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 제2단계의 ‘시간표’를 읽는 법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매우 중대하고 획기적인 사변

2008년 10월 11일 미국 국무부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북측을 테러지원국 지정명단에서 삭제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 발표가 나오자, 미국의 우익정치세력은 “미국의 치욕”이라느니 “매우 나쁜 선례를 남겼다”느니 하면서 심하게 반발하였다. 일본의 우익정치세력도 그에 못지않게 반발하였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속으로는 심하게 반발하였겠지만,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지라 겉으로는 반대의사를 드러내지 못한 채 끙끙거리며 속앓이만 하였다.

남측의 ‘북한전문가’들은 테러지원국 지정해제 이전이나 이후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반응은 북측이 테러지원국 지정명단에서 삭제된 것과 리비아가 그 명단에서 삭제된 것을 혼동한 것이다. 테러지원국 지정해제와 비핵화 추진과정이 서로 무관하였던 리비아의 경우에는, 테러지원국 지정해제 이후에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지만, 비핵화를 추진하고 있는 북측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북측의 테러지원국 지정해제가 한반도 비핵화의 추진일정과 떼어놓을 수 없게 맞물려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북측을 테러지원국 지정명단에서 삭제한 것이 삭제하지 않은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하찮은 외교사안이라면, 2008년 6월 26일 미국 대통령 부시가 왜 직접 나서서 테러지원국 지정명단에서 북측을 삭제하겠노라고 발표하였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또한 8월 11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왜 지정해제공약을 파기하여 한때 북측과 미국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비핵화 과정을 파탄위험에 몰아넣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만일 테러지원국 지정해제가 하찮은 외교사안이라면, 북측이 왜 20년이 넘도록 지정해제를 요구해왔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또한 한반도 비핵화 과정에 왜 지정해제를 포함시켰는지도 설명하지 못하며, 또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지정해제공약을 파기하였을 때 북측이 왜 영변 핵시설 불능화 작업을 중지하고 지하핵실험을 준비하는 그야말로 초강경한 대응조치를 취한 까닭을 설명하지 못한다.

『워싱턴포스트』 2008년 10월 12일자 기사에서 짤막하게 언급하고 넘어갔을 뿐,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북측의 초강경한 대응조치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지정해제공약을 파기한 엄중한 사태에 대응하여 북측이 지하핵실험을 실제로 준비한 대응조치를 말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8월 중순부터 50일 동안 비공개로 지도하였던 사업이 바로 그 대응조치였다. 이에 관해서는 『월간 말』에 기고한 나의 글에서 자세히 논하였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명백하게도, 테러지원국 지정해제는 북측과 미국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남북관계와 한미관계에서도, 그리고 더 나아가 한반도를 중심에 놓고 전략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동북아시아 정세에서도 매우 중대하고 획기적인 사변이다.

그런데 한반도의 비핵화 문제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결렬위기에 빠졌던 6자회담을 되살리고 영변 핵시설 불능화 작업을 재개시켰다는 점에서, 테러지원국 지정해제가 의의를 가진다고 보면서도, 그에 관련된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한 듯하다.

한반도 정세를 바꿔놓을 테러지원국 지정해제의 의미를 6자회담의 틀 안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시야를 넓혀 북측과 미국의 관계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철군이 관계정상화의 방도로 되는 까닭

테러지원국 지정해제가 북측과 미국의 국가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된다는 점에서, 그 해제조치의 정치적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북측을 테러지원국 지정명단에서 삭제한 것은 미국의 대북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의사표시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테러지원국 지정해제를 통하여 미국의 대북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면서도 그 관계를 정상화하는 실제행동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게 된 까닭은 북측과 미국의 관계가 테러지원국 지정해제만으로는 풀 수 없을 만큼 적대관계로 굳어져버린 탓이다.

북측의 논리에 따르면, 북측과 미국의 관계는 정전협정에 의해서 교전을 중지하였으면서도 주한미국군이 남측을 점령하고 있는 적대관계이다. 남측에서는 주한미국군이 주둔한다고 말하지만, 북측에서는 주한미국군이 “남조선을 강점하였다”고 말한다. 주둔이라는 개념과 강점이라는 개념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 커다란 차이가 있다. 북측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주한미국군은 주둔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다.

북측이 주한미국군을 점령군으로 규정한 까닭은, 우리나라의 남측과 북측 두 지역에 각각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하는 두 정부가 세워졌으나, 그렇다고 해서 나라마저 둘로 갈라질 수는 없고, 실제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치적 확신을 가진 북측은, 우리나라 영토인 남측에 아무런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북측에 있는 자기들을 군사적으로 위협하는 외국군이야말로 점령군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말하는 것이다. 시리아가 자국 영토인 골란고원을 강점하고 자기들을 위협하는 이스라엘군을 적대하면서 하루빨리 점령군을 철군시키고 골란고원을 되찾으려는 것처럼, 북측도 우리나라 영토의 절반을 ‘강점’하고 자기들을 위협하는 미국군을 철군시키고 나라를 통일하려고 한다. 남측과 미국의 관계에서 합법화된 주한미국군 주둔이, 북측의 대미관계에서는 불법화되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북측의 논리에 따르면, 북측과 미국의 현존 관계는 주한미국군이라는 점령군에 의해서 유지되는 적대관계이다. 따라서 북측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점령군을 철군하지 않으면 두 나라 사이의 적대관계가 해소될 수 없다고 믿고 있다.

북측과 미국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양국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주한미국군 철군 결정을 내리는가 혹은 내리지 않는가에 달려있다. 명백하게도, 주한미국군 철군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미국의 대북관계를 정상화하는 유일한 방도이다. 철군 없는 관계정상화는 있을 수 없다는 뜻에서, 철군과 관계정상화는 한 물체의 앞뒷면과 같다.

그들에게 양자택일의 선택권은 없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미국의 대북관계를 정상화하는 문제를 생각하면서도, 주한미국군을 철군하는 문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2008년 10월 17일 미국 국방부 청사에서 열린 제40차 한미안보협의회(SCM)가 발표한 공동성명에 따르면 “게이츠 장관은 2008년 4월 19일 캠프 데이빗 정상회담에서 맺은, 주한미국군 병력을 현 수준으로 유지하기로 한 한미정상의 공약을 재확인하고 이를 이행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미국의 대북관계를 정상화하는 문제와 주한미국군을 철군하는 문제를 서로 떼어놓고, 전자만 생각하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분리적 사고는 현실을 오판한 것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그러한 분리적 사고를 오판이라고 보는 근거는, 1970년대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미국의 대중관계를 정상화한 역사적 경험에서 찾아낼 수 있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대만에 미국군을 그대로 주둔시키면서 미국의 대중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들에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였겠지만, 그들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은 불가피하였다. 그들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한다면, 대만주둔 미국군을 유지하는 낡은 군사전략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의 대중관계를 정상화하는 새로운 외교전략을 택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었다. 역사적 경험은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실제로 새로운 외교전략을 택하였음을 말해준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낡은 군사전략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외교전략을 택한 것이 합리적으로 되는 까닭은, 대만주둔 미국군을 철군함으로써 미국이 잃는 군사적 이익보다 미국의 대중관계를 정상화함으로써 미국이 얻는 외교적 이익이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오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주한미국군을 유지하면서 미국의 대북관계를 정상화하려는 실현불가능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들에게는 주한미국군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미국의 대북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주한미국군을 철군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의 대북관계를 정상화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선택권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들은 미국의 대북관계를 정상화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정상화해야 하며, 그 관계를 정상화하려면 반드시, 불가피하게,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주한미국군을 철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명백하게도, 오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대만주둔 미국군 철군이냐 아니면 미국의 대중관계 정상화냐 하는 양자택일의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던 1970년대와 다른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렇게 된 까닭은 아래와 같이 설명된다.

만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주한미국군을 영구히 유지하려고 고집을 피우면서 북측의 관계정상화 제안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이 북측의 관계정상화 제안을 거부하는 경우, 2003년 8월 27일에 시작되어 다섯 해 동안이나 진전되어온 6자회담은 파탄될 것이고, 이미 제2단계로 접어든 한반도 비핵화는 중단될 것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외교관례를 무시하거나 국제협약을 이행하지 않는 것으로 하여 악명이 높은 만큼, 그들이 자기들의 악습대로 6자회담이 파탄되고 한반도 비핵화가 중단되는 엄청난 외교손실을 감수하면서, 이제껏 추진해온 6자회담이나 한반도 비핵화는 없었던 것으로 여기고, 외교적 실패의 곤경을 어물쩍 넘길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단견이다.

6자회담이 파탄되고 한반도 비핵화가 중단되는 경우, 북측이 손을 놓고 조용히 물러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판이다. 북측은 6자회담을 파탄시키고 한반도 비핵화를 중단시킨 정치적 책임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게 묻는 압박공세를 가할 것이다.

북측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게 가할 압박공세는 영변 핵시설 재가동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하핵실험으로까지 확대될 것이다. 지하핵실험은 핵보유국의 정당한 주권행사에 속하므로, 핵보유국인 북측이 지하핵실험을 실시하는 것을 억제할 국제법적 근거는 누구에게도 없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북측의 지하핵실험을 억제할 방도는 무력제재밖에 없는데, 대북 무력제재는 전면전을 각오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러지 않아도 미국식 자본주의가 파산하여 전세계가 혼란에 빠진 조건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전면전을 일으킬 가능성은 영에 가깝다. 그것만이 아니라,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같은 전략무기를 보유한 군사강국인 북측을 상대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전면전을 일으킬 가능성 역시 영에 가깝다.

그러므로 북측이 지하핵실험이라는 대미 압박수단을 쥐고 있는 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미국의 대북관계를 정상화하고 주한미국군을 철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이 테러지원국 지정해제 공약을 어느 날까지 이행하겠다고 공식 발표문을 내놓고서도 그 공약을 이행하지 않고 넘어가려 하다가, 북측이 지하핵실험 준비에 들어간 정보를 파악하고 위기의식에 사로잡힌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어쩔 수 없이 지정해제 공약을 이행한 것은, 북측이 자기의 주한미국군 철군 요구를 관철시킬 지하핵실험이라는 결정적인 대미압박수단을 갖고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비핵화 제2단계에서 내려야 할 정치적 결단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주한미국군이 철군하면 ‘북한의 남침위험’이 증대될 것이라고 강변하며 펄쩍 뛰겠지만, 남측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의사가 북측에게 없음은 명백하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북측이 남측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경우 자신을 포함하여 한반도 전체가 전쟁참화로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는 멀쩡하고 상대만 파괴할 수 있는 일방적인 전쟁승리는, 적어도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남침위험설을 조작된 신화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미일동맹군과 연계된 한미연합군에 대해서 조선인민군이 단독으로 맞서는 불균형한 대치관계에서는 군사적 긴장도가 높아지기 마련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북측을 상대로 전면전을 일으키지 못하는 대신, 미일동맹군과 연계된 한미연합군을 동원하여 대북군사압박전략을 계속 밀고 나가면서 한반도 군사정세를 긴장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주한미국군은 한미연합군과 미일동맹군을 연결해주는 ‘핵심고리’이다.

그런데 주한미국군을 철군하면, 한미연합군과 미일동맹군을 연결해주는 ‘핵심고리’가 없어지는 것이므로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 크게 완화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동북아시아 전반에서 분쟁위험이 줄어들 것이다.

주한미국군이 한미연합군과 미일동맹군을 서로 연결한 대북군사압박전략을 꺼내들고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평화통일을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장애를 조성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주한미국군을 철군하는 것은 평화통일의 길에 커다란 장애를 조성해온 무력집단이 사라지는 것이므로, 주한미국군 철군을 매개로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통일이 직통되는 것이다. 주한미국군을 철군하는 문제는 일반적인 의미의 평화군축문제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비핵화와 평화통일을 직통으로 연결하는 문제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1970년대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영변 핵시설 건설을 추진하던 무렵, 영변 핵단지 안에는 “핵으로 통일의 대문을 열자!”는 구호가 걸렸다고 한다. 이미 비핵화 과정에 들어선 현재 상황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비핵화와 평화통일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판이니, 30여 년 전에는 그 구호가 오죽 낯설게 보였을까! 그러나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오늘, 테러지원국 지정해제라는 역사적 사변을 통해서 비핵화와 평화통일이 주한미국군 철군을 매개로 직통된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한반도의 비핵화 문제에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여러 정치세력들은 비핵화를 평화통일로 연결해주는 주한미국군 철군 문제를 둘러싸고 제각기 상충되는 견해와 주장을 내놓고 있다. 미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측에서도 그러하다. 중국과 일본에게도 제각기 다른 속셈이 있다.

여러 정치세력들의 상충적인 이해관계를 누군가 원만히 조절하여 주한미국군 철군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는 공상이다. 주한미국군을 철군하는 문제는 상충적인 이해관계를 조절해서 풀 수 있는 일반적인 외교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결단으로만 풀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정치문제이다.

1970년대에 닉슨과 키신저가 정치적 결단을 내려 대만주둔 미국군을 철군하는 문제를 풀었던 것처럼, 한반도를 비핵화하는 어느 단계에 이르렀을 때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주한미국군을 철군하는 문제를 푸는 정치적 결단을 내리게 될 단계는, 테러지원국 지정해제 이후에 전개되는 비핵화 제2단계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한반도를 비핵화하는 제2단계의 어느 경과시점에서, 주한미국군을 철군하는 문제를 푸는 정치적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2009년 1월에 출범하게 될 미국의 차기정부는 2012년까지 이어질 임기 4년 안에 주한미국군 철군 문제를 푸는 정치적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국의 차기정부가 내릴 정치적 결단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이다. 지금 진행하는 것처럼 차관보급이 나서는 양자협상은 한계가 너무 뻔한 저급협상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만나 최고위급 협상을 진행할 정상회담만이 전략적 이해관계가 난마처럼 엉킨 주한미국군 철군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 수 있다. 다른 방도는 보이지 않는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시각으로 보면, 닉슨식 정상회담 개최와 키신저식 철군 약속이 북측과 미국 사이에 가로놓인 최대의 정치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국군 철군 문제를 푸는 합의에 이른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주한미국군이 철군하는 것은 아니다. 철군과정은 국교수립과정 및 평화체제수립과정과 연동되기 때문에 상당한 절차와 준비를 요구한다.

북측과 미국의 두 정상이 만나면 반드시 관계정상화와 철군을 합의할 것이다. 두 정상은 관계정상화에 관한 합의를 공개적으로 진행하겠지만, 철군에 관한 합의는 그 사안의 민감성을 고려하여 비공개로 진행할 것이다. 1970년대에 중국과 미국도 철군협상을 비공개로 진행하였다.

‘철군 시간표’와 두 정상의 일괄타결

한반도를 비핵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복잡하고 예상치 못한 문제들을 푸는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북측의 최고의결단위는 국방위원회이다. 한반도를 비핵화하는 문제는 국가주권문제이며 가장 중대한 군사문제이므로, 북측 헌법 제100조에 규정된 대로 “국가주권의 최고군사지도기관”인 국방위원회가 비핵화 과정을 지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핵화 과정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는 단위가 국방위원회라면, 비핵화에 관련하여 실무를 집행하는 단위는 관련부서 전문가들로 구성된 ‘비핵화 상무조’일 것이다. 한반도를 비핵화하는 문제는 ‘비핵화 상무조’에서 작성하고, 국방위원회에서 토의하고, 국방위원장이 결정한 전략과 방침을 국방위원장의 ‘친필지시’로 집행단위에 내려보내 추진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국방위원회는 한반도 비핵화를 무계획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추진한다. 한반도 비핵화를 계획적으로 추진한다는 말은 시간표가 작성되어 있고, 그 시간표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이다.

국방위원회의 시간표는, 단계별로 섬세한 추진일정이 담겼을 것으로 보이지만, 큰 줄거리를 들어내보면 대략 4단계가 돋보인다. 4단계 시간표란, 테러지원국 지정해제→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미국 차기 대통령의 정상회담→북측과 미국의 관계정상화→주한미국군의 단계적 철군으로 이어지는 ‘철군 시간표’이다.

테러지원국 지정해제를 완결한 제1단계는 제2단계로 나아가기 전에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단계였다. 다시 말해서, 테러지원국 지정해제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대북경제제재를 풀어주고, 북측은 그에 상응하여 자국 시장을 개방하기 위한 계기였던 것이 아니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미국의 차기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개최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예비단계였던 것이다.

4단계로 편성된 ‘철군 시간표’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단계는 제2단계이다. 제2단계에서 열릴 북측과 미국의 정상회담이 그 이후 제3단계와 제4단계를 추진하는 방향과 속도를 결정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는 2008년 11월 4일 대선에서 승리하여 2009년 1월에 취임할 미국의 차기 대통령을 직접 만나서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미국 대통령과 만나 문제해결의 돌파구를 열어놓으려고 생각해왔고, 그러한 생각을 직접 미국 대통령에게 알려주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클린턴은 임기말에 가서야 뒤늦게 평양방문을 계획하였다가 미국 정치권에서 반대파들이 발목을 잡는 바람에 주저앉았으며, 부시는 취임초기부터 아예 북측을 ‘악의 축’으로 비난하였고 클린턴 정부 시기에 합의해놓은 기본합의를 일방적으로 깨버렸다. 미국의 대북관계를 막무가내로 망쳐놓았던 부쉬는 2006년 10월 9일 북측이 지하핵실험을 실시하자 결정타를 얻어맞았고,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북측과 성의 있게 대화하기 시작하였으며, 임기말에 가서 북측을 테러지원국 지정명단에서 삭제하였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권에 거의 들어선 연방상원의원 버락 오바마(Barack Obama)가 당선되면 사정이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적절한 시기에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을 제의할 것이고, 오바마는 그 제의를 받아들일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오바마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오바마의 외교정책 보좌관들도 북측과 미국의 정상회담에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미국 대선에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연방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 조 바이든(Joseph R. Biden, Jr.)의 수석보좌관으로 오바마 선거본부에서 한반도 정책을 담당한 책임자인 프랭크 저누치(Frank Jannuzi)는 2008년 10월 2일 워싱턴 근교 애넌데일에서 오바마 후보를 지지하는 재미동포들이 주최한 모임에서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뒤에 “김정일 위원장이 만나자고 제의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였다. “그런 제의가 있으면 좋겠다. 오바마 후보는 조건 없이 외국 지도자들과 만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실질적인 성과를 내려면 매우 신중한 준비가 있어야 하고, 가장 먼저 한국과 그 문제를 상의해야 할 것”이다. 그보다 앞서, 2008년 9월 22일 미국 민주당 부통령 후보 조 바이든 연방상원의원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기만 하면 바로 움켜잡을 수 있는 북한의 미래”라고 말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미국의 차기 대통령을 만나는 정상회담에서 해결하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핵위험을 제거한다는 뜻으로 알려진 비핵화 문제이다. 한반도에서 핵위험을 제거하는 비핵화 문제를 달리 표현하면, 국방위원회가 정해놓은 주한미국군 철군 방안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정해놓은 북측의 핵포기 방안을 정상회담에서 일괄타결하는 문제이다.

주한미국군 철군 방안이란 모든 형태의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중지하는 것, 한반도에 ‘핵우산’을 제공한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대북 핵공격전략을 폐기하는 것, 한국군에게 전시작전통제권을 반환하는 것, 주한미국군을 철군하면서 한국군의 무력증강을 지원하지 않는 것 등을 포함한다.

다른 한편, 북측의 핵포기 방안이란 영변 핵시설을 폐쇄하고 핵물질을 폐기하는 것, 북측과 미국이 합의한 핵검증을 실시하는 것, 북측이 스스로 핵무기를 해체하는 것, 핵무기 운반수단인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비롯한 장거리미사일 개발을 중지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위와 같은 내용을 포함하는 주한미국군 철군 방안과 북측의 핵포기 방안이 정상회담에서 일괄타결되면, 북측과 미국의 관계는 급속도로 정상화되면서 주한미국군의 단계적 철군이 시작될 것이다.

‘철군 시간표’에 따르면, 북측이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고, 주한미국군의 단계적 철군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진척시키는 때는 2012년이다. 그에 따라 나라의 평화통일위업도 그 무렵에 대전환을 맞을 것이다. (2008년 10월 20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