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의 등장과 백악관의 대북관계 복원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잃어버린 8년’의 기억

여느 해처럼 세밑 분위기가 흥성이던 2000년 12월 중순, 미국 워싱턴 디씨 근교 버지니아주 맥클린에 있는 어느 저택에서 만찬을 나누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저택은 당시 대통령 당선인 부시가 국무장관으로 지명한 콜린 파월(Colin L. Powell)의 집이었다.

파월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지명된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를 그 만찬자리에 불렀다. 정권의 인수인계로 분주하던 그 해 연말,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국무장관 지명자와 흑인 국가안보보좌관 지명자에게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 추진정형을 설명하기 위해 그들을 만난 사람들이 있었다. 클린턴 정부 말기에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K. Albright)의 참사(counselor)로 일하고 있었던 웬디 셔먼(Wendy Sherman) 일행이었다.

국무장관 지명자와 국가안보보좌관 지명자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대북정책 추진정형에 관해 설명을 듣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이례적인 만찬은, 당시 정권교체기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게 대북정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례적인 만찬에 함께 있었던, 이름을 밝히지 않은 대북정책 담당관리를 취재하여 〈뉴욕타임스〉 2000년 12월 29일자에 관련기사를 썼던 언론인 데이빗 생어(David E.Snger)에 따르면, 파월과 라이스는 대북정책 추진정형에 관하여 셔먼 일행에게 “질문을 많이 하였고,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어하였”으며, “클린턴이 아직 대통령직에 있으므로 평양을 방문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그 자신이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그 이상의 조언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에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 상원의원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 역사에서 최고위직에 오른 것으로 기록된 흑인 고위관료들인 파월과 라이스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대북정책이 부시의 집권기간 동안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어림잡지도 못한 채, 셔먼 일행이 전해주는 고급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데이빗 생어의 관련기사가 〈뉴욕타임스〉에 보도된 2000년 12월 29일, 클린턴 대통령(당시)은 백악관 출입기자들에게 북측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중지시키는 정치협상을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임기 중에 추진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평양을 방문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고 말했다. 그가 평양방문 계획을 취소하였다고 발표한 것은, 북미(조미) 관계정상화라는 최대 정치과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계기를 살리지 못하게 되었음을 뜻하였다.

클린턴 대통령은 백악관 출입기자들에게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평양을 방문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처럼 에둘러댔으나,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데이빗 생어의 관련기사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당선인 부시의 참모진과 공화당 중진인사들이 클린턴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자기들의 손을 묶어버릴 합의를 내오면 아니 된다고 경고하였다”는 것이다. 생어는 ‘경고하였다’고 강도를 낮춰 표현하였지만, 강하게 반대하였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되었을 것이다.

명백하게도, 북미(조미) 관계정상화를 실현하는 결정적 계기인 미국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가로막은 사람들은, 부시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권력의 중심권에 들어선 극우파 관료집단이었다. 미국 언론은 그들을 새로운 보수파라는 뜻으로 한때 ‘네오콘’이라 불렀으나, 그들에게 어울린 것은 ‘어떤 가치를 옹호하고 지킨다’는 뜻으로 쓰는 보수파라는 호칭이 아니라 독재와 전쟁과 횡포 따위의 망나니짓을 일삼는 극우파라는 악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장악한 극우파 관료집단은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을 파탄으로 몰아갔다. 이를테면, 2003년 8월 25일부터 28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열렸던 제1차 6자회담에서 북측 협상대표와 미국측 협상대표는 회담장 한쪽 구석에 놓인 안락의자(sofa)에서 잠깐 얼굴만 비치고 헤어졌고, 2004년 2월 25일부터 28일까지 베이징에서 열렸던 제2차 6자회담에서는 의자와 탁자도 없는 휑뎅그렁한 방에서 선 채로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가 나가버렸으며, 뒤이어 6월 23일부터 26일까지 베이징에서 열렸던 제3차 6자회담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가시돋친 말을 나누고 이내 등을 돌렸다.

극우파 관료집단은, 〈워싱턴포스트〉 2003년 12월 7일자에 나온 표현을 빌리면, “정치적, 경제적 압력을 가하여 평양 정부를 항복시키거나 붕괴시키기를 바라고”있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항복과 붕괴는 그들이 바라던 희망사항이 아니라 그들이 달성하려는 목표였다. 극우파 관료집단이 자기들의 목표를 달성해보려고 몸을 움직일수록 한반도의 정세는 험악해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미국 군부는 미국군유해발굴단을 북측에서 철수시키고, 북측을 위협하는 전쟁계획들인 ‘작전계획 5026’, ‘작전계획 5029’, ‘개념계획 5030’에 관한 정보를 미국 언론에 흘려주고, 스텔스 전폭기 편대를 주한미국군 기지에 배치하면서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였고, 중국 정부에게 북측에 대한 석유공급을 끊어버리라고 요구하면서 북측을 자극하였다. 이것은 2005년 1월 초부터 5월 말까지 기간에 집중되었던 대북압박공세였다.

북측과 대화하거나 협상하기를 거부하고 북측을 항복시키거나 붕괴시킬 생각만 하는 극우파 관료집단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좌우하였으니, 미국 대통령의 평양방문은 꿈도 꿀 수 없었고, 클린턴 정부 시기에 진행된 북미(조미) 양자정치회담에서 공약한 관계정상화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되었다. 한때 대통령의 평양방문계획까지 토의하였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그들의 망나니짓에 휘둘려 대북접촉을 전면 중지하였고, 부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원색적으로 모욕하는 발언을 이따금씩 토해내고 있었다.

대외정책에 관해서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부시를 앞에 내세운 극우파 관료집단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좌우했던 2001년 이후 8년의 세월은, 북미(조미)관계에서 그야말로 ‘잃어버린 8년’이었다.

8년을 기다려온 친서

‘잃어버린 8년’의 건너편에 남아있는 오래된 기억은 새삼스럽게 낙관적으로 보인다. 2000년 한 해 동안 ‘역사상 최초’라는 수식어로 눈부시게 장식된 긍정적인 변화들이 줄이어 일어났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를테면, 역사상 최초로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고, 6.15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역사상 최초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가 백악관을 방문하여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역사상 최초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서가 미국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역사상 최초로 북미(조미) 관계정상화를 공약한 공동성명이 워싱턴에서 발표되었다. 역사상 최초로 미국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그리고 역사상 최초로 미국 대통령의 평양방문이 준비되었다.

이처럼 2000년 6월부터 12월까지 여섯 달 동안 잇달아 일어난 역사적 사변들은 바야흐로 정세변화의 정점을 향해서 오르고 있었으니, 그 정점은 미국 대통령의 평양방문과 북미(조미) 정상회담이었다.

역사상 최초로 북미(조미)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언급한 외교문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워싱턴을 방문한 북측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조명록 공화국 차수가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함께 2000년 10월 12일에 발표한 북미(조미) 공동성명(DPRK-US Joint Communique)이다. 공동성명의 두 번째 문장은 이렇게 되어 있다. “방문기간 국방위원회 김정일 위원장께서 보내시는 친서와 조미관계에 대한 그이의 의사를 조명록 특사가 미합중국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는 무슨 내용이 들어있었을까? 국가수반의 친서를 공개하지 않는 외교관례 때문에 친서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당시 북미(조미) 두 나라가 관계개선을 급진전시키고 있었던 분위기를 보면, 미국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조명록 특사가 미국 국무부 청사에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회담한 직후, 방문기간 내내 입고 있었던 일반정장을 국장(國章)이 들어있는 특대성(特大星)이 번쩍이는 조선인민군 차수 정복으로 갈아입고 백악관에 들어가 클린턴 대통령과 40분 동안 회담한 때는 2000년 10월 10일 오전이었다. 마침 그 날은 북측에서 조선로동당 창건 55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국가적 행사가 열린 날이기도 하다.

조명록 특사와 그 일행이 워싱턴에 도착한 때는 10월 9일 밤이었고, 조명록 특사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서를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한 날은 10월 10일 오전이었고, 북미(조미) 공동성명이 발표된 날은 10월 12일이었으므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서에 들어있는 미국 대통령 초청제안을 토의하고 결정할 시간적 여유는 10월 11일 하루밖에 없었다. 미국 대통령의 평양방문은 대통령이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토론을 거쳐 공식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친서에서 밝힌 대통령 초청의사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당시 한껏 고조되고 있었던 관계개선 분위기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공동성명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미국 대통령 초청제안을 수락하였음을 맨 마지막 문장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김정일 위원장께 월리엄 클린턴 대통령의 의사를 직접 전달하며 미합중국 대통령의 방문을 준비하기 위하여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가까운 시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결정한 대통령의 평양방문은 정권교체기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편승한 극우파 관료집단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주목하는 것은, 극우파 관료집단이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가로막기는 하였지만, 북미(조미) 공동성명까지 파기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1994년에 발표된 북미(조미) 기본합의를 파기하였지만, 2000년에 발표된 북미(조미)공동성명까지 파기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대통령의 평양방문에 관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결정도 무효화된 것이 아니라 차기 정부에게 넘겨졌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물론 2001년 1월 20일 이후 극우파 관료집단이 장악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대통령의 평양방문에 관한 결정을 넘겨받지 않고 무시함에 따라 그 결정사안은 망각되었고, 그렇게 어언 여덟 해가 속절없이 흘러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결정사안 자체가 무효화된 것은 아니다. 북미(조미) 공동성명이 파기된 것이 아니라 잊혀진 것처럼, 미국 대통령의 평양방문에 관한 결정도 무효화된 것이 아니라 잊혀진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미국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서는, 초청제안을 받아들일 새 대통령의 등장을 기다려온 것이다.

공동성명의 문항들 가운데 중시해야 할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명록 특사를 통해 클린턴 대통령에게 북미(조미)관계에 대한 자신의 의사(views)를 전했다고 기록한 문항이다.

특사를 통해 미국 대통령에게 전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뜻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조명록 특사가 클린턴 대통령을 면담한 내용이 공개되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당시 북측과 미국이 관계개선을 급진전시키고 있었던 정황을 보면, 정상회담에서 양자현안을 일괄타결하자는 뜻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만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양자현안을 정상회담에서 일괄타결하자는 뜻을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하지 않았다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결정한 까닭은, 복잡하게 얽힌 양자현안을 정상회담에서 일괄타결하는 방안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정상회담에서 담판하는 식으로 양자현안을 일괄타결하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제안에 동의를 표명한 것이었다.

8년 전에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서도 아직 유효하고, 그에게 전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뜻도 변함이 없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이 개편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8년 전 친서가 아직 유효하고 그의 뜻이 변함없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머지않아 북측의 고위급 특사가 워싱턴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대북관계는 정책계승에서 복원된다

이번에 미국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은 2004년 11월부터 연방의회 상원의원직을 수행해온 터라 외교경험도 없고, 외교정책에 관한 식견도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외교경험과 외교정책에 관한 식견이 풍부한 연방의회 상원의원 조셉 바이든(Joseph R. Biden, Jr.) 외교위원장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오바마와 바이든의 그러한 관계는, 앞으로 바이든 부통령 당선인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외교정책 결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물론 새로 지명될 국무장관이 외교정책 총책임자로 되지만, 연방상원에서 으뜸가는 외교전문가로 통하던 바이든 상원의원이 부통령직을 맡았으니, 신임 국무장관이 그의 의견을 지나쳐버릴 수 없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바이든 부통령 당선인은 한반도정책에 관해서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온 상원의원이다. 이를테면, 그는 2003년 7월 24일 연방상원 러셀의원회관에서 미주동포전국협회(NAKA) 주최로 열린 ‘코리아 평화 포럼’에 당시 유엔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특명전권대사로 재직하던 박길연 외무성 부상과 함께 참석하여 비핵화문제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 적이 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양을 방문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난 8월 23일 부통령 후보에 지명되는 바람에 평양방문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바이든 부통령 당선인이 그처럼 한반도정책에 관해서 남다른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던 데는, 동아시아 외교정책과 관련한 그의 의정활동을 오랫동안 보좌해온 실무책임자 프랭크 저누치(Frank Jannuzi)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저누치 보좌관은 이번에 오바마 선거운동본부 동아시아정책자문단의 코리아정책 총책임자로 선임되었는데, 선거기간 중에 오바마 후보를 지지하는 재미동포들이 워싱턴과 뉴욕에서 주최한 세 차례의 행사에 참석하여 오바마 선거운동본부의 코리아정책기조를 해설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는 11월 7일 전국외교정책협의회(NCAFP)가 뉴욕에서 주최한 한반도정책 토론회에서 북측 외무성 리근 미국국장을 만났다. 리근 국장과 저누치 보좌관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만나 서로 잘 아는 사이이다. 북측 외무성은 오바마 후보가 대통령이 당선된 날에 맞춰 리근 국장을 미국에 보냈다.

저누치 보좌관과 함께 오바마 선거운동본부의 코리아정책 자문활동에 참여한 사람은 케네스 퀴노네스(C. Kenneth Quinones), 조엘 위트(Joel S. Wit), 토머스 허버드(Thomas Hubbard), 도널드 그렉(Donald P. Gregg)이다. 퀴노네스와 위트는 클린턴 정부 시기에 진행된 북미(조미) 기본합의 체결과정에 실무핵심으로 참가하였던 국무부 관리 출신이고, 허버드와 그렉은 주한미국대사 출신이다.

오바마 선거운동본부의 코리아정책 자문활동에 참여한 인사들은 한결같이 대북정치협상을 중시하는 공통점을 지녔다. 이러한 분위기는 2009년 1월 20일에 출범할 오바마 정부가 정치협상을 통하여 대북관계를 복원할 것임을 예고한다.

중요한 것은, 북미(조미) 공동성명이 오바마 정부가 대북관계를 복원하는 정책적 근거로 될 것이라는 점이다. 만일 오바마 정부가 북미(조미) 공동성명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근거로 하여 대북관계를 복원하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 까닭은, 대북관계를 복원시킬 수 있는 정책적 근거가 공동성명 이외에 없기 때문이며, 또한 북측이 공동성명을 대미관계를 복원하는 정책적 근거로 삼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러하다. 지난 8년 동안 극우파 관료집단이 뒤틀어놓은 북측과 미국의 관계는 북미(조미) 공동성명을 정책적 근거로 하여 복원될 것이다.

오바마 정부의 대북관계 복원이라는 개념은 정책적 계승이라는 뜻으로 이해되는 개념이다. 정책적 계승이란 정상회담 준비를 가로막고 양자회담을 6자회담으로 바꿔놓은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한다는 뜻이 아니라, 고위급 양자회담을 거쳐 정상회담 준비단계에까지 나아간 클린턴 정부의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계승한다는 뜻이다. 오바마 정부는 새로운 대북정책을 제시할 필요가 없으며, 클린턴 정부의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계승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계승이 반복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 계승이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을 그대로 반복할 수 없는 까닭은, 2009년의 핵확산 정세가 2000년도의 핵확산 정세에 비해 너무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오바마 정부는 전혀 달라진 국제정세 속에서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하게 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핵확산 정세의 변화란, 구체적으로 말해서 북측이 핵보유국으로 등장하였고, 이란이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시각에서 볼 때, 한반도를 비핵화하지 않으면, 이란의 핵개발을 막을 수 없고, 북측이 핵보유국으로 등장한 조건에서 이란마저 핵개발에 성공하면 핵확산금지체제는 붕괴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우선적으로 한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최근에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가 북측 핵문제의 해결을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한 것은 일면 타당하게 보인다.

지난 시기 클린턴 정부가 추진한 비핵화는 북측의 핵개발을 중지시키는 것이었지만, 새로 출범할 오바마 정부가 추진하는 비핵화는 북측이 보유한 핵무기를 폐기시키는 것이다. ‘잃어버린 8년’ 동안에 비핵화의 내용이 달라진 것이다. 오바마 정부는 핵보유국을 상대로 비핵화를 추진해야 하는 버거운 짐을 지고 있다.

클린턴 정부는 북측의 핵개발을 중지시키기 위해 북측에 경수로 두 기를 건설해주기로 공약하였는데, 이제 오바마 정부가 북측의 핵무기를 폐기시키려면 경수로 건설보다 훨씬 더 비중이 큰 공약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오바마 정부가 경수로 건설보다 훨씬 더 비중이 큰 공약을 내놓아야 한다는 말은, 북측이 오바마 정부에게 경수로 건설보다 훨씬 더 큰 공약을 요구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북측이 오바마 정부에게 요구할 ‘최대의 공약’은 무엇일까? 그 ‘최대의 공약’을 담판식으로 합의할 역사적인 자리가 바로 북미(조미) 정상회담이다.

미국 대선기간에 오바마 후보가 내건 참신한 선거구호는 변화(change)였다. 극우파 관료집단의 망나니짓에 질려버린 미국 유권자들은 변화를 외치는 젊고 패기만만한 흑인 대통령 후보에게 매혹되었다. 당선이 확정된 시각, 오바마 후보는 20만 지지자들이 열광하는 시카고 도심의 그랜트 공원 광장에 놓인 단상에서 “미국에 변화가 왔노라(Change has come to America)”고 외쳤다. 그가 외친 ‘미국의 변화’는, 대북관계를 복원하는 변화로 이어지게 될까?

2002년 11월 평양을 방문한 미국 존스합킨스대학교 교수 돈 오버도퍼(Don Oberdorfer)와 뉴욕의 코리아협회(Korea Society) 회장(당시) 도널드 그렉은 북측 정부로부터 받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서를 백악관에 전하였다. 친서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때에 조미관계에서도 현 위기가 극복되고 새로운 장이 열리기를 바라는 바입니다”고 지적하였다. ‘긍정적인 변화’를 바란다는 점에서, 그의 생각과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의 생각은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낸 친서의 마지막 문장은 “미국이 용단을 내리면 우리도 그에 맞게 대응해 나갈 것입니다”고 되어있다. 한반도의 ‘긍정적인 변화’는 “변화가 왔노라”고 외친 미국의 새 대통령이 용단을 내릴 때 일어날 것이다. (2008년 11월 10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