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마지막 분단국, 통일의 길에 들어서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지중해에서 들려온 꿈같은 소식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남북정상회담이 두 차례 열리고,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이 발표되어 남북관계가 발전되어왔는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남북관계가 발전하기는커녕 날로 굳어지더니 지금은 아예 끊어지고 말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대북관계에서 10년 동안 쌓아올린 화해협력의 성과를 무너뜨린 책임은 전적으로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에게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단절된 남북관계를 그들의 임기 안에 복원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정세를 그처럼 비관적으로 보는 까닭은,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정세를 오판하여 남북관계를 단절상태에 빠뜨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대북관계에서 반목과 대결을 앞세우는 고질적인 정치성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집권하기 이전부터 대북관계에서 반목과 대결을 주장해온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집권에 성공한 뒤에 자기들의 정치성향을 버리고 화해와 협력을 추구하는 전향적 태도를 취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대북관계에서 촉발시킨 갈등이 경색국면을 불러왔고, 경색국면이 악화되어 결국 단절상태에 빠지고 말았으니, 단절상태에 놓인 남북관계에서 긴장이 높아지다가 우발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아무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남북관계의 현재 상황은 너무 비관적이다.

이처럼 남북관계의 발전전망이 불투명해지고 남북이 우발적으로 충돌할 가능성마저 어른거리고 있는 한반도의 정세와는 대조적으로, 유럽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분단국에서는 평화통일의 날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꿈같은 소식이 들린다. 한반도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지중해의 터키 남쪽 바다에 떠있어서 남측 언론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작은 섬나라가 있으니, 그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처럼 남북으로 갈라진 분단국 키프러스(Cyprus)이다.

한반도와는 거의 인연이 없는 키프러스에 주목하는 까닭은, 올해 3월 이후 그 나라에서 진전되어오는 통일과정이 한반도 통일문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키프러스의 남북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통일회담은,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쳐놓은 차단벽을 뚫고 평화통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상상력을 공급하는 아주 좋은 활력소이다.

두 분단체제의 상이성과 유사성

한반도 넓이가 21만9천20㎢인데 비해, 키프러스 섬의 넓이는 9천250㎢밖에 되지 않는다. 2008년 7월을 기준으로 한반도 인구가 7천185만8천480명인데 비해, 키프러스 인구는 79만2천604명밖에 되지 않는다. 키프러스의 남북분단은 인구의 77%를 차지하는 남키프러스의 그리스계와 18%를 차지하는 북키프러스의 터키계 사이의 민족적 갈등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은 동방기독교(Greek Orthodox)와 이슬람교의 종교적 갈등관계로도 표출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키프러스 분단의 내적 요인은 민족적 이질성이고 그것의 외적 요인은 주변강국들인 그리스와 터키의 오랜 대립관계라고 할 수 있다.

키프러스는 긴 세월 동안 두 민족이 한 나라 안에서 살아온 역사적 경험이 있고, 또한 남북 사이에 체제대립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와 다르게, 한반도에는 민족적 단일성이 존재하는 반면에 남북 사이에 체제대립관계가 가로놓여있다. 이런 맥락을 살펴보면, 한반도의 분단체제와 키프러스의 분단체제는 매우 달라서 양자를 비교하기 힘든 것처럼 느껴지지만, 다른 측면들을 들춰내면 두 나라의 분단체제가 공유한 구조적인 유사성이 보인다. 그 유사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제국주의 나라가 강요한 식민통치를 받았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키프러스는 분단체제의 구조적 유사성을 공유한다. 우리나라가 1905년부터 1945년까지 40년 동안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것처럼, 키프러스도 1878년부터 1960년까지 82년 동안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되고 나서 3년만에 분단체제가 고착되기 시작한 것처럼, 키프러스도 영국 식민통치에서 해방되고 나서 4년만에 분단체제가 고착되기 시작하였다.

둘째, 전쟁상처를 입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키프러스는 분단체제의 구조적 유사성을 공유한다. 한반도에서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전쟁을 겪은 뒤에 남북이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대치해오는 것처럼, 키프러스도 1963년 12월 남북으로 갈라져 무력충돌을 일으켰는데, 1964년 3월 급파된 유엔평화유지군이 설치한 완충지대를 사이에 두고 남북이 대치해왔다. 키프러스에는 현재 유엔평화유지군 1천명이 주둔하고 있다. 1963년 12월 그리스계와 터키계가 무력충돌을 일으킨 까닭은, 그리스와 합병할 것을 주장해온 그리스계 정권이 그리스계와 터키계의 권력분점을 규정한 헌법을 개정하여 터키계의 권리를 제한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한 나라 안에 두 개의 분단정부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키프러스는 분단체제의 구조적 유사성을 공유한다. 1948년 8월 15일과 9월 9일에 한반도의 남북에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지면서 분단체제가 고착되기 시작한 것처럼, 키프러스에서도 1967년 12월 북측에 임시정부가 세워지면서 분단체제가 고착되기 시작하였다. 한반도에 대한민국 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있는 것처럼, 키프러스에는 키프러스 공화국(Republic of Cyprus) 정부와 터키계 북키프러스 공화국(Turkish Republic of Northern Cyprus) 정부가 있다. 북키프러스 임시정부가 자기 지역에 새로운 공화국을 세웠음을 선포한 때는 1983년 11월이다.

넷째, 외국군 장기주둔이 분단체제를 유지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키프러스는 분단체제의 구조적 유사성을 공유한다. 한반도 면적의 약 절반을 차지하는 남측에 주둔하는 미국군은 3만8천명이고, 키프러스 영토의 37%를 차지하는 북키프러스에 주둔하는 터키군은 3만명이다. 1974년 7월 그리스와 합병할 것을 주장해온 키프러스 군부가 군사정변을 일으켜 대통령을 쫓아내고 친그리스 정부를 세우자, 미국의 지지를 받은 터키 정부는 터키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자국군대를 북키프러스에 상륙시켰다.

한반도의 분단체제와 키프러스의 분단체제가 공유한 구조적인 유사성은,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만이 분단체제를 넘어서는 유일하고 현실적인 해결책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동독에서 체제가 무너지고 동독이 서독에 자발적으로 병합함으로써 실현된 독일의 흡수통합경험이나 전쟁시기에 북베트남이 남베트남 정부를 전복함으로써 실현된 베트남의 무력통일경험에서 찾을 수 없는 자주통일과 평화통일의 진리를 키프러스의 통일노력에서 찾을 수 있다.

통일회담이 통일을 실현하는 지름길이다

독일식 자발적 병합도 아니고 베트남식 무력통일도 아닌 한반도식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지름길은 통일회담이다. 명백하게도, 통일회담만이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오늘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통일회담은 고사하고 남북접촉마저 거부하는 것은 평화통일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한반도에서 역사적인 통일회담이 열렸던 것처럼, 2008년 3월 21일 키프러스에서도 역사적인 통일회담이 열렸다. 남키프러스의 디미트리스 크리스토피아스(Dimitris Christofias) 대통령과 북키프러스의 메멧 알리 탈랏(Mehmet Ali Talat) 대통령이 키프러스의 수도 니코시아(Nicosia)에서 제1차 통일회담을 가졌다. 그 회담에서 남북정상이 합의한 사항은 세 가지이다.

첫째, 나라의 통일방안을 합의하기 위한 남북정치기구를 이른 시일 안에 설치한다.

둘째, 2008년 6월 말까지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실무협상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통일회담을 시작한다.

셋째, 우선 니코시아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분단계선부터 철거한다. 니코시아는 유엔평화유지군이 그 도시의 중심부에 있는 레드라(Ledra) 거리를 사이에 두고 남북을 가르는, 그린라인(Green Line)이라 부르는 충돌방지선을 그었던 1964년 이후 44년 동안, 키프러스 분단현실을 뚜렷이 드러내온 도시이다.

키프러스 통일방안을 합의하기 위한 노력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4년 4월 유엔이 제시한 키프러스 통일방안을 놓고 남키프러스과 북키프러스가 각각 그 통일방안에 대해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한 적이 있었다. 투표결과는 남키프러스에서 반대표가 75%가 나왔고, 북키프러스에서는 찬성표가 64%가 나왔다. 유엔이 제시한 통일방안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유엔이 제시한 통일방안을 반대한 사람은 2003년에 남키프러스에서 실시된 대선에서 승리한 민주당(DIKO) 출신 대통령 타쏘스 파파도풀로스(Tassos Papadopoulos)였다. 오늘 이명박 대통령처럼 그도 나라의 통일을 반대하였으니, 키프러스 통일방안이 채택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파파도풀로스 정권은 2004년 5월 남키프러스 단독으로 유럽연합(EU)에 가입하는 조치를 취하였고, 2008년 1월부터 유로화를 도입하였다. 그로써 남북키프러스 사이의 갈등은 더 커졌다.

앞으로 키프러스 통일회담에서 풀어야 할 난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북 두 정부가 관할하는 지역면적을 조정하는 문제이다. 인구의 77%를 차지하는 그리스계가 사는 남키프러스 넓이는 영토의 63%이고, 인구의 18%를 차지하는 터키계가 사는 북키프러스 넓이는 영토의 37%이다. 남키프러스 정부의 요구는, 통일과정에서 인구비례에 맞게 남북정부의 관할지역을 조정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북키프러스가 그 요구를 들어줄지는 미지수이다.

둘째, 북키프러스에 주둔하는 터키군을 철군하는 문제이다. 남키프러스는 ‘선 철군 후 통일’을 주장하고, 북키프러스는 ‘선 통일 후 철군’을 주장한다. 남북 사이에 철군시기가 어긋나는 것일 뿐, 철군 자체는 기정사실로 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와 다르게, 한반도에서 남측은 주한미국군 강화와 영구주둔을 주장하고, 북측은 주한미국군 철군을 주장한다. 철군시기를 조율하면 키프러스에 주둔하는 터키군을 철군할 수 있지만, 한반도에서 미국군을 철군하는 문제에 대해 찬반으로 갈라져있는 남북정부는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조율하기는커녕 논의하지도 못한다.

키프러스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날로부터 닷새가 되는 2008년 3월 26일 북키프러스 주둔 터키군사령관을 만난 북키프러스의 탈랏 대통령은 “터키군은 국제협약에 따라 파견되었으며, 키프러스에 공정하고 지속적인 평화가 이뤄질 때까지 임무를 계속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남키프러스는 터키군이 북키프러스에 주둔하는 한,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저지하겠다고 맞서고 있다.

2008년 4월 3일 니코시아의 레드라 거리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70m 길이의 분계선이 마침내 철거되었다. 남북을 잇는 길이 새로 포장되고, 분계선 북측 구역을 지키던 터키군 병사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다. 니코시아에 사는 키프러스 인민들은 신분증이나 여권을 제시하면 자유롭게 남북을 오갈 수 있게 되었다. 레드라 거리에서 분계선이 철거됨으로써 키프러스 전역에서 분계선이 뚫린 남북통행로는 모두 여섯 군데로 늘어났다.

2008년 4월 18일 니코시아에 있는 유엔관할지역에서 통일문제를 풀어갈 남북정치기구인 특별위원회가 첫 회의를 열었다. 남북 협상대표단이 참석한 그 회의에서는 통일정부수립문제, 남북경제통합문제, 환경문제, 범죄처리문제를 비롯한 각 부문별 통일방안이 논의되었다.

2008년 5월 23일 남북정상은 제1차 통일회담에서 공약한 대로 두 달만에 다시 만나 제2차 통일회담을 가졌다.

남북정상, 연방공화국 건설에 합의하다

키프러스 평화통일을 앞당긴 정치적 합의는 2008년 7월 1일에 있었던 제3차 남북정상 통일회담에서 나왔다. 그 회담에서 남북정상은 단일주권을 가진 연방공화국을 건설한다는 원칙, 그리고 모든 키프러스 인민이 연방공화국의 단일국적을 가진다는 원칙에 합의한 것이다. 나라의 주권을 단일화하는 통일원칙은 연방공화국 건설을 논해온 북키프러스가 주장한 것이며, 모든 키프러스 인민에게 차별없이 단일국적을 부여하는 통일원칙은 1974년에 터키군이 북키프러스를 점령한 이후 그곳으로 이주한 터키사람들의 귀화를 제한하려는 남키프러스가 주장한 것이다.

키프러스에 세워질 통일공화국은, 남북의 지역자치정부가 각각 고도의 자치권을 행사하고, 중앙의 연방정부가 하나의 국호 아래 단일한 국가주권을 행사하는 연방제(federal system)를 도입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키프러스에 통일공화국이 세워지면, 평화통일과 연방제 통일이 동의어라는 진리가 현실로 입증될 뿐 아니라, 키프러스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연방제 구성원리에 따라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한 나라가 될 것이다.

키프러스 남북정치기구가 실무협상에서 통일방안을 마련하자, 남북정상은 2008년 9월 3일부터 본격적인 통일회담을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남북정상 통일회담에서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합의하였다.

첫째, 앞으로 한 주간에 한 차례 정기적으로 남북정상 통일회담을 갖는다.

둘째, 남북정상 통일회담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남북정상 사이에 직접통신망을 연결한다.

셋째, 통일회담에서 합의한 사항을 남북에서 동시에 실시하는 국민투표에 부침으로써 인민의 의사를 통일과정에 민주적으로 반영한다.

남북정상이 연방제 통일방안을 합의하자, 통일과정에 걸림돌이 되어온 남북의 군사적 긴장도 풀리게 되었다. 2008년 10월 13일 제5차 남북정상 통일회담에서 연방제 통일방안을 합의한 직후, 남키프러스 정부는 해마다 10월에 실시해오던 연례군사훈련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남키프러스의 크리스토피아스 대통령은 “남키프러스 정부는 통일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니키포로스 연례군사훈련을 연기 또는 중지할 것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에게 제안한다. 북측도 그곳에 주둔하는 터키군의 토로스 군사훈련의 중지를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군사적 긴장이 풀려야 통일방안을 합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연방제 통일방안에 합의하여야 군사적 긴장을 풀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키프러스의 남북정상이 단일주권과 단일국적을 가진 통일공화국을 건설하는 연방제 통일방안에 합의한 것은, 키프러스 통일을 결정적으로 앞당긴 쾌거이다. 2008년 5월 2일 남키프러스 외무장관 마르코스 키프리아누(Marcos Kyprianou)는 독일 방문 중에 현지 라디오방송에 출연하여 2010년 이전에 키프러스가 통일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희망이 아니라 현실로 전변되고 있다. 키프러스 통일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인 것이다.

한편, 북키프러스의 탈랏 대통령은 9월 27일 그리스의 라디오방송과 대담하는 자리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협상이 지연되면 타결은 어려워질 것”이라고 하면서 통일회담의 급진전을 호소하였고, 그에 화답하여 10월 1일 남키프러스의 크리스토피아스 대통령은 “남북의 영구분단은 키프러스의 불행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통일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오늘 키프러스의 현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키프러스 통일과정은 남북정상 통일회담 개최→남북정치기구 설치→연방제 통일방안 합의→군사적 긴장 감소로 급진전되어왔다. 키프러스의 통일회담은, 평화통일이 한 세대를 넘기는 긴 세월에 걸쳐 단계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남북정상이 정치적 결단을 내리고 남북인민이 통일회담을 지지하면 통일과정이 불과 한 두 해 사이에 급진전되어 평화통일을 실현할 수 있음을 현실로 입증하였다. 60년이 넘도록 평화통일을 염원해온 한(조선)민족에게 부러운 이야기로 들리지만, 유럽의 마지막 분단국 키프러스에서 통일공화국이 세워질 날은 눈앞에 다가왔다.

그들은 어디서 동력을 얻었을까?

키프러스의 남북정부가 통일노력을 기울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7년 7월부터 8월까지 남북정상 통일회담이 두 차례 열린 적이 있으며, 2003년 4월에는 남북정부가 남북왕래를 허용하는 조치를 발표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전의 통일노력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통일을 실현하는 동력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재개된 통일회담은 이전의 통일회담과 다르게 성공적으로 급진전되고 있다. 그처럼 성공적인 통일회담의 추진동력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났을까? 키프러스 통일과정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는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는 동력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것이다.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남북정상 통일회담에 대한 키프러스 인민의 전폭적인 지지에서 찾을 수 있다. 남키프러스의 크리스토피아스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두 달만에 여론조사기관이 실시한 조사의 결과는, 응답자 가운데 78%가 통일회담을 지지하였으며, 야당 지지자 가운데서도 77%가 통일회담을 지지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인민이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통일회담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통일회담을 추진하는 동력이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이다. 키프러스의 현재진행형 통일과정은 인민이야말로 통일을 실현하는 주체라는 진리를 현실로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전에 추진된 남북정상 통일회담에 대해서는 그닥 지지하지 않던 키프러스 인민들이 이번에 크리스토피아스 대통령이 추진하는 통일회담에 대해서는 왜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일까? 그 까닭은, 크리스토피아스 대통령이 키프러스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진보적인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키프러스 인민은 진보대통령이 추진하는 통일회담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키프러스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진보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은 근로인민진보당(AKEL)이다. 그 당은 키프러스의 자주화, 평화, 비동맹화를 정치강령으로 내걸고, 연방제 방식으로 키프러스 분단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해온 진보정당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근로인민진보당은 1926년에 창당된 키프러스공산당(CPC)의 후신이다.

공산당은 무조건 불법화해야 하고, 공산주의라는 말조차 쓰기를 꺼려하는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눈으로 바라보면, 키프러스공산당의 후신인 근로인민진보당은 ‘국가보안법’을 수없이 위반한 극좌파정당으로 보이겠지만, 키프러스의 정치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키프러스의 정치현실만 그런 게 아니라, 세계의 정치현실은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우물 안의 개구리 식으로 바라보는 폐쇄적인 정치현실과 생판 다르다.

이를테면, 지난 60년 동안 ‘동아시아의 반공보루’를 자처해온 대만에서 2008년 7월 20일 대만공산당(CPT)이 창당되었다. 대만공산당 창당은 공산당을 불법화해온 대만판 ‘국가보안법’인 ‘인민단체법’이 사실상 사문화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대만공산당이 창당되자, 지구 위에서 아직도 공산당 불법화를 고집하는, 정치적으로 가장 폐쇄된 ‘동아시아의 반공보루’ 만이 이 땅에 잔존하게 되었다.

근로인민진보당은 2001년 5월 27일에 실시된 총선에서 34.7%의 득표율을 얻어 의회 56석 가운데 20석을 차지하였고, 그에 따라 당대표 디미트리스 크리스토피아스는 의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키프러스 정치사에서 진보정당이 원내 다수당으로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근로인민진보당이 집권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그 당이 키프러스 사회민주당(EDEK), 키프러스 민주당(DIKO)과 함께 3당 정치연합을 실현한 데 있다. 3당 정치연합은 2003년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타쏘스 파파도풀로스를 당선시켰고, 근로인민진보당은 3당 정치연합이 구성한 연립내각에서 네 개의 각료직를 차지하였다.

근로인민진보당은 2008년에 실시된 총선에서도 18석(득표율 32.2%)을 차지하여 원내 다수당의 자리를 지켰으며, 2008년 2월 24일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득표율 53.36%를 얻은 근로인민진보당 후보 크리스토피아스는 득표율 46.64%를 얻은 보수정당 후보 로아니스 카술리데스(Loannis Kasoulides)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마침내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였다.

남북이 힘을 합해야 나라를 통일할 수 있으므로, 평화통일정책을 추진하는 정당이 남과 북 가운데 어느 한 쪽에서만 집권해서 인민의 지지를 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남북 양측에서 모두 평화통일정책을 추진하는 정당이 집권하여야 나라를 통일하기 위한 통일노력이 전국적 범위에서 인민의 지지를 받으며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키프러스가 그러한 경우에 든다. 그 나라에서는 먼저 북키프러스에서 중도정당이 집권한 뒤에 남키프러스에서 진보정당이 집권에 성공함으로써 남북관계를 평화통일의 길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

북키프러스의 집권당은 공화터키당(CTP)이다. 1970년에 창당된 공화터키당은 1980년대에 터키에서 진보적인 학생운동에 참여하였던 청년당원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386세대’ 출신 청년당원들이 키프러스로 건너가 당의 중심세력으로 자라나면서 당이 진보적인 성격을 띄기 시작하였다. 북키프러스의 현직 대통령인 탈랏이 당대표로 선출된 1996년 이후 당세를 확장해온 공화터키당은 사회민주주의노선을 걷는 중도정당이며, 2008년 6월 30일 사민주의정당 및 정치조직들의 국제연대기구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에 자문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공화터키당은 2005년 1월에 실시된 북키프러스 총선에서 득표율 44.5%로 총의석 50석 가운데 24석을 차지하여 원내 다수당으로 되었고, 2005년 4월 17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 공화터키당 후보로 출마한 탈랏은 득표율 55.8%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였다.

키프러스의 통일과정은, 진보적 정권교체가 실현될 때 비로소 평화통일의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는 동력이 진보정권을 지지하는 인민에게서 나온다는 진리가 이 땅에서도 구현될 그날은 언제일까? (2008년 11월 17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