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식 자본주의의 파산과 한반도 정책의 전환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시장에서 들리는 파열음

세계금융시장에서 주가폭락, 신용경색, 환율불안이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발표에 따르면, 2008년 10월 세계금융시장이 입은 손실은 1조4천억 달러이다. 세계거래소연맹(WFE) 발표에 따르면, 2007년 10월부터 2008년 9월까지 한 해 동안 세계증권시장에서 증발한 시가총액은 21조6천900억 달러이다. 같은 기간, 서울의 증권시장에서 증발한 시가총액은 308조 원이다.

붕괴위험을 직감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구제금융 7천억 달러로 금융시장 파열을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7천억 달러는 2007년도 미국 연방정부 재정수입의 3분의 1일에 해당하는 자금이며, 전세계 인류에게 100달러씩 나누어줘도 남는 액수이다.

그러나 파열강도는 더 높아져 금융시장 파산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앞으로 몇 달 안에 미국에서 117개 은행이 파산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을 내놓았다.

금융시장 구제계획(financial-market rescue plan)이란 정부가 금융시장에 쌓여있는 부실채권을 사들임으로써 파국을 피하는 마지막 조치인데, 부시 정부의 구제금융투입은 실패할 것으로 보인다. 두 가지 치명적인 위험요인이 있는 탓이다.

첫째, 부시 정부는 부실채권규모가 얼마인지 파악하지 못한 채 서둘러 구제금융을 투입하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부실채권규모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해야 한다. 구제금융 7천억 달러는 주로 주택융자(mortgage) 부실채권을 사들이는 것인데, 그 이외에 금융시장 파열을 막기 위해서 쏟아붓는 구제계획 자금총액은 1조8천억 달러이다. 그렇지만 금융시장 구제계획은, 비유로 말하면, 조그만 바가지로 물을 퍼서 밑빠진 커다란 독에 붓는 것이다. 파열음을 내는 금융시장을 살릴 안전한 대피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둘째, 미국 연방정부의 재정적자가 한계에 이르렀다. 2008년 현재 연방정부 재정적자 누적액은 9조6천340억 달러(1경1천16조 원)나 된다. 재정적자가 하루에 14억 달러씩, 1초에 100만 달러씩 끊임없이 늘어나는 것이다. 재정적자의 증가는 금융시장 구제계획의 손발을 묶는 족쇄이다.

금융시장 구제계획이 실패하는 경우 파국적 붕괴가 닥칠 것이 분명한데, 그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충격과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작동원리

빚더미에 깔린 미국 경제가 금방 무너질 것처럼 보이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까닭은, 세계 각국이 자국 제품을 미국 시장에 수출하여 벌어들인 달러로 미국 재무부가 찍어내는 국채를 사들이거나 미국 연방정부가 보증하는 채권을 사들이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정부가 달러를 마구 찍어내는데도 달러화 가치가 폭락하지 않는 까닭은, 세계 시장에서 쓰이는 기축통화(key currency)를 달러화로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정부는 내수시장의 통화공급요구에 따라 달러를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시장의 통화공급요구에 따라 달러를 찍어낸다. 따라서 세계시장규모가 늘어날수록 달러공급규모도 늘어나게 된다.

대미수출국들은 미국 시장에 수출한 대가로 기축통화를 받아가서 자국의 외환저장고에 쌓아놓을 뿐 아니라, 미국이 찍어내는 채권을 계속 사들인다. 만일 대미수출국들이 미국발 채권을 사들이지 않으면 달러화 가치가 폭락하여 기축통화가 사멸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세계외환시장이 무너지고 각국이 달러화로 보유한 자산이 증발할 것이므로 대미수출국은 끊임없이 미국발 채권을 사주어야 하는 것이다. 세계금융시장에 넘쳐나는 국채, 공채, 회사채를 모두 합한 총액의 30%에 해당하는 국채를 찍어내어 미국식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것이 미국 재무부이고, 정부보증채권을 찍어내어 막대한 이윤을 긁어모은 것이 투기금융자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미국식 자본주의는 무역수지적자와 채권판매로 유지된다. 연방정부 화폐제조국에서 찍어낸 기축통화로 대미수출국이 파는 각종 제품을 사들임으로써 미국은 무역수지적자를, 상대국은 무역수지흑자를 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2006년 한 해 동안 새로 늘어난 미국의 무역수지적자는 7천626억 달러이다. 무역수지적자가 1초에 2만4천 달러씩 늘어난 것이다.

대미수출국에서 저임금 노동력을 착취하여 만들어낸 ‘경쟁력 있는 제품’이 미국 시장에 팔려나가 3억 382만 명 미국인의 과소비를 촉진시키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대미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가지고 미국발 채권을 사들여 기축통화체계를 유지해주는 자본과 상품의 거대한 악순환, 바로 이것이 이명박 정권이 찬양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이며, 한국 경제가 절대적으로 의존해온 대미수출의 작동원리이다.

투기금융자본의 행태

미국식 자본주의의 파산은 투자은행(investment bank)의 파산으로 시작되었다. 투자은행은 투자라는 간판을 내걸고 실제로는 마구잡이식 투기에 몰두하여 천문학적인 이윤을 긁어모은 투기금융자본의 거점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투기금융자본은 그 거점에서 각종 파생상품(derivative)을 개발하는 신종투기수법으로 ‘떼돈벌이’에 열광하였다. 신종투기수법이란, 투기금융자본이 주택융자회사에서 주택융자를 사들여 그것을 담보로 새로운 증권을 만들어 금융시장에 내다 파는 수법이다. 이를테면, 100달러 짜리 자산이 여러 차례 복잡한 증권화과정을 거치면 400-500달러 짜리 파생상품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파생상품시장 규모는 2002년에 106조 달러였는데 2008년에는 531조 달러로 폭증하였다.

파생상품시장이 초대형 거품(super bubble)처럼 팽창하는 것에 정비례하여 주택시장도 비대해졌다. 이를테면, 미국의 대표적인 주택융자회사인 컨트리와이드 파이낸셜(Countrywide Financial Corporation)의 주가는, 1982년 이후 2007년까지 무려 2만3천%나 올랐다. 그 회사의 수익규모는 2002년에 183억 달러였는데, 2006년에는 327억 달러로 뛰어올랐다.

그렇지만 초대형 거품이 2006년부터 꺼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투기자본이 사놓았던 주택 60만 채가 매물로 쏟아져나왔다. 주택시장은 5천650억 달러의 손실을 입으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뉴욕 금융가에서 세계금융시장을 주무르며 활개치던 투기금융자본은 그렇게 파산하기 시작하였다.

투기금융자본이 활개칠 수 있었던 것은, 1981년 이후 미국의 역대정부들이 투기금융자본에 대한 규제를 풀고 신종투기수법을 허용해준 탓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규제철폐(deregulation)를 통하여 투기금융자본에게 ‘이윤추구의 무제한 자유’를 안겨주었고, 투기금융자본은 정치자금을 워싱턴 정가에 흘려보내 정권을 뒷받침해주었다. 연방정부 고위관리들과 뉴욕 금융가의 최고경영자들은 정책적으로나 인맥으로나 밀착되었다. 정권과 투기금융자본의 상호결탁을 특징으로 하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합리화해준 정치이념을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 한다.

파산한 미국식 자본주의

미국인의 과소비가 한계에 이르고 미국 시장이 위축되어 대미수출국의 무역흑자가 줄어들면, 그래서 대미수출국이 미국발 채권을 사주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투기금융자본이 파산하여 세계금융시장에서 자본과 신용의 흐름이 끊기면 어떻게 될까? 그러한 급변사태가 일어나면, 미국식 자본주의는 파산하는 것이다. 오늘 뉴욕 금융가의 참담한 현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미국식 자본주의는 30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파산하였다.

주목하는 것은, 미국식 자본주의의 파산이 뉴욕 금융가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파산은 세계금융시장을 붕괴위기에 몰아넣는 것은 물론,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식 자본주의를 전세계에 강요해온 신자유주의정권을 퇴장시킬 것이다. 요즈음 미국 대통령 선거전에서 차츰 대세로 굳어지고 있는 버락 오바마의 선전은, 돌발변수가 터져나오지 않는 한, 이번 대선에서 신자유주의정권이 패배할 것임을 예고한다. 미국식 자본주의를 열렬히 추종하는 이명박 정권도 파산대열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미국식 자본주의 파산과정은 앞으로 몇 해 동안 이어질 것이다. 그 파산과정은 <한겨레> 2008년 10월 10일자 기사에 나온 표현대로, ‘신자유주의 난민’이 급증하는 고통스러운 불안정과 혼란의 연속이다. 또한 미국식 자본주의의 파산으로 민심을 잃은 전세계 신자유주의정권들은 ‘신자유주의 난민’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파산과정이 마무리되는 2010년대에는 신자유주의세계화라는 말이 자취를 감출 것이며, 미국식 자본주의를 추종해온 전세계 신자유주의정권들이 줄줄이 퇴장하게 될 것이다.

1970년대와 오늘, 장기경제난의 정치적 의미

2008년 11월 4일에 실시될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되느냐 마느냐 하는 것과 상관 없이, 미국은 미국식 자본주의의 파산으로 장기경제난에 빠져들 것이다.

미국이 장기경제난에 빠진다는 말은 미국의 세계지배력이 위축된다는 뜻이다. 미국의 세계지배력이 위축되면, 일차적으로 군비지출을 줄이기 위해서 해외주둔병력과 해외군사기지를 줄이는 감군조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한반도는 미국의 차기정부가 해외주둔병력과 해외군사기지를 줄이는 감군조치를 시행할 대상들 가운데 제1순위에 오를 것이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1) 주한미국군은 아시아 대륙에 불안정하게 남아있는 유일한 미국군 병력이다. 주일미국군이 계속 일본에 남아있을 것이므로, 주한미군을 철군해도 동북아시아의 군사적 균형이 깨지는 것은 아니다.

2) 한반도를 비핵화하려면 미국이 북측과 관계를 정상화하여야 하는데, 관계정상화의 실현여부는 주한미군 철군문제에 달려있다. 주한미군을 철군하지 않고 한반도를 비핵화하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3) 한반도에서 불안정한 정전체제를 공고한 평화체제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에 정비례하여 주한미군은 주둔명분을 잃어버리고 있다.

미국의 차기정부가 한반도 정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꿀 것인지 미리 내다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지난 시기 장기경제난에 빠졌던 미국의 역대정부들이 한반도 정책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다시 짚어보면 정책전환방향을 예견할 수 있다.

미국이 장기경제난에 빠지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동아시아 정책을 전환한 것은 1970년대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1970년대의 정권교체를 살펴보면, 1969년 1월 20일부터 1974년 8월 8일까지 닉슨 정부가 통치하였고, 닉슨이 탄핵으로 중도에 물러나자 1974년 8월 9일부터 1977년 1월 19일까지 포드 정부가 통치하였고, 1977년 1월 20일부터 1981년 1월 20일까지 카터 정부가 통치하였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1970년부터 1981년까지 미국의 실업률은 9%, 인플레이션은 15%였다. 장기경제난에 시달린 닉슨 정부는 항공기제작회사 록히드 항공과 철도회사 펜 센트럴 철도에 구제금융을 투입하였고, 역시 장기경제난에 시달린 카터 정부는 자동차제작회사 크라이슬러에 구제금융을 투입하였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바꾸는 정책전환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이 1970년 2월 18일 연방의회에 보고한 외교특별교서에서 이른바 ‘새로운 평화전략(new strategy of peace)’을 천명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동아시아 정세를 바꾼 ‘새로운 평화전략’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새로운 평화전략’은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대만주둔 미국군을 철군하였다.

1971년 4월 14일 닉슨은 중국에 대한 경제제재조치를 완화하고, 중국과 인적 교류를 확대하는 것을 포함하는 다섯 개 항목의 새로운 중국 정책을 발표하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4월 16일 백악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닉슨은 중국 정부를 승인한다고 하면서,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는 것이 미국 정부의 장기목표라고 지적하고, 중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1971년 7월 9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가 비공개로 베이징에 가서 중국 총리 주은래와 비밀회담을 가졌다. 기밀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그 비밀회담은 미중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서 대만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대만문제란 대만주둔 미국군을 철군하는 문제이다.

비밀회담에서 주은래는 키신저에게 미국이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려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중국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인정하고, 대만을 본토에 귀속되어야 할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의 일부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미국이 대만을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의 일부로 인정하면, 미국은 대만주둔 미국군을 철군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미국은 자기 마음대로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에 미국군을 주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키신저는 단계적 철군방안을 꺼내놓았는데, 베트남 전쟁이 끝나는 것과 함께 대만주둔 미국군의 3분의 2를 우선 철군하겠다고 주은래에게 약속하였다. 관련문서들이 나중에 기밀해제되면서 세상에 공개되었는데, 키신저가 비밀회담에서 주은래에게 약속한 것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무조건 퇴각한다는 것, 그리고 대만주둔 미국군을 단계적으로 철군한다는 것이었다.

대만문제를 풀기 위한 협상이 진전되자 닉슨 정부는 관계정상화에 나섰다. 1972년 2월 21일 닉슨은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였다. 닉슨은 2월 27일 상해에서 주은래와 만나 ‘중화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 공동성명’에 서명하였다. 공동성명에는 1971년 7월 9일에 진행된 비밀회담에서 주은래가 받아낸 키신저의 약속이 이러한 문장으로 적혀있었다. “미국은 대만으로부터 모든 미국군과 군사시설을 철수하는 것이 종국적 목표임을 확인한다. 미국은 대만지역에서 긴장이 감소함에 따라 그 지역에 주둔하는 미국군과 군사시설을 점진적으로 축소할 것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대만주둔 미국군을 단계적으로 철군한다고 발표한 때는 1973년 8월 26일이었다.

1974년 8월 8일 ‘워터게이트 사건’에 걸려 탄핵을 받은 닉슨이 백악관을 떠나고, 제럴드 포드(Gerald R. Ford)가 후임으로 백악관에 들어갔다. 국무장관으로 진급한 키신저가 그 무렵에 작성하여 포드에게 보낸 1급 비밀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었다.

1) 1976년 중반까지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기 바란다고 중국 정부에 알렸다.

2) 대만에 배치한 유(U)-2기(고공비행 첩보기)와 핵무기를 1974년 안에 모두 철수하겠다고 중국 정부에 알렸다.

3) 포드 정부의 임기가 끝나는 1977년 1월까지 대만주둔 미국군을 완전히 철군하겠다고 중국 정부에 알렸다.

4) 주한미국군을 철군할 의사가 있음을 중국 정부에 알렸다.

비록 키신저가 포드에게 보고한 일정대로 실행되지는 않았으나, 미국은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였고 대만주둔 미국군을 완전히 철군하였다. 미국이 중국과 국교를 수립한 때는, 키신저가 포드에게 보고한 일정보다 2년 6개월이 늦어진 1979년 1월 1일이었다. 또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대만주둔 미국군의 단계적 철군을 완료한 때는, 키신저가 포드에게 보고한 일정보다 2년 3개월이 늦어진 1979년 4월 26일이었다.

다른 한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새로운 평화전략’은 미국군을 베트남전쟁에서 퇴각시켰다.

1971년 4월 27일 키신저가 닉슨에게 보낸, 기밀해제된 비망록에 적힌 내용은 충격적이다. 비망록에는 미국 정부가 북베트남 정부와 종전회담을 하든 말든 상관 없이, “우리는 결국 일방적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미국군을 철군할 것이다. 우리 입장은 남베트남에서 어떤 특정정부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남베트남 정부가 당신(포드를 가리킴)이 생각하는 것처럼 민심을 잃었다면, 우리 군대가 철군하는 즉시 그 정부는 무너질 것이다. 우리 군대가 철군한 뒤에 그 정부가 무너지더라도 우리는 다시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고 적혀있었다. 비망록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베트남전쟁의 수렁에서 무조건 빠져나오는 퇴각결정을 내렸음을 말해준다. 그에 따라, 키신저와 베트남노동당 정치국원 데둑토(Le Duc Tho)가 프랑스 파리 교외에 있는 어느 별장에서 만나 비밀회담을 시작한 때는 1972년 10월 8일이었다.

베트남전쟁의 수렁에서 하루라도 일찍 빠져나오기를 바랐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퇴각일정을 급진전시켰다. 1973년 1월 27일 미국 정부, 북베트남 정부,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가 프랑스 파리에서 ‘베트남 전쟁종식과 평화회복에 관한 협정’에 조인하였다. 그 협정 제4조는 “미국은 남베트남 내정에 대한 군사적 개입이나 간섭을 중지한다”고 명시하였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군이 퇴각하자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남베트남 정부가 무너지고 종전과 통일이 한꺼번에 실현되었다.

한반도에서 미완으로 끝난 ‘새로운 평화전략’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새로운 평화전략’은 한반도에서 주한미국군을 감축하고 남북정치회담 개최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주한미국군 감축조치나 남북정치회담에 나서라는 요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미동맹과 반북대결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던 박정희 정부에게 주한미국군 감축과 남북정치회담 개최는 정권기반을 뒤흔들 위험한 사태로 보였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부가 말을 듣지 않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주한미국군을 일방적으로 감축하면서, 박정희에게 남북정치회담에 나서라고 압박하였다. 1971년 2월 18일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전문 ‘미국이 남북대화에 더 많은 관심을 표명하기 위한 제안(Proposal for Increased Display of U.S. Interest in Dialogue between ROK and North Korea)’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북측과의) 직접접촉을 통한 긴장완화라는 방식을 (박정희 정부가) 받아들이도록 압박하려면 좀더 강한 수단이 요구된다. (줄임) 만약 한국 정부가 긴장완화를 위한 만족할 만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줄임) 우리가 북측과 비공식 대화통로를 찾아 나서겠다고 통고해야 한다.”

1971년 3월 닉슨 정부는 주한미군 제7사단을 전격적으로 철군하였다. 주한미군 6만6천 명 가운데 2만2천 명을 감군한 것이다. 일방적인 감군은 박정희 정부에게 커다란 압박이 되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박정희는 결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요구대로 남북정치회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1972년 4월 26일 박정희는 ‘특수지역 출장에 관한 대통령 훈령’을 중앙정보부 이후락 부장에게 하달하였다. 5월 2일 이후락이 3박4일 동안 평양을 방문하였고, 5월 29일에는 북측의 박성철 부주석이 2박3일 동안 서울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7월 4일 오전 10시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주한미국군 철군문제와 관련하여 닉슨 보다 한 걸음 더 나간 사람은 지미 카터(Jimmy Carter)이다. 그는 1975년 초 민주당 대선후보로 출마하면서 주한미국군 추가감군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는데, 그의 선거공약에 따르면 앞으로 4-5년 동안 주한미국군 3만2천 명을 추가로 감군하여 1만2천 명만 남겨두겠다는 것이다. 카터는 대통령에 당선되자 실제로 1977년 5월에 대통령령 제12호를 발표하여 주한미국군 감군계획을 실행에 옮기라고 지시하였다.

마침내 지름길이 열렸다

10년 장기경제난에 빠진 닉슨-포드 정부와 카터 정부가 동아시아 정책을 바꾸었던 때로부터 근 30년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동아시아 정세는 질적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에 미국의 적대국이었던 중국이나 미국의 교전국이었던 베트남은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였고, 베트남과 대만에 주둔하였던 미국군도 이미 오래 전에 완전히 철군하였다.

그런데 한반도 정세는 바뀌지 않았다. 닉슨-포드 정부와 카터 정부가 동아시아 정책을 전환하면서도 북측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주한미군을 철군하는 과제는 내버려둔 것이다. 55년 묵은 낡은 정전체제 위에 남겨진 북측과 미국의 적대관계도 여전하고, 주한미군도 여전하다.

오늘날 미국식 자본주의의 파산으로 장기경제난을 겪게 된 미국의 차기정부에게는 동아시아에서 풀어야 할 미완의 과제가 있다. 그것은 닉슨-포드 정부와 카터 정부가 중국 정책, 베트남 정책을 바꾸면서도 미완의 과제로 남겼던 한반도 정책을 바꾸는 일이다. 미국 차기정부의 한반도 정책이 북측과 미국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주한미군을 철군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15년 동안 추진해온 한반도의 비핵화는 미국의 차기정부에게 한반도 정책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2008년 10월 11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20년 9개월만에 북측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한 조치는, 미국의 차기정부에게 한반도 정책을 전환할 지름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2008년 10월 13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