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와 국제연대의 반가운 첫 만남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2008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왜 하필 프랑스 파리에서 행사를 개최하였나?” 2008년 12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회의사당 회의실에서 진행된 간담회에서 네덜란드의 저명한 진보정치인이 그곳을 찾은 방문자들에게 대뜸 그렇게 물었다. 그 저명한 진보정치인은 네덜란드 사회당(SP) 사무총장 한스 밴 헤익닝겐(Hans van Heijningen) 박사였고, 그와 만난 사람들은 파리국제정책포럼(Paris International Policy Forum)에 참가한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유럽의 진보정치현장을 둘러보기 위해서 조직한 유럽진보기행 방문단이었다.

파리국제정책포럼은 2008년 12월 6일부터 9일까지 민주노동당 유럽위원회,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통일학연구소, 소통과 혁신 연구소, 21세기 코리아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국제행사였다. 참가자들은 교수, 박사, 정치활동가, 노조활동가, 사회단체 활동가들로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그 행사를 후원한 국내외 여러 단체들 가운데는 ‘통일뉴스’도 들어있었다.

유럽진보기행 방문단에게 호기심 어린 물음을 던졌던 네덜란드 사회당 사무총장은, 자신의 물음에 대한 자세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네덜란드 사회당 사무총장과 외무국장이 참석한 그 간담회에 주어진 시간이 두 시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시간 동안에 그들과 토론해야 할 진보정치의 현안들은 너무 많았다. 진지한 토론은 예정시간을 넘기면서 의사당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나누는 시간에도 줄곧 이어졌다.

네덜란드 사회당을 찾아간 유럽진보기행 방문단은 비록 민주노동당이 파견한 공식대표단은 아니었지만, 네덜란드 사회당 고위당직자들은 그 방문단을 마치 공식대표단을 대하듯 성의있게 맞아주었다.

좀 창피한 이야기지만, 유럽진보기행 방문단은 네덜란드 사회당에 관한 사전정보를 거의 갖지 못한 채 간담회에 들어갔다. 그에 비해, 네덜란드 사회당 사무총장과 외무국장은 코리아문제를 연구하는 네덜란드인 학자가 쓴 책을 미리 읽고 간담회를 준비했노라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나라 진보정치운동에 대해서, 특히 민주노동당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하였다. 우리나라 진보정당이 유럽 진보정치권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민주노동당 당원들로 이루어진 비공식방문단과 네덜란드 사회당 고위당직자들이 만난 그날의 간담회는, 마치 벗들이 만난 것 같은 분위기로 가득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진보정치와 국제연대의 반갑고 신선한 만남이었다. 헤이그에서 이루어진 만남에서 오고 간 토론내용을 이 짧은 글에 털어놓는 것은 무리이다. 파리국제정책포럼 주최자들이 채택한 2008년 12월 16일 발표문 ‘진보정치와 국제연대를 더욱 강화발전시키자’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진보정치와 국제연대의 만남은 “유럽연합 주요국가들에서 부상하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진보정당들과의 만남과 협의를 통하여 한국 진보정당의 국제연대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토대를 구축”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진보정치와 국제연대의 만남은 그날 처음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흐레나 앞선 12월 6일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엿새 동안 유럽 각지의 진보정치현장을 순방하면서 간담회, 견학, 강의를 진행한 유럽진보기행은, 그 이전에 나흘 동안 열린 파리국제정책포럼과 일정 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완전히 하나로 연결된 것이었다.

나흘 동안 계속된 파리국제정책포럼은 “반세계화, 동북아시아의 평화, 한반도의 통일”을 주제로 내걸고 40여 차례의 포럼, 토론회, 강연회, 세미나를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였다. 같은 시간에 여러 장소에서 일정이 진행되는 바람에,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참가자들은 못내 아쉬움을 느꼈다.

반세계화, 동북아시아의 평화, 한반도의 통일은, 진보정치와 국제연대의 첫 만남을 위해서 미리 추려낸 핵심현안이었고, 참가자들을 토론과 논쟁의 열기 속으로 끌어당긴 매력적인 주제였다.

반세계화와 반신자유주의를 주제로 토론하는 자리에서는 현 시기 세계경제위기의 본질과 신자유주의의 붕괴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최대의 쟁점으로 떠올랐고, 신자유주의 이후의 대안을 진보정치의 시각에서 전망하였다. 2008년 12월 16일 발표문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신자유주의 이후의 대안적 정책이 노동자, 농민, 서민이 결집한 진보정치세력에 의해서, 그리고 전세계 진보정치세력의 국제연대에 의해서 추진되기 시작하였음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주제로 토론하는 자리에서는 한반도의 중립화 문제가 최대의 쟁점으로 떠올랐으며, 한반도의 통일을 주제로 토론하는 자리에서는 통일헌법에 관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12월 16일 발표문은 그 열띤 토론에서 “통일공화국의 미래상을 한층 더 구체적으로 전망하였다”고 묘사하였다.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굵직한 논제들을 다루며 무르익힌 방대한 토론내용을 이 짧은 글에 담아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파리국제정책포럼에서 발표된 논문들이 프랑스어와 영어로 번역되어 곧 출간되리라고 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성과는 언제나 문서로 남는 법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20년이 넘도록 각종 정치행사에 참가해본 풍부한 경험을 가진 나로서도 소화해내기가 버거울 만큼, 파리국제정책포럼의 일정은 그야말로 긴장의 연속이었다. 참가자들은 파리 시내에 있는 불노뉴 숲 야영장(Camping Du Bois de Boulogne)에 설치된 여러 채의 모빌홈(Mobil-Home)에서 숙박하였다. 서른 여덟 살에 요절한 프랑스 시인 기욤 아뽈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가 “미라보 다리 아래 쎄느강은 흐르고 우리네 사랑도 흘러내린다”고 노래했다는 바로 그 쎄느강이 숙소를 끼고 유유히 흘러가는데도, 참가자들은 아뽈리네르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해서, 파리국제정책포럼이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것은 아니다. 12월 6일 쌩마땡(Espace Saint-Martin)에서 열린 축제음악회(Gala Concert)에 출연한, 대구에서 온 창작국악합주단 ‘여음’, 영국에서 성악을 전공하는 테너 윤정수, 프랑스인 현악 사중주단 옥또쀠스(Le quatuor Octopus)는 우리 음악과 서양음악을 협연하는 색다른 ‘국제연대음악’을 선보여 관중에게 감동을 주었다. 음악회만이 아니라, 파리국제정책포럼이 열린 휘압(Fiap)에서는 미술작품, 서예작품, 사진작품도 전시되었고 도서전시회도 열렸다.

파리국제정책포럼이 진행되는 나흘 동안 참가자들이 방문하여 간담회를 가진 대상들을 손꼽으면, 프랑스 지방의회정책(CIDEFE) 파리본부, 평화운동단체 평화운동(La Mouvement de la Paix), 쿠바 지원단체 꾸바씨(Cuba Si), 프랑스 최대 진보언론사 뤼마니떼(l'Humanite), 프랑스의 대표적인 진보단체 아딱(ATTAC France, Association pour la Taxation des Transactions pour l'Aide aux Citoyens), 고암 이응로 화백 기념관 등이다. 또한 그 기간에 참가자들이 견학한 곳을 손꼽으면, 프랑스의 대표적인 진보출판사 겸 서점 아르마땅(l'Harmattan),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한국학연구소(CRC-EHESS) 등이다.

12월 16일 발표문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포럼 참가자들은 “한국 진보정치운동을 향하여 보내주는 전세계 진보정치세력의 열렬한 지지와 성원을 국제연대의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였던 것이다.

3천500km를 주파하며 진보정치현장을 돌아보다

파리국제정책포럼에 이어서 진행된 유럽진보기행에는 당활동가들과 노조활동가들이 주로 참가하였다. 당활동가란 민주노동당 활동가를 뜻하고, 노조활동가란 민주노총 활동가를 뜻한다.

엿새 동안 진행된 유럽진보기행은, 긴장의 연속이었던 파리국제정책포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간과의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듯하였다. 기행일정을 준비하고 이끌었던 유럽여행가이며 민주노동당 당원인 임경복 선생은, 파리국제정책포럼을 마친 참가자들이 파리의 명멸하는 불빛이 스러져가는 한밤중에 ‘불철주야의 대장정’에 오를 때, 불과 엿새 동안 그 많은 진보정치현장을 찾아가고 틈틈이 유럽의 관광명소까지 둘러보는 3천500km 여정은 여행상식으로는 불가능하게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투쟁현장에서 단련된 민주노동당 당원들의 강인한 돌파력은,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독일, 스위스를 휘감아도는 3천500km 여정을 엿새만에 주파하는 ‘기적’을 창조하였다.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여행상식이 깨져나간 것이다.

유럽인들이 휴가철에 이용하는 여행차량 캠퍼(camer)는 유럽진보기행 참가자들이 시간과 경비를 아끼기에 더 없이 알맞은 이동수단이었다. 캠퍼에는 여섯 명이 누울 수 있는 비좁은 공간과 간단한 조리시설이 있었다. 화장실도 있었으나 참가자들이 가져온 커다란 여행가방들을 무득이 쌓아놓는 바람에 쓰지 못하였다.

캠퍼 일곱 대와 승합차 한 대로 이루어진 긴 차량대오는 진보정치운동의 열기를 내뿜으며 프랑스의 대평원과 독일의 ‘검은숲(Schwarzwald)’을 건넜고, 스위스의 눈덮힌 산맥과 호수를 지났고, 중세기 유럽풍의 석조건물이 들어찬 도심을 질주하였다.

낮에는 진보정치현장을 방문하는 긴장된 일정이 있었으므로, 캠퍼는 주로 밤시간에 장거리를 주행하였다. 캠퍼에는 차량운전요원 한 사람이 고정배치되었고, 선두지휘차량과 수시로 무선교신을 주고 받으면서 야간운행의 졸음운전을 방지하는 임무를 맡은 통신요원 한 사람이 배치되었는데, 그 두 사람은 낮에는 자고 밤에는 일어나 3천500km에 이르는 장거리 운전을 강행하였다. 캠퍼에서 자발적으로 일한 취사요원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용케도 구한 식재료를 가지고 끼니마다 참가자들의 식사를 보장해주었다. 세면, 설거지, 식재료 공급 등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재빨리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어떤 때에는 이틀 동안이나 세면조차 하지 못한 채 강행군을 한 적도 있었다. 서로 마음이 통하니, 고된 강행군도 어려움이나 안전사고 없이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유럽의 진보정치현장을 찾아간 첫 날은 프랑스 파리에서 출발하여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이어지는 긴 여정을 펼쳤는데, 12월 10일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금속노조(IG Metall)와 좌파당(Die Linke)을 방문하여 간담회를 가졌다. 독일 금속노조는 12월 16일 파리에 돌아온 길에 마지막으로 방문하여 간담회를 가졌던 프랑스 노조 쎄제떼(CGT)와 함께 유럽진보기행에서 중시한 방문대상이었다. 12월 16일 발표문은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국제노동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발전전략을 논하였다”고 지적하였다.

12월 11일에는 독일 프라이브룩에서 태양에너지연구소(Solar Info Center), 프라이브룩 시청, 프라이브룩 대학을 견학하였다. 유럽진보기행 방문단을 위해 해설을 맡은 태양에너지연구소 관계자가 전한 말에 따르면, 방문단이 오기 보름 전에 북측의 국가과학원 대표단이 그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12월 12일에는 스위스 베른주(canton of Bern)의 세계적인 관광명소 인터라켄(Interlaken)에 자리잡은 라우터부룬넨 대협곡(Lauterbrunnen Valley)에서 하루 묵으며 모처럼 여유있는 시간을 보냈다. 참가자들은 해발 1,650m에 있는 작은 산골마을 뮈렌(Mürren)까지 산악열차와 삭도를 갈라타며 올라갔다. 알프스의 웅장수려한 산줄기는 3대 주봉인 아이거(Eiger, 해발 3,970m), 뭰취(Mönch, 해발 4,107m), 융프라우(Jungfrau, 해발 4,158m)를 마치 한 품에 감싸안은 듯, 숨막히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12월 13일에는 스위스 제네바로 갔다. 론강이 제네바 호수로 흘러드는 인구 80만명의 고색창연한 도시 제네바는 유엔기구들과 국제적십자사 본부가 자리잡은 국제외교중심지로 알려졌는데, 우리나라 현대사에는 두 차례의 제네바 회담으로 기록된 인연이 깊은 도시이다.

제1차 제네바 회담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대 강국의 결정으로 1954년 4월 26일 한반도의 평화문제와 통일문제를 논하였던 국제정치회담이다. 그 회담에는 6.25전쟁 참전국들인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 캐나다, 터키,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벨기에,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룩셈부르크, 이디오피아를 한 편으로 하고, 소련과 중국을 다른 한 편으로 하는 양대진영이 참가하였다. 참전국 중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불참하였다. 남측 정부는 변영태 외무장관을 수석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파견하였고, 북측 정부는 남일 외무상을 수석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 회담은 논란만 무성한 채 아무런 합의도 내오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꼭 40년이 지난 1994년 10월 21일 북측과 미국은 바로 그 도시에서 조미(북미) 기본합의문에 서명하였다. 1954년 4월에 열린 제네바 다자회담이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4대 강국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열린 것이었다면, 1994년 10월에 열린 제네바 양자회담은 북측의 주도로 한반도의 비핵화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열린 것이었다. 1954년 4월의 제네바 다자회담은 설전을 주고 받다가 끝났으나, 1994년 10월의 제네바 양자회담은 정치적 합의를 문서화하는 거대한 성과를 낳았다.

14년 전,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과 로버트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가 조미(북미) 기본합의문에 서명한 장소는 제네바에 있는 북측 대표부이다. 유럽진보기행 참가자들은 제네바 시내를 자동차로 한바퀴 돌아보고 나서 북측 대표부로 향했다. 북측 대표부 청사는 제네바 호수를 정면으로 마주한 풍광 좋은 곳에 자리잡았는데, 한 눈에 봐도 ‘명소’였다. 반면에, 미국 대표부는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어떤 건물에 사무공간을 세들어 있는 볼품없는 꼴을 하고 있었다. 공식방문이 아니었으므로, 참가자들은 높은 대문과 담장으로 가려진 대표부 경내를 들여다볼 수도 없었고, 우리글과 프랑스어로 각각 ‘제네바 유엔사무국 및 국제기구 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부’라고 새겨넣은 문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발길을 돌렸다.

제네바 이후의 행선지는 프랑스의 아름다운 휴양도시 앙씨(Ancy)였다. 앙씨는 맑은 호수와 눈덮힌 산봉우리가 중세기의 고풍스런 도시미관과 멋지게 어우러지며 평온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제네바보다 앙씨가 더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냈다.

유럽의 진보정치운동은 도약하고 있었다

12월 15일에 가야할 진보정치현장은 두 군데였다. 하나는 독일 루어(Ruhr)지방의 뒤셀도르프(Düsseldorf)에서 북쪽으로 35km 떨어진 공업도시 오버하우젠(Oberhausen)에 있는 좌파당(Die Linke)의 지방당조직을 방문하여 진보정당의 지방자치현장을 살펴보고 간담회를 갖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사회당을 방문하여 진보정당의 중앙정치현장을 살펴보고 간담회를 갖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오는 둘로 나누어졌다. 나를 포함하여 참가자 여덟 명은 네덜란드 헤이그로 떠났다. 우리를 태운 캠퍼는 프랑스 앙씨를 출발한 뒤로 밤새도록 달려 새벽에 헤이그 부근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도착하였다. 그 휴게소에서 세면을 하고 머리를 감아야 하였는데, 더운 물이 나오지 않아 얼음 같이 차거운 물로 머리를 감았다.

헤이그 도심에 자리잡은 국회의사당 첨탑 아래로 맵짠 겨울바람 한 줄기가 소리없이 지나갔다. 방문단은 네덜란드 사회당 고위당직자들과 만나기 위하여 국회의사당으로 들어섰다. 국회의사당 경내에는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유적지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1907년 6월 25일 이 낯선 도시를 찾아온 3인의 밀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일제의 악랄한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원통함과 분노를 삭이며 문밖을 오갔던 바로 그 건물이다.

1972년 10월 22일에 창당된 네덜란드 유일의 진보정당인 네덜란드 사회당(Socialist Party of the Netherlands)은 보수정당인 기독교민주당(CDA), 중도정당인 노동당(PvdA)에 이어 제3당이다. 당원은 5만명이 넘는다. 네덜란드 인구 1천664만명 가운데 5만명 당원은 0.30%의 비율을 차지하고, 남측 인구 4천847만명 가운데 민주노동당 당원 8만명은 0.16%의 비율을 차지한다. 네덜란드 사회당은 하원(Tweede Kamer)의석 150석 가운데 25석을, 상원(Eerste Kamer)의석 75석 가운데 12석을 각각 차지하였고, 유럽의회(European Parliament)에서 두 석을, 네덜란드 지방의회에서 400석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네덜란드 사회당의 당세가 최근 급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3년에는 상원의석을 네 석밖에 차지하지 못하였는데, 2006년 11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12명이 당선되었고, 하원선거에서는 16.6%의 득표율을 올리면서 당세가 급성장한 것이다. 네덜란드 사회당이 2006년 11월 선거에서 비약적으로 진출한 까닭은, 그 당의 사무총장과 나눈 간담회에서 나온 이야기를 정리하면, 네덜란드 유권자들 사이에서 유럽연합이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반대하는 기운이 강해졌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네덜란드 사회당이 그 동안 노동자와 서민들 속에 들어가서 현장정치활동을 꾸준히 밀고 나갔기 때문이다.

이번에 파리국제정책포럼과 유럽진보기행에 참가한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직접 만난 유럽의 대표적인 진보정당들 가운데는 네덜란드 사회당 이외에도 프랑스의 반자본주의신당과 독일의 좌파당이 있다.

프랑스의 반자본주의신당(Nouveau Parti anticapitaliste, NPA)은 현재 창당준비사업이 막바지에 이른 신생진보정당이다. 2008년 11월 6일 400명의 대표급 진보인사들이 벌여온 창당준비사업의 결실로 2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파리에서 첫 창당준비집회가 열렸다. 현재 약 1만명의 정치활동가들이 창당준비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2009년 2월 1일 공식출범을 앞두고 있다.

독일의 좌파당(Die Linke)도 프랑스의 반자본주의신당과 마찬가지로 신생진보정당이다. 좌파당은 사회민주당 좌파세력인 ‘노동과 사회정의 선거대안(WASG)’과 민주사회당(PDS)이 조직적으로 결합하여 2007년 6월 16일 베를린에서 창당되었다. 당원수는 2008년 9월말 현재 7만6천명이다. 좌파당은 최근에 실시된 의회선거에서 놀라운 득표율을 기록하며 독일 정치권을 뒤흔드는 새로운 진보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브란덴부르크주에서 28%의 득표율을, 튀링엔주에서 26.1%의 득표율을, 작센안할트주에서 24.1%의 득표율을 올리며 기염을 토하였다.

유럽의 진보정치운동은 도약하고 있었다. 진보정당들이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유럽인민의 정치적 의사를 대변하면서, 진보정치세력의 분산과 분열을 넘어서 단결과 통합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이번에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유럽진보정당과의 만남에서 목격한 유럽 진보정치운동의 현실이었다. 그 현실은 분열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 진보정치운동이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이다.

씨줄과 날줄로 수놓은 진보정치활동

비록 이 땅의 언론들은 무관심하였지만, 우리나라 진보정치운동이 자기의 활동영역을 국제사회로 확장하기 시작한 것은, 진보정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건성으로 듣고 넘길 일이 아니다. 파리국제정책포럼과 유럽진보기행은, 진보정치와 국제연대의 만남이 우리나라 진보정치운동사의 필연적이며 합법칙적인 발전임을 실증하였다.

보수정치운동은 국제연대(international solidarity)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국제연대라는 개념이 진보정치운동에서만 쓰이는 까닭은, 진보정치운동에 동력을 공급하는 두 개의 중심축인 진보정당과 민주노조가 맞서 싸우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일국적 범위를 넘어 국제사회 전반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지배하고 수탈하는 대상은 ‘세계’이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진보정당과 민주노조의 국제연대활동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지배하고 수탈하는 낡은 세계를 바꾸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고도의 정치활동이며 중요한 임무인 것이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 국제연대라는 말을 쓰지 않는 까닭은, 그 두 당이 친미성향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미국 공화당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한나라당이나, 미국 민주당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민주당에게 국제연대를 무의미하다. 그들이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상수는 국제연대가 아니라 한미관계이다.

그와 전혀 다르게, 대미관계에서 자주성을 확립하려는 민주노동당의 투쟁은 민주노동당의 국제연대활동에서 상수로 된다.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세계화에 반대하는 민주노동당의 진보정치가 다른 나라 진보정당들과 손잡는 국제연대에 의해서 더욱 풍부하고 활기차게 실현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이 명백한 일이다. 파리국제정책포럼과 유럽진보기행은, 국내운동과 해외운동을 상호연계한 씨줄과 진보정치와 국제연대를 상호연계한 날줄을 서로 엮어 우리나라 진보정치운동의 새로운 발전전망을 수놓은 활동이었다.

파리국제정책포럼을 막 시작하려던 12월 5일에 참가자들에게 날아든 소식은, 그 동안 경찰의 수배를 받아오던 민주노총 이석행 위원장이 경기도 고양시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유럽진보기행을 마친 12월 14일 참가자들에게 날아든 또 하나의 소식은,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의 의원직을 박탈하려는 이명박 정권의 움직임을 저지하는 대중집회가 경남 사천에서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는 소식이었다.

그러한 소식을 들은 참가자들은 침묵할 수 없었다. 포럼 주최자들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긴급행동’을 촉구하는 문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문서는 “이명박 정권의 탄압을 저지하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단체들을 지지, 성원하는 긴급행동에 참여해주기를 호소”하였다. 국회에서 반민주적이고 반민생적인 악법을 무더기로 강행처리하는 이명박 정권에 맞선 진보정치의 새로운 싸움이 준비되고 있었다.  (2008년 12월 29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