안 뇌물수수와 공금횡령 같은 부정부패로 처벌을 받은 현(縣)지사급 이상의 고위관리가 4천960명이나 되고, 14만4천 건의 부정부패사건에 연루된 하급관리 14만6천명이 처벌을 받았다. 2007년 한 해 동안 매매춘, 마약제조 및 밀매, 납치, 유괴, 인신매매, 도박 같은 337건의 대형 조직범죄가 적발되었는데, 이것은 전년에 비해 161%나 늘어난 것이다. 중국에서는 어린이가 하루 평균 200명씩 유괴되는데, 여아는 1천200달러에 남아는 5천달러에 팔린다고 한다. 범죄조직들이 부패한 정부관리와 결탁되었다는 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중국 언론에서 ‘군체성사건(群體性事件)’이라고 불리는 군중폭동과 대중시위는 2003년 5만8천 건, 2004년 7만4천 건, 2005년 8만7천 건으로 증가추세를 보였다. 지금까지 259개 지구급(地區級) 시(市)의 99% 이상, 그리고 현(縣)의 53%가 크고 적은 군체성사건을 겪었다. 더 우려되는 것은, 최근 신자유주의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중국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고, 중소기업의 연쇄도산과 대량실업사태는 인민경제에 ‘치명상’을 입혔다는 점이다. 성난 민심이 폭발하는 군체성사건이 올해에 급격히 확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이 베이징 정가에 감돌고 있다.

북측의 3대 혁명과 자력갱생

1966년 8월 8일 중국공산당 제8회 1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사회주의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오염을 막기 위한 계급투쟁”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로부터 10년 뒤에 중국공산당이 스스로 극좌적 편향과 오류라고 인정하였던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인 1970년에 북측에서는 3대 혁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 11월 2일부터 13일까지 열린 조선로동당 제5차 대회에서 3대 혁명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북측의 3대 혁명과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두 나라가 얼마나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는지를 뚜렷이 보여준다. 중국에서 홍위병 복장을 한 대학생들과 청년들이 ‘문화대혁명’으로 자본주의의 침습을 저지한다고 하면서 강제와 처벌을 앞세우고 있을 때, 북측에서는 대학졸업반 학생들, 초급당학교 학생들, 청년당원들이 각급 행정기관, 문화기관, 교육기관에 들어가고,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을 비롯한 전국의 생산현장에 들어가서 3대 혁명을 밀고 나갔다.

널리 알려진 대로, 3대 혁명이란 사상혁명, 기술혁명, 문화혁명을 뜻한다. 북측의 이론에 따르면, 사상혁명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를, 기술혁명은 “인민경제의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를, 문화혁명은 “전인민의 인테리화”를 각각 전략목표로 삼는다고 한다.

3대 혁명은 구호에 그친 것이 아니라, 3대 혁명 소조운동과 3대 혁명 붉은기 쟁취운동을 통하여 실현되었는데, 그 양대 운동을 제기하고 지도한 사람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그가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서 인민경제분야에서 사업하기 시작한 1972년부터 3대 혁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73년 2월 12일에 열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확대회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기한 3대 혁명 소조운동을 전사회적 범위의 대중운동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1992년 2월 14일 〈조선중앙방송〉 보도에 따르면, 3대 혁명 소조운동이 시작된 이후 19년 동안 그 운동에 의해서 20만5천여 건의 기술혁신안이 생산현장이 도입되었고, 1천100여 개의 중소형발전소, 1천여 개의 다리가 건설되었다고 한다.

경제실적보다 더 값진 것은 인재양성이다. 1983년 9월에 열린 3대 혁명 소조원 대회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당시 소조원이 4만6천 명, 소조원 출신자가 1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북측에서 1980년대 이후 사회주의건설을 앞장에서 밀고 나간 추동력은 그들에게서 나왔다. 이를테면, 1982년 3월 1일에 실시된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선거에서 전체 대의원 615명 가운데 20%에 이르는 182명이 3대 혁명 소조원 출신이었다.

‘문화대혁명’을 외치던 수 십만 명의 홍위병들은 불과 10년 만에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고, 그 뒤로 텐안먼 광장에 출몰한 수 십만명의 중국 청년들은 멋모르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외치다가 계엄군의 유혈진압을 당했지만, 북측에서 3대 혁명 소조운동이 배출한 수 십만 명의 각계각층 인재들은 오늘도 사회주의 건설을 이끄는 중심세력으로 일하고 있다.

1975년 11월 19일부터 21일까지 열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11차 전원회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3대 혁명 소조운동과 더불어 지도한 3대 혁명 붉은기 쟁취운동을 전사회적 범위의 대중운동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사상도 기술도 문화도 주체의 요구대로!”라는 구호를 제시하고, 3대 혁명 붉은기 쟁취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3대 혁명 붉은기 쟁취운동의 불길 속에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일본새가 달라지고 대중의 혁명적 열의가 높아지게 되었으며 혁명과 건설이 더욱 힘있게 추진되었습니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북측의 역사적 경험과 중국의 역사적 경험은 완전히 다르다. ‘문화대혁명’의 좌경적 오류에서 벗어나면서 개혁개방으로 급선회하였던 중국은 자력갱생노선을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받아들였지만, 북측은 자력갱생노선을 계속 견지하면서 3대 혁명을 추진하였다. 북측이 개혁개방을 거부하면서 중국식 사회주의시장경제를 모방하지 않은 까닭은, 3대 혁명의 미래와 자력갱생의 위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개혁개방이 심화될수록 사회적 양극화가 악몽처럼 다가오는 중국에서는 성난 민심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급변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조화사회 건설’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긴장완화에 힘쓰고 있다. 그와 다르게, 지금껏 한결같이, 그처럼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변함없이 자력갱생노선을 견지해온 북측은 3대 혁명을 추진한지 30년 만에 ‘강성대국 건설’이라는 목표를 내걸었고, 그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 지난 10년 동안 힘써왔다. 이제 세계의 관심은 북측의 자력갱생 노력과 중국의 개혁개방 심화가 각각 자국의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지에 쏠리고 있다. (2009년 1월 19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