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의 급변사태, 진보정치의 대응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이중위기

2009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를 축하하는 인사를 주고받았건만, 이 사회에는 어두운 그늘이 가득하다. 굳이 왜 그러하냐고 묻지 않아도, 그 까닭은 누구에게나 자명하다. 급변사태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 가득한 어두운 그늘의 실체는 다가오는 급변사태에 대한 불안과 공포이다. 2009년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 같은 급변사태의 해이다.

불안과 공포를 동반하는 위기감은 두뇌에서 일어나는 심리현상이지만, 위기 그 자체는 심리현상이 아니라 객관적 현실인데, 경제위기와 정치위기가 한꺼번에 일어났다는 것이 급변사태를 몰고오는 위기의 실상이다. 오늘의 위기를 단지 경제위기로 보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단견이다. 이 땅에 엄습한 이중위기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오늘의 경제위기란, 세계금융시장의 과잉신용위기에서 시작되어 생산, 소비, 투자, 재정, 무역을 포함하는 자본주의 세계시장 전반으로 급격히 파급된 파국적 위기를 뜻한다. 10년 전에 있었던 경제위기는 아시아에서 발생된 지역경제위기이면서 외환시장을 위협한 외환고갈위기이었므로, 긴급히 구제금융을 빌려오고 기업구조조정을 강행하고 경제파탄의 고통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떠넘기면서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지만, 오늘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오늘의 경제위기는 지역경제위기가 아니라 세계경제위기이며, 외환고갈위기가 아니라 시장경제의 전반적 붕괴위기이며, 따라서 경제파탄의 고통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떠넘기는 식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근본적 위기라는 데 치명적 위험이 있다.

세계경제위기 또는 시장경제의 전반적 붕괴위기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미국이 기축통화로 정해놓은 자국의 달러화를 세계시장에 과잉공급함으로써 생겨난 구조적인 위기이다. 미국이 달러화를 세계시장에 공급하는 경로는, 1980년대부터 눈에 띄게 드러난 것처럼, 미국의 무역적자와 재정적자가 끊임없이 늘어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미국의 무역적자 및 재정적자의 증가는, 미국이 기축통화를 찍어내어 세계시장에 대주는 달러공급의 증가와 일치한다.

미국의 무역적자가 늘어난다는 말은, 세계 각국이 앞다투어 미국 시장에 상품을 수출하는 대미수출의존형 경제체제가 만연된다는 뜻이다. 특히 중국의 대미수출 증가세는 폭발적이다.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2001년 이후 중국의 대미수출 증가세는 극대화되었다.

다른 한편, 미국의 재정적자가 늘어난다는 말은, 세계 각국이 대미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가지고 다시 미국의 국채나 정부보증채권을 사들이는 금융투자가 세계적으로 만연된다는 뜻이다. 기축통화가 상품화되고, 달러화가 투자수단으로 되면서부터 세계금융시장은 과잉신용의 함정에 빠져들어 갔다.

세계에서 가장 큰 생산자이며 가장 큰 증권구매자인 중국,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큰 소비자이며 가장 큰 증권판매자인 미국은, 자본과 상품이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오가는 시장만능주의 또는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우상을 숭배해왔다.

신자유주의 우상숭배가 세계금융시장을 과잉신용의 함정에 빠뜨린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세계금융시장에서 과잉신용은 자본주의시장경제의 생산, 소비, 투자, 재정, 무역에서 구조적 모순을 극대화하였다. 구조적 모순이 겹쌓여 극대화됨으로써 언젠가는 반드시 터지게 되어 있는 매우 위험천만한 과잉상태를 ‘초대형 거품’이라는 말로 묘사한다. 구조적 모순의 누적,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세계시장이 발전해온 실상이며, 급변사태를 예고하는 구조적 모순의 극대화,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고도성장의 비밀이다.

구조적 모순이 겹쌓이는 가운데 매우 위태롭게 유지되어온 자본주의 세계시장은 금융시장의 ‘초대형 거품’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때로부터 약 20년만에 그 거품이 갑자기 꺼져버리는 치명상을 입었다. 거품꺼짐 현상은 국제투기자본이 각국 증시와 부동산시장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급변사태는 신자유주의 우상숭배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2008년 말 현재, 각국 증시는 폭락으로 급변사태에 빠져들었다. 1931년 대공황(Great Depression) 시기에 미국 증시는 47.1%가 폭락하면서 무너졌는데, 오늘 세계 각국의 증시도 그 수준에 이르렀다. 세계 각국의 2008년도 증시폭락을 백분율로 표시하면, 러시아 71.9%, 중국 65.7%, 인도 52.1%, 이탈리아 50.3%, 아르헨티나 50.0%, 싱가포르 48.9%, 홍콩 48.8%, 대만 46.1%, 일본 42.1%, 브라질 41.2%, 한국 40.7%, 독일 40.0%, 미국 36.0%, 영국 33.1% 등이다. 해마다 8% 이상의 고도성장을 지속해온 베트남 증시는, 2008년 6월말 현재, 2007년 최고점에 비해 57%나 폭락하였다. 각국의 부동산시장에서 일어난 폭락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급변사태는, 구제금융투입이나 기업구조조정 같은 이전의 시장개입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국가기구(정부)가 금리, 조세, 공공부문을 통하여 시장경제의 위기를 관리하는, 1960년대 이후 미국의 경제정책에 반영되어온 케인즈주의(Keynesianism)는 마비되었다. 신자유주의의 파산과 케인즈주의의 마비, 이것이 현 시기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겪고 있는 급변사태의 본질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세계시장이 최악의 경제위기에 빠져든 조건에서 한국 경제의 전면적 파탄은 불가피하다. 이명박 정권은 한국 경제의 급변사태가 임박하였다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면 사회 전체가 충격과 공포에 빠져들 것을 우려해서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려고 하지만, 2009년은 사상 최악의 경제파탄이 일어나는 시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땅의 경제위기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이 땅에 엄습한 정치위기이다. 경제가 파산상태에 빠져드는 데도 정치가 안정상태를 유지하는 경우는 없으며, 경제위기에는 언제나 정치위기가 뒤따르는 법이다. 더욱이 정치위기는 경제위기를 넘어서려는 노력에 장애를 일으킴으로써 급변사태를 일으키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오늘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파산위기에 뒤따르는 세계 각국의 정치위기는 각이한 양상을 보인다. 정치위기의 양상이 나라별로 서로 다른 까닭은, 각국의 정치세력관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미국 정치에서 보듯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에 성공함으로써 정치위기 발생시기를 뒤로 늦춘 경우가 있고, 반면에 태국 정치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에 실패함으로써 극도의 정치적 혼란에 빠진 경우가 있다.

이 땅에서 일어난 정치위기는, 선거를 통하여 정권을 교체하기는 하였으나 민주주의적 정치발전에 역행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교체하는 바람에 극도의 혼란에 빠진 경우에 든다. 이명박 정권의 등장이야말로 날로 악화되어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린 혼란과 파탄을 불러온 정치위기의 원인이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대중의 불만과 반감은 그 정권의 출범과 함께 분출하기 시작하였다. 2008년 여름에 촛불을 들고 일어난 대중저항운동과 민생경제의 파탄, 그리고 2008년 연말에 시작되어 현재도 진행 중인 국회의 여야투쟁과 의회정치의 파탄은 서로 다른 권역에서 전개되는 것이지만,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불만과 반감이 폭발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이중위기가 한 차례 지나가는 위기가 아닌 것처럼, 이명박 정권에 대한 대중의 불만과 반감의 분출도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 정권에 대한 불만과 반감의 분출은, 올해 들어 더욱 격화되어 폭발할 것으로 보인다. 민생경제의 파탄이 현 정권에 대한 대중의 불만과 반감을 더욱 격화시키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경제위기의 심각성을 직감한 보수언론은 입을 모아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고 뒤늦게 목청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보수언론은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경제의 체질을 바꾼다는 말은, 경제위기 속에서 파탄을 재촉하는 경제노선을 새로운 경제노선으로 바꾼다는 뜻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대기업 중심의 수출의존형 경제를 중소기업 중심의 내수의존형 경제로 바꾸어 자립경제노선을 지향하고, 동시에 대기업을 국유화하고 중소기업을 민생기업으로 바꾸어 민주주의 경제노선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에게 그러한 경제노선의 대전환을 기대할 수 있을까? 명백하게도, 그 물음은 부정적인 답변밖에 얻지 못한다. 경제위기 속에서 파탄을 재촉하는 경제노선에 집착하다가 결국 파국에 빠지게 된다면, 해결책은 명료해진다. 대중이 공감하는 것처럼, 정권교체만이 위기극복의 출로인 것이다.

올해 대중저항운동이 다시 일어난다면

백낙청 교수는 2008년 12월 30일 <창비주간논평>에 발표한 자신의 글에서 “내년 봄에 대규모 군중시위가 벌어지는 일은 그 누구도 막기는 어려울 듯하며, 정권이 하기에 따라 겨울이 채 가기도 전에 그런 사태가 도래할 수도 있다”고 썼다. 진보적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온건파’로 알려진 그가 대규모 군중시위가 임박하였음을 경고한 것은, 사태가 그만큼 급박하다는 뜻이다.

백낙청 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촛불소녀’로 상징되는 발랄함과 유쾌함이 한층 절박해진 군중과의 결합을 통해 또 한번 새로운 시위문화를 창출”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이번에는 대중의 토론과 합의를 이어받아 언론과 여러 전문집단, 권익집단을 포함한 시민사회가 정당들과 함께 건설적으로 국정에 기여하는 - 단순한 시위참여가 아니라 국가 거버넌스에 참여하는 - 길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그의 글에서 엿보이는 몇 가지 불분명한 논리를 좀더 명료하게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위문화론’의 불분명한 논리이다. 2008년 여름, 촛불을 든 군중이 일으킨 대중저항운동을 물대포를 쏘아대고 방패를 휘두르는 진압경찰의 폭력에 맞서 싸운 대중투쟁으로 평가하지 않고 ‘촛불소녀들이 발랄하고 유쾌한 시위문화를 창출한 사건’ 정도로 인식한 것은, 시위군중이 1천600여 명이나 강제연행된 대중저항운동을 잘못 인식한 것이다.

2008년 여름에 있었던 대중저항운동은 처음에 ‘촛불소녀’들이 등장한 촛불문화제로 시작되었다가 나중에는 정권퇴진을 요구한 대중투쟁으로 전개되었으므로, 만일 2009년에 제2차 대중저항운동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새로운 시위문화를 창출하는 대중문화활동으로 전개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명백하게도, 제2차 대중저항운동은 처음부터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대중투쟁으로 전개될 것이다.

원래 대중저항운동이란 군중이 둘러앉아 장시간 동안 논쟁하는 대책회의 같은 것이 아니다. 2008년 여름에 있었던 대중저항운동과정에서 대중문화활동을 가미한 대책토론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투쟁목표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에서 투쟁을 멈추느냐 아니면 이명박 정권 퇴진까지 투쟁을 밀고 나아가느냐 하는 전략문제를 놓고 난상토론식 대책회의만 계속하다가 결국 정권으로부터 집중적인 반격공세를 받고 끝났던 것이다.

대중저항운동은 잔디광장에 모여든 군중이 촛불을 들고 밤샘토론이나 벌이는 ‘시위문화’가 아니라, 백낙청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횃불 들기도 마다 않는 배고프고 성난 군중”이 정권에 대한 불만과 반감을 거대한 힘으로 분출시키는 대중항쟁이다. 4.19혁명이나 1987년 6월항쟁 같은 대중저항운동에서, 그리고 프랑스(2006년 3월과 4월 군중시위), 이탈리아(2008년 11월 군중시위), 그리스(2008년 12월 군중시위) 같은 서유럽 나라들에서 일어난 대중저항운동에서 ‘시위문화’는 찾아볼 수 없다. 대중저항운동이 성난 민심을 폭발시키는 대중항쟁으로 되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입증된 것이다. ‘시위문화’는 대중저항운동을 두려워하는 독재정권이 꾸며낸 허구이다. 2008년의 대중저항운동에서 나타난 ‘시위문화’는 대중저항운동이 넘어서야 할 한계이지 지향해야 할 목표가 아니었다.

둘째, ‘군중역량구성론’의 불분명한 논리이다. 대중저항운동은 시민사회와 정당들이 함께 ‘국정에 기여하는 길’을 마련하는 식으로 전개되지는 않을 것이다. 백낙청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언론과 여러 전문집단, 권익집단을 포함한 시민사회”가 대중저항운동의 주력이 되고 정당들이 보조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대중저항운동의 주체를 ‘시민사회’로 규정하는 것은 모호하다. 대중저항운동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과 도시중산층이 결집한 대규모 군중역량에 의해서 전개될 것이다.

성난 민심을 분출하는 군중은 정권교체의 직접적 담당자가 아니라,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투쟁주체이다. 정권교체의 직접적 담당자는, 처음부터 정권교체를 목적으로 세워진 정당이다. 따라서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대중저항운동의 선두에는 정권교체의 직접적 담당자인 정당들이 앞장서야 마땅하다.

이명박 정권에 저항하는 정당은 민주노동당과 민주당, 그리고 원외정당인 진보신당이다. 자유선진당은 한나라당보다 더 극우적 관점에서 이명박 정권을 반대하므로, 또한 창조한국당은 자유선진당과 손잡은 기회주의정당이므로, 이 논의에서 제외한다.

민주노동당, 민주당, 진보신당이 대중저항운동의 선두에 설 때, 정권퇴진이라는 투쟁목표가 분명하게 제기될 것이며 정권교체의 길이 보일 것이다. 정당이 앞장서지 않은 대중저항운동은 투쟁목표도 불분명하고 투쟁역량도 강하지 못한, 그래서 경찰의 폭력진압과 강제연행으로 끝나버리는 ‘시위문화’의 도덕적 승리 그 이상으로 될 수 없다. 정당이 배제된 대중저항운동은, 그것이 격렬하게 전개되어 설령 정권이 물러난다 해도 이 땅의 민주주의가 절실히 요구하는 진보적 정권교체에 성공하지 못한다. 4.19혁명과 1987년 6월항쟁의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현 단계의 ‘군중역량구성론’을 시민사회와 정당들이 함께 한다는 식으로 모호하게 설명할 것이 아니라, 세 정당이 대중저항운동의 선두에 서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과 도시중산층이 전선에 결집하여 투쟁력을 공급한다고 언급해야 정확한 설명이 된다.

2008년 여름, 대중저항운동의 현장에서는 민주노동당, 민주당, 진보신당이 제각기 분산적으로 활동하였다. 정권퇴진이라는 투쟁목표가 뚜렷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그러한 저급한 양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2008년 ‘촛불시위’보다 1987년 6월항쟁이 훨씬 더 힘있게 전개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6월항쟁에서 야당과 재야세력이 결합한 항쟁지도부가 구성되고, 전투적 학생운동이 투쟁력을 공급하고 도시중산층이 가세한 것에 있다.

그러나 야당과 재야세력이 결합하고 학생운동이 투쟁력을 공급하고 도시중산층이 가세하는 87년식 대중저항운동은 ‘흘러간 옛이야기’이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반정부투쟁에 나설만한 정당은 타협을 위해서 투쟁하는 ‘타협의 명수’로 알려진 민주당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비타협적인 투쟁을 지향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있다. 그 시기의 투쟁주체는 기층민중의 역량을 조직화하지 못한 채, 문익환, 계훈제, 백기완 3인을 대표로 하는 무정형의 대중저항운동이었으나, 2009년의 투쟁주체는 민주노총과 전농을 비롯한 기층민중의 조직역량은 물론 진보성향의 다양한 대중단체들이 결집하는 ‘반이명박 전선’이다. 바로 그 전선의 전진과 승리에서 이 땅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벗어나야 할 고정관념들

대중저항운동의 선두에 민주노동당, 민주당, 진보신당이 서야 한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정권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오직 정권교체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그 세 정당이 분산적이고 때로 상호갈등적인 자기들의 역량을 하나로 모아 ‘반이명박 전선’의 앞장에 서고, 이명박 정권이 저지르는 민생경제 파탄, 민주주의 억압, 남북관계 단절을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거리에 나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과 도시중산층이 전선을 밀고 나간다는 뜻이다.

여기서 논쟁을 불러일으킬, 그래서 실현하기 매우 힘든 난제는 민주노동당, 민주당, 진보신당이 ‘반이명박 전선’에서 과연 3당 정치연대를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 쟁점에 관해서 논할 때 걸림돌로 되는 것은 전선구축에 관하여 가지기 쉬운 고정관념이다.

첫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진보정당이지만, 민주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므로 ‘반이명박 전선’에서 3당 정치연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다. 그러나 대중지지율이 10%도 되지 않는 진보정당들끼리 ‘반이명박 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전선을 구축하는 당면과제 자체를 아예 무관심하게 대하는 고정관념은, 진보정당이 걸리기 쉬운 정치결벽증이 불러일으키는 착각이다. 만약 이 땅의 진보정당이 30% 정도의 대중적 지지를 받는 강한 정당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였다면, 그리고 노동계급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민주노조가 등장하여 진보정당의 중심에 서 있다면, 민주당을 배제하고 단독역량으로 ‘반이명박 전선’을 구축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현실은 정반대이다. 분당사태를 겪은 진보정당의 단독 역량만으로, 또는 총파업투쟁을 밀고 나가지 못하는 허약한 민주노조 상층의 지지만 받고 있는 진보정당들끼리 ‘반이명박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설령 허약하고 불완전한 전선을 구축한다 해도 그것은 진보정치의 결벽증과 무력증을 노출하는 결과 이외에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대중노선을 외면하고 계급노선을 중시하는 정파일수록 결벽증과 무력증을 노출하는 법이다.

대중저항운동에 나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신들과 이해관계가 다른 도시중산층과 불가피하게 손잡아야 하는 것처럼, 대중저항운동의 정치연대를 실현하려면 진보정당들이 자신들과 정치노선이 다른 민주당과 불가피하게 손잡아야 한다.

둘째, 진보정당이 비진보정당과 정치적으로 연대하면, 전선이 자칫 우경화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고정관념이다. 만약 ‘반이명박 전선’이 정권퇴진 요구를 철회하면 전선이 우경화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명박 정권의 민생경제 파탄, 민주주의 억압, 남북관계 단절에 저항하는 대중저항운동이 전선의 우경화를 용납할 가능성은 없다. 전선의 우경화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한낱 기우이다.

셋째, 진보정당이 비진보정당과 정치적으로 연대하는 목적이 비진보정당을 진보정치로 견인하려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다. 정치연대를 실현해서 비진보정당을 진보정치로 견인할 수도 없거니와, 비진보정당을 진보정치로 견인하려는 발상 자체가 전선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이다. 진보정당이 비진보정당과 정치적으로 연대하는 목적은, 비진보정당을 ‘반이명박 전선’으로 견인하려는 것이지, 진보정치로 견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진보정당이 비진보정당을 진보정치로 견인할 수 있다면, 진보정치강령 아래서 아예 3당 합당을 추진해야지 ‘반이명박 전선’에서 3당 정치연대를 실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넷째,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똑같이 민심이 떠난 정당들이므로, 민심이 떠난 민주당을 구태여 ‘반이명박 전선’으로 견인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다. 민심이 떠난 민주당과 정치적으로 연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 민심을 얻었어야 하는 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3당이 민심을 얻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3당이 민심을 얻지 못하고 있는 바로 그 정치현실이야말로 3당 정치연대 실현이 불가피함을 말해주는 것이지, 3당 정치연대가 무의미함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민심을 얻을 수 있는 길은, 3당 정치연대로 위력적인 ‘반이명박 전선’을 구축하는 것밖에 없다.

다섯째, 진보정당이 비진보정당과 ‘반이명박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연대하면, 진보정당이 자기의 단독집권전략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하는 고정관념이다. 그 고정관념은 진보정치의 단독집권전략만 알고, ‘반이명박 전선’의 수많은 대응책을 알지 못하는 전술적 사고의 빈곤이다. ‘반이명박 전선’을 구축하는 단계에서 진보정치의 단독집권전략이라는 한 가지 전략적 사고에만 의존하는 것은, ‘반이명박 전선’이 변화되는 여러 국면들에서 요구하는 수많은 전술적 사고를 사실상 놓쳐버리는 것이다. 집권전략과 집권전술을 혼동하거나, 집권전략만 강조하면서 전술적으로는 대안없고 무책임한 것은 본의 아니게 집권전략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오류이다.

이 땅의 진보정치가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갖가지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 강고한 ‘반이명박 전선’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며, ‘반이명박 전선’을 구축할 때 민생경제 파탄, 민주주의 억압, 남북관계 단절에 저항하는 성난 민심의 지지를 받게 될 것이며, 민심을 얻을 때 진보적 정권교체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2009년 1월 5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