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자발적 병합을 택하였을까?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역사로 둔갑해버린 착각

1990년 10월 2일 밤 11시 55분, 베를린의 밤공기를 흔드는 은은한 종소리가 자정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야간조명등의 불빛 속에 펄럭이는 독일국기 아래서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Richard von Weizsacker)는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우리는 오늘 독일통일을 성취하였다”고 선언하였다. 동서로 갈라졌던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자정을 기해 하나로 합해졌다.

그런데 동서로 갈라진 독일이 합해진 것을 아무 생각없이 독일통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서독이라고 부른 독일연방공화국(BDR)과 동독이라고 부른 독일민주공화국(DDR)이 합해졌으니 통일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두 나라 또는 두 개의 정치적 실체가 합해진 것을 모두 통일이라고 보는 것은 통일과 병합을 구분하지 못하는 착오이다.

동서로 갈라진 독일이 합해지는 과정이 혼란스럽고 급속하게 진행되었으니, 독일이 하나로 합해진 것을 통일이라고 혼동하기 쉽다. 18년이 지난 오늘에도 혼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독일이 하나로 합해진 것을 동독 중심의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고 서독 중심의 시각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시각이 빗나갔으니 혼동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피하다.

갈라진 독일이 합해진 것은, 명백하게도, 동독이 서독에게 자발적으로 병합한 것이었지, 서독과 동독이 통일방안을 합의하고 그 방안에 따라 나라를 통일한 것이 아니었다. 자발적 병합은 통일이 아니다.

갈라진 독일이 합해진 것을 흡수통합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한 인식 역시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는 식으로 통합하였다고 규정하는 것이어서 서독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일방적 흡수통합도 자발적 병합처럼 통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동서로 갈라진 독일이 합해진 사건을 왜 동독 중심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 까닭은 동독이 자발적으로 서독에 병합됨으로써 독일이 합해졌기 때문이다. 서독으로 병합하기로 결정하고 그 결정을 급진적으로 추진한 것은 동독이었음을 주목해야 하는 것만이 아니라, 서독에게 동독을 병합하려는 의지나 계획이 없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병합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독이 서독에 자발적으로 병합되었다는 인식을 좀더 다듬어야 할 요구가 제기된다. 정확히 말해서, 서독에 자발적으로 병합된 것은 동독이라는 나라가 아니었다. 동독이라는 나라는 병합 이전에 자진해체되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동독이 아니라 옛 동독지역에 남아있는 다섯 개 주가 서독이라고 부르는 연방공화국에 병합된 것이다.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 있는 동독과 서독이 어느 한 쪽으로 흡수통합된 것이 아니라, 동독이 해체된 뒤에 동독의 다섯 개 주가 서독에 병합되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동독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병합에 찬성하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동독이 해체되든 병합되든 관심이 없었다. 병합과정에서 동독사람들의 반대와 저항이 거의 없었으므로 자발적 병합이라 한다.

역사적 사실이 그러한 데도, 서독이 주동적으로 동독을 흡수통합하였다고 보는 착각이 ‘독일통일의 역사’로 둔갑하였다. 서독 중심의 흡수통합론은 동독의 자진해체와 자발적 병합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알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주장이다.

인민의회, 동독해체를 의결하다

동독은 왜 서독에 자발적으로 병합되었을까? 이 물음의 답을 찾으려면, 동서로 갈라진 독일이 합해진 과거사를 동독 중심의 시각에서 새롭게 읽어야 한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을 무너뜨린 사건이 전파를 타고 전세계에 생중계되는 바람에, 동독의 자발적인 병합과정이 진행되던 1990년 8월 23일에 일어난 결정적인 사건은 세계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날 동독 인민의회(Volkskammer)는 동독을 해체하기로 의결하였다. 동독해체안 표결에서 찬성은 294표였고 반대는 62표밖에 되지 않았다. 한 나라의 최고권력기구인 의회가 자기 나라를 스스로 없애버리기로 의결하였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지만, 그것은 18년 전 동독에서 있었던 엄연한 사실이다.

인민의회가 동독해체를 의결한 까닭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동독을 서독에 병합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독의 국가권력을 서독에 넘겨주는 방도를 택하지 않고, 동독의 국가권력을 해체하고 동독의 지방권력을 서독에 넘겨주는 방도를 택하였다. 명백하게도, 동독해체안에 찬성표를 던진 294명은 병합추진세력이었고, 반대표를 던진 62명은 병합반대세력이었다. 동독 중심의 시각에서 보면, 인민의회의 동독해체결정은 인민의회를 장악한 병합추진세력이 자기 나라에게 저지른 반역행위였다.

동독해체안이 인민의회에서 통과될 수 있었던 까닭은, 1990년 3월 18일 동독에서 실시된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병합추진세력이 인민의회를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원래 5월 6일에 실시하기로 예정되었으나, 3월 18일로 앞당겨 실시된 총선에서 가장 많이 득표한 정치세력은, 병합추진세력의 대표자로 등장한 독일동맹(AD)이었다. 독일동맹은 48.1%의 득표율로 인민의회 400석 가운데 거의 절반에 가까운 192석을 차지하였다. 독일동맹은 독일기독교민주연합(CDU)이 주축이 되고, 1989년 12월 17일에 창당한 민주각성(DA), 1990년 1월 20일에 창당한 독일사회연합(DSU)이 결합되어 총선 직전인 1990년 2월 5일에 급조된 우익정당연합체이다. 독일동맹에 속한 각 정당별 득표율 및 의석수는 독일기독교민주연합 40.9%(163석), 민주각성 6.3%(25석), 독일사회연합 0.9%(4석)이었다. 독일기독교민주연합의 총선구호는 “사회주의는 그만두고 자유와 번영을 달라”는 것이었다.

편, 득표율 21.9%(88석)를 얻은 독일사회민주당(SPD)은 독일기독교민주연합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 독일사회민주당은 1989년 10월 7일 사회민주당(SDP)이라는 당이름으로 등장하였다가, 1990년 1월 13일 서독에 있는 독일사회민주당과 똑같이 독일사회민주당(SPD)으로 당이름을 바꾸었다.

990년 2월 12일에 결성된 또 다른 우익정당연합체인 자유민주당원협의회(BFD)의 총득표율은 5.28%(21석)이었다. 이 우익정당연합체에는 독일자유민주당(LDPD), 자유민주당(FDP), 그리고 1990년 1월 27일에 창당한 독일광장당(DFP)이 참가하였다.

밖에 군소정당들이 속출하였는데, 동맹90(Bundnis 90)의 득표율은 2.9%(12석)이었고, 독일민주농민당(DBD)의 득표율은 2.2%(9석)이었고, 녹색당(Die Grunen)과 독립여성연맹(UFV)의 득표율은 2.0%(8석)이었고, 독일민족민주당(NDPD)의 득표율은 0.4%(2석), 그리고 독일민주여성연맹(DFD)의 득표율은 0.3%(1석)이었다.

3.18 총선에서 동독의 정치구도를 바꿔놓은 커다란 변화는, 동독의 집권당인 독일민주사회주의당(PDS)이 16.4%(66석)라는 낮은 득표율밖에 얻지 못하는 참패를 당하여 제3당으로 밀려난 것이다. 3.18 총선이 실시된 때로부터 약 다섯 달 뒤인 8월 23일 인민의회에서 동독해체안을 표결에 부쳤을 때 나온 반대표 62표는 독일민주사회주의당이 확보한 의석수에서 네 표나 모자란 것이었다.

3.18 총선에서 압승한 독일기독교민주당은 자기 당의 우익정치인 로타 드 메이지어(Lothar de Maiziere)를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총리)으로 내세웠는데, 그는 1990년 4월 19일 집권하자마자 동독을 서독에 병합하는 과업을 신속하게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에 따라 동독의 자발적 병합이 급진전되었다. 1990년 5월 18일 인민의회는 동서독 두 정부가 체결한 ‘통화, 경제, 사회통합의 창설에 관한 국가조약’을 비준하였는데, 그것은 동독이 자기의 경제주권을 통째로 서독에게 넘겨준 병합의 시작이었다.

불법이주사태의 대혼란과 집권당의 와해

원래 동독의 집권당은 독일민주사회주의당이 아니라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이었다.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은 독일공산당(KPD)와 독일사회민주당(SPD)이 합당하여 1946년 4월 21일에 창당되었다.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은, 서방세계가 비방한 것처럼 일당독재(one-party dictatorship)를 실시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정치세력들과 공존, 협력하는 다당제 민주주의(multiparty democracy)를 실현하였다. 당시 동유럽 사회주의권에서 동독 이외에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가 다당제를 실시하였다.

물론 동독의 다당제는 여야가 끝없이 싸우는 자본주의식 대립형 다당제가 아니라 여야가 상호협력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식 상생형 다당제였다. 다당제가 자본주의 정치권에서만 가능하다고 착각하면서, 사회주의정치방식은 무조건 일당제라고 규정하는 것은 오해와 편견이다.

여러 정당들과 대중단체들로 구성된 민주독일민족전선(NFDD)이 동독에 존재했던 사회주의식 다당제의 실체이다. 민주독일민족전선에 망라된 정치세력들이 인민의회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살펴보면, 독일사회주의통일당 127석(25.4%), 독일기독교민주연합 52석(10.4%), 독일자유민주당(LDPD) 52석(10.4%), 독일민주농민당(DBD) 52석(10.4%), 독일민족민주당(NDPD) 52석(10.4%), 자유독일노동조합연뱅(FDGB) 61석(12.2%), 자유독일청년단 37석(7.4%), 독일민주여성동맹 32석(6.4%), 문화연맹(KB) 21석(4.2%), 기타 14석(2.8%)이었다. 이 비율이 말해주는 것처럼,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이 집권당으로서 민주독일민족전선을 이끌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1946년에 독일공산당과 합당하여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을 창당한 뒤에 영영 사라진 줄로 알았던 독일사회민주당이 43년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989년 10월 7일은 독일민주공화국 창건 40주년을 기념하는 국경절이었는데, 바로 그날 독일사회민주당이 재창당을 강행하였다. 43년 전에 독일공산당과 합당하여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을 창당하였으나, 사회주의에 대해 거리를 두면서 마치 물 위에 뜬 기름방울처럼 떠돌던 사회민주주의세력은, 동독이 극심한 사회정치적 혼란에 빠져드는 틈을 타서 당을 재건한 것이다.

다른 사회주의나라들로부터 ‘현실사회주의의 모범국’이라는 찬사를 받기까지 한 동독은, 1989년에 이르러 집권당이 분열되고, 탈당파가 반사회주의적 성향의 정당을 재건할 만큼 심각한 정치적 혼미상태에 빠졌다.

동독에 몰아친 대혼란은 맨처음 동독사람들의 불법이주사태에서 시작되었다. 불법이주사태는 엉뚱하게도 동독의 이웃나라 헝가리에서 터져나왔다. 1989년 5월 2일 헝가리는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전면개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1988년 1월부터 해외여행자유화조치를 실시해온 헝가리가 1989년 5월에 국경개방조치를 취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헝가리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동독사람들이 개방된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집단이주하기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 1989년 여름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넘어간 동독사람은 1만3천여 명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동독사람들도, 헝가리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동독사람들이 서독으로 집단이주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각기 해당국 주재 서독대사관에 몰려가 서독행을 요구하였다.

1989년 9월 11일 헝가리가 자국에 입국하여 서독행을 요구한 동독사람 6천500명을 특별열차에 태워 서독으로 넘겨준 것을 시발로 하여, 10월 1일에는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가 동독사람 7천명을 특별열차편으로 서독에 넘겨주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10월 4일에 다시 동독사람 1만명을 특별열차편으로 서독에 넘겨주었다.

이러한 사회정치적 혼란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독일사회주의통일당에서는 와해공작마저 벌어졌다. 그것은 병합추진세력이 당의 지도체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마비시키는 것이었다. 1989년 10월 18일 병합추진세력은 독일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특별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서기장(First Secretary)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ker)를 몰아내고 ‘개혁론자’인 에곤 크렌츠(Egon Krenz)를 새로운 서기장으로 앉혔다.

그러나 집권당의 최고지도자를 교체하였다고 해서 불법이주사태가 진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웃나라를 거쳐 서독으로 불법이주하는 혼란이 진정되지 않자, 1989년 11월 7일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내각 총리) 빌리 슈토프(Willi Stoph)를 비롯한 각료 44명은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였다. 그들의 총사퇴는 국가평의회 요직을 맡은 정치국원 3분의 2가 물러난 것이므로, 국가평의회와 당 정치국이 한꺼번에 마비되는 치명적인 위기가 닥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혼란에 빠진 정치국을 재빨리 장악한 것은 병합추진세력이었다. 그들은 정치국을 장악하기가 무섭게, 각료총사퇴가 있은지 불과 이틀 뒤인 1989년 11월 9일에 정치국원 귄터 샤보브스키(Gunter Schabowski)를 내세워 동서독의 통행자유화와 동독국경의 전면개방을 실시한다는 전격적인 기자회견을 하였고, 11월 10일에는 사회주의정책을 포기하고 자본주의정책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전향선언’이나 마찬가지인 당 중앙위원회 정책결정서를 발표하였으며, 11월 13일에는 정치국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치국에 들여보낸 신임 정치국원 한스 모드로브(Hans Modrow)를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내세워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대혼란을 틈타 정권을 장악한 병합추진세력이 곧바로 개시한 것은 동독해체공작이었다. 1989년 12월 1일 인민의회는 국가기구는 집권당의 지도를 받는다는, 국가기구에 대한 당적 지도원칙을 명시한 헌법조항을 폐기하였다. 병합추진세력은 이처럼 집권당과 국가기구를 분리시켜놓고 이틀만에 집권당을 와해시켰다. 그들은 1989년 12월 3일 당 정치국에서 전원사퇴하는 방식으로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을 와해시킨 것이다.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이 와해되자, 당의 잔여세력은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당이름을 독일민주사회주의당으로 바꾸고 ‘혁신’과 ‘재창당’으로 사태를 수습하겠다고 말하였지만, 그것은 때늦은 말잔치였다. 독일민주사회주의당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이미 쇠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집권당의 와해는 동독이 무정부상태에 빠졌음을 뜻한다. 무정부상태야말로 병합추진세력이 서독으로 병합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노려온, 병합추진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다.

동독을 무너뜨린 암시장경제

한때 ‘현실사회주의의 모범국’이라 하던 동독이 맥없이 무너진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동독의 붕괴원인은 짧은 기간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적어도 20년 이상 긴 기간에 걸쳐 조성된 것이다. 동독의 붕괴원인을 밝혀주는 단서는, 1976년에 열린 독일사회주의통일당 제9차 당대회에서 주목할 만한 결정을 채택한 것에서 찾아낼 수 있다. 그것은 개방정책에 반대하는 정치적 결정이었다. 당대회에서 개방정책을 반대하는 결정이 나온 것은, 동독에서 진행된 부분적 개방이 동독사회에 이미 폐해를 끼쳤음을 뜻하는 것이다.

동독의 부분적 개방을 틈타서 사적으로 이윤을 챙기려는 밀매업자들이 나타나 불법상거래를 벌였고, 불법상거래가 차츰 팽창, 확산되면서 생겨난 것이 암시장경제(black-market economy)이다. 국영기업에서 생산된 각종 경공업제품이나 집단농장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암시장으로 빼돌려 되팔거나, 집에서 몰래 만든 포도술이나 맥주 따위를 암시장에 내다팔거나, 불법적으로 빼돌린 개솔린, 자동차, 원자재 따위들, 그리고 해외에서 밀수입한 가전제품, 사치품, 기호품 따위를 암시장에 내다팔아 이익을 챙기는 불법상거래가 있었고, 사적으로 처분할 수 없도록 법적으로 규제된 주택을 임대하여 이익을 챙기는 불법임대행위도 있었다.

블라디미르 트렘믈(Vladimir G. Treml)과 마이클 알렉씨브(Michael Alexeev)가 1994년에 발표한 논문 ‘소련에서 제2경제의 성장과 그것이 소련체제에 준 영향(The Growth of the Second Economy in the Soviet Union and Its Impact on the System)’에 따르면, 옛 소련의 암시장경제는 1960년에 국민소득의 3.4%를 차지하였는데 1988년에는 20%로 늘었으며, 1970년대 후반 소련의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10-12%가 지하경제권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1985년 당시 동독은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세계 17위에 오를 만큼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였으므로, 암시장경제의 규모를 비교하면 소련이 동독보다 훨씬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규모의 크고 적음을 떠나서 암시장경제는 불법적인 사적 생산체계와 분배체계를 동독사회에 들여놓음으로써 시장경제를 되살려놓는 대신 계획경제를 차츰 마비시켰으며, 부패와 범죄를 날로 증대, 확산시켰다. 명백하게도, 암시장의 확대는 자본주의의 회복, 사회주의의 붕괴, 서독으로의 자발적 병합을 재촉하는 지름길이었다.

암시장에서 불법소득을 올린 동독의 밀매업자들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과 갈라져 도시중산층으로 변신하였다. 동독에서 서독화폐로 고급상품을 살 수 있는 외화상점(Intershop)을 이용하고, 여름휴가철에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도시중산층이 동독에 생겨나기 시작한 시기는 1970년대 중반이다.

동독을 해체하고 서독에 병합시킨 병합추진세력은 바로 그 도시중산층 속에서 출현하였고, 도시중산층은 병합추진세력을 받쳐주는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성장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동독의 병합추진세력이 정권장악을 넘보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우선 그들에게는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특별조치’가 요구되었다. 병합추진세력이 추진한 ‘특별조치’는 동독을 민주화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사회정치적 혼란을 조성하여 통치체계를 마비시키는 ‘개혁’이었다. ‘개혁’을 외치며 정권장악기회를 엿보던 동독의 병합추진세력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으니, 그것은 동독사회에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출현한 도시중산층이 서독으로 불법이주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병합추진세력이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들은 1989년 9월 4일 동독의 대도시 라이프찌히에서 1천200명이 모인 가운데 동서독의 통행자유화를 요구하는 집회를 개최하였다.

1989년 9월과 10월에 걸쳐 동독사람 6만여 명이 서독으로 불법이주한 것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사회정치적 혼란이었다. 그 혼란은 1961년 1월부터 8월 사이에 동독사람 16만 명이 서독으로 불법이주한 사태에 비하면, 동독의 통치체계를 마비시킬 정도로 심각한 사태는 아니었다.

병합추진세력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사회정치적 혼란보다도 통치체계를 마비시킬 조직적 정치행동이었다. 1989년 9월 9일 동독의 11개 지역대표로 자칭한 30명이 ‘새로운 광장(Das Neue Forum)’이라는 반정부단체를 결성하고, 라이프찌히에서 월요일마다 반정부집회를 계속 연 것은, 그러한 조직적 정치행동이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새로운 광장’이 첫 반정부집회를 열었던 날로부터 한 달만인 1989년 10월 9일에 라이프찌히의 반정부집회에는 7만 명이 참가하였고, 1989년 11월 4일 동베를린의 반정부집회에는 100만 명이 참가하였다. 라이프찌히의 반정부집회에서는 “우리가 인민이다. 권력은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의 것이 아니다”는 반당구호가 나왔고, 동베를린의 반정부집회에서는 “우리는 하나의 인민이다”는 병합구호가 나왔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 9일 저녁, 병합추진세력은 대규모 반정부집회의 압력을 못이긴 척하면서 정치국원 귄터 샤보브스키(Gunter Schabowski)를 내세워 동서독의 통행자유화와 동독국경의 전면개방을 선포하였다. 계획경제를 마비시킨 암시장경제는 동독 전체를 무너뜨리는 길을 병합추진세력에게 열어주었던 것이다.

동독사람들 가운데 서독으로 넘어가거나 반정부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병합추진세력이 집권당을 와해시키고, 동독을 해체하고, 서독에 병합시킨 1989년 여름부터 이듬해 가을까지 격변기에 동독의 노동계급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역사자료들은 당시 동독이 해체되는 것을 보면서도 노동계급이 침묵하였다고 전한다. 동독 노동계급의 침묵은, 인민주권을 실현하는 사회체제가 세워졌으나 노동계급이 사회역사발전의 주체로 나서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은 동독 노동계급이 스스로를 사회역사발전의 주체로 개조하는 길을 밝혀주지 못하였다.

1949년 창당한 때로부터 1989년에 와해될 때까지 40년 동안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을 이끈 서기장들인 발터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와 후임자 에리히 호네커는 동독 노동계급이 어떻게 사회역사발전의 주체로 개조될 수 있을까 하는 근본문제의 해답을 찾지 못하였다. 그 두 사람이 평생토록 견결히 옹호, 고수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자본주의 이후의 역사적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제시하고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밝혀주었으나, 현실 속에 실현된 사회주의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물음에는 해답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2008년 9월 29일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