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통론은 정치신화, 건국론은 궤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법통론은 정치신화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법통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과거사 파헤치기에 능통하다는 역사학자들도 법통론을 학문적으로 검증하지 않은 채 진실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법통론은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지 않는 정치적 주장이라는 점에서 진실이 아니라 신화이다. 법통론은 정치신화이다. 고대신화가 구전문학의 흐름을 타고 착색되어 진실처럼 꾸며졌다면, 법통론이라는 정치신화는 분단시대의 흐름을 타고 착색되어 진실처럼 꾸며졌다.

법통론을 가장 먼저 꺼낸 사람은 이승만이다. 1948년 5월 31일 국회의장으로 뽑힌 이승만은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오늘 여기에서 열리는 국회는 즉 대한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이며, 이 날이 29년 만의 민국의 부활일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승만이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 임시정부는 흔히 상해임시정부라 부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아니다. 이승만의 법통론에 나오는 임시정부는 한성임시정부이다. 그 무렵 서울을 한성(漢城)이라고도 불렀다.

역사자료에 나타난 대로, 3.1운동 직후 각지에서 정부수립운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이를테면, 1919년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가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로령임시정부를 선포한 것을 시작으로, 4월 1일 경기도에서 대한민간정부, 4월 9일 서울에서 조선민국 임시정부, 4월 13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4월 15일 중국 길림에서 고려임시정부, 4월 17일 평안북도에서 신한민국정부가 제각기 수립을 선포하였는데, 이승만의 법통론에 나온 한성임시정부는 그 가운데서도 맨 나중에 등장한 임시정부이다.

1919년 4월 이후 임시정부 수립선포가 줄을 이은 난맥상이 말해주는 것처럼, 당시 해내외 각지에서 수립을 선포한 각양각색 정부들 가운데서, 해외에서 선포된 로령임시정부와 상해임시정부를 빼놓고 나머지는 실체 없는 지상정부(paper government)에 지나지 않았다. 국내에서 선포된 임시정부들이 모두 지상정부로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일제가 가혹하게 탄압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의 법통론에 나오는 한성임시정부는 어떠했을까? 한성임시정부는 이규갑(기독교), 박용희(기독교), 안상덕(천도교), 김규(유교), 이종욱(불교) 등 민족주의 성향의 종교인들이 1919년 4월 23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있는 중국식당 봉춘관에서 수립을 선포한 것이므로, 그것 역시 다른 임시정부들과 마찬가지로 실체 없는 지상정부였다. 한성임시정부수립을 선포한 문서는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 보관된 이승만의 유품 속에서 1986년 4월에 발견되었다.

결국, 1919년 9월 11일 상해임시정부와 로령임시정부가 주도하여 각양각색 지상정부들이 하나로 통합되었는데, 말이 통합이지, 실제는 지상정부들이 자취를 감추고 상해임시정부와 로령임시정부가 상해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렇게 ‘통합’된 임시정부의 공식명칭이다.

상해임시정부는 임시정부라는 거창한 이름을 사용하는 바람에 일제식민지시기 우리나라 항일운동 전체를 대표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민족주의계열 항일운동의 우익분파에 지나지 않았다.

각양각색 임시정부들이 상해임시정부로 ‘통합’되었으므로, 한성임시정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선포하지 않고, 1948년부터 산정하면 29년 전에 사라져버린 한성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선포하였다. 이승만이 그처럼 억지를 부린 까닭은, 각양각색 임시정부들이 상해임시정부로 ‘통합’되었음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머릿속에서 어떤 정치적 동기가 강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1919년 4월 23일 한성임시정부를 선포한 종교인들은 당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하였는데, 그 사실을 전해 듣고 고무된 이승만은 워싱턴에 집무실을 차려놓고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행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각양각색 임시정부들이 같은 해 9월 11일에 상해임시정부로 ‘통합’되었고, 이듬해 1920년 9월에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런데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에게 조선에 대한 위임통치론을 청원하는 문서를 보냈음을 ‘뉴욕타임스’가 1919년 3월 17일에 보도한 사실이 재미동포의 제보를 통해 나중에 상해임시정부에 알려지자 뒤늦게 엄청난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김원봉, 김창숙, 이극로, 신채호, 오성윤, 장건상을 비롯한 상해임시정부 요인 54명은, 이승만이 “대미위임통치 청원 및 매국매족의 청원을 제출한 사실을 거하여 그 죄를 성토”하는 공개성토문을 1921년 4월 19일에 내놓았다.

상해임시정부와 사이가 나빠진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에 보내던 재미동포단체의 독립운동자금 송금을 중단시키고 그 자금 가운데 일부를 전용, 착복하였다. 이승만의 배임행위가 드러나자,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은 1925년 3월에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뽑았다. 이런 악연 때문에, 이승만은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상해임시정부가 아니라 한성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악연보다 더 결정적인 요인은, 미국 정부가 상해임시정부를 정치적 실체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미국의 정책과 방침을 적극 추종한 이승만은 미국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법통론을 주장하고 싶어도 주장할 수 없었다. 한성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이승만의 법통론이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정치신화로 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러면 1948년 7월 17일에 공포된 헌법전문은 법통론을 어떻게 규정하였을까? 그 헌법전문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였다고 규정하였다. 그 헌법전문 어디에도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규정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3.1운동의 독립정신을 이어받았다는 규정만 있다. 최초의 헌법전문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이 아니라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하였다고 명시한 것이다.

최초의 헌법전문에 규정된 계승문제는 그 뒤로 헌법이 개정될 때마다 표현 또는 내용이 조금씩 달라졌다. 이를테면, 1962년 12월 26일에 개정된 헌법전문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는 표현으로 바뀌었고, 1972년 12월 27일에 개정된 헌법전문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4.19의거 및 5.16혁명의 이념을 계승”한다는 내용으로 바뀌었고, 1980년 10월 27일에 개정된 헌법전문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는 내용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은 1962년의 표현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헌법전문은 이처럼 여러 차례 바뀌었으나, 정신계승을 이어받았다는 내용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처음으로 법통론을 명시한 것은, 1987년 10월 29일에 개정된 현행 헌법전문이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못박은 것이다. 이것은 1948년 8월 15일에 세워진 대한민국 정부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규정한 것이다.

명백하게도, 정부수립과정에서의 법통계승이란 그 자체가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어야 한다. 1948년의 정부수립과정에서 법통계승이 없었는데, 1987년에 갑자기 법통계승의 역사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39년의 역사적 공백을 지워버리고 법통론을 만들어냈다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이다. 현행 헌법전문에 나오는 법통론은 39년이 지난 뒤에 만들어진 정치신화이다.

정부수립 과정에서 법통계승을 거부한 사람들

대한민국 정부가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법통을 이어받지 않았음을 지적한 사람은 상해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이다. 1948년 7월 12일 헌법이 제정되던 날, 신문기자가 김구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는 이승만의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김구는 “현재 국회의 형태로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아무 조건도 없다고 본다”고 잘라 말했다.

김구가 정부의 법통계승을 부정한 까닭은, 이승만이 정부수립과정에서 상해임시정부 계열의 민족주의 정치세력을 배제하는 대신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앞세워 집권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논할 필요가 있다.

탄핵을 당한 뒤에 상해임시정부와 인연을 끊고 미국에서 망명객으로 떠돌던 이승만은 1942년에 밀러드 굿펠로우(Millard P. Goodfellow)에게 포섭되어, 중앙정보국(CIA) 전신인 전략정보국(OSS)에 들어갔다. 이승만은 전략정보국 차장 굿펠로우 밑에서 ‘블랙(Black)’이라는 암호명을 가진 전략정보국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2008년 8월 14일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는 전략정보국 요원 3만5천여 명의 신상명세가 들어있는 75만 쪽 분량의 비밀문서를 공개하였는데, 이승만에 관한 기록도 거기에 들어있을 것이다.

8.15 광복 직후 굿펠로우를 따라 맥아더의 전용기를 얻어 타고 서울에 들어간 이승만은 굿펠로우의 극우반공정치공작을 수행하였고, 1946년 5월 굿펠로우가 정치공작을 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가면서 이승만에게 넘겨준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구상’을 실천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는 항일전쟁에 참전하기를 바라던 광복군이 미국 전략정보국으로부터 약간의 군사지원을 받도록 하였지만, 그가 전략정보국의 하수인 노릇을 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외국정부기관의 하수인인가 아니면 항일운동가인가 하는 차이는, 김구와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근본적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미국 국가정보기관의 하수인으로서 그 기관의 정책과 방침에 따라 친미반공독재와 분단고착을 밀고 나간 이승만을 건국영웅화하려는 것이 반역사적 행위로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은 상해임시정부에 참가한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독립운동가이지만, 8.15 광복 이후 김구를 대표로 하는 민족주의 정치세력과 결별하여 남북협상을 사실상 반대하면서 미군정청이 이승만을 앞세워 추진한 단독선거 실시와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였다. 1920년대 상해임시정부 초기에 이승만이 미국에게 위임통치를 청원하고 공금을 전용, 착복한 행위가 발각되어 임시정부 의정원이 이승만을 탄핵하였을 때도 이시영은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그처럼 끈끈한 인연이 있었기에, 이승만은 그를 부통령으로 내세웠다.

이시영의 뒤를 이어 이승만 정권의 부통령이 되었던 김성수와 장면은, 일제식민지시기에 ‘국민총동원 조선연맹’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친일파 거물들이었다. 부통령을 지낸 장로교 목사 함태영은, 원래 기독교계 대표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3.1운동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넣은 것으로 하여 3년 옥고를 치렀고, 그 뒤에는 항일운동을 떠났다가 8.15 광복을 맞은 비친일파로서, 친미주의와 반공주의에 기울어진 우익정치인이었다.

이승만 정권시기의 국무총리 또는 총리서리는 여섯 사람인데, 장면, 백두진, 백한성은 친일파이고, 이범석, 허정, 이윤영은 비친일파이다.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을 지낸 이범석은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항일운동경력이 있는데, 8.15 광복 직후 서울에 들어가 미군정청의 배후지원을 받아 극우반공청년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을 조직하였으며, 미군정청의 방침에 따라 친일군맥이 한국군 지휘부를 장악하도록 방조하였다. 허정은 1920년에 잠깐 상해에 머물다가 프랑스로 건너갔고, 그 뒤에는 미국에서 떠돌다가 귀국하였으므로 항일운동경력이 없는 사람이다. 감리교 목사인 이윤영은 3.1운동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렀을 뿐 항일운동과 무관하게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고, 북측에서 결성된 우익반공정당인 조선민주당의 부위원장이 되었다. 이승만은 자기 비서 김욱을 평양에 밀파하여 조선민주당의 반탁결의문을 받아갔는데, 그 문건이 서울에서 공개되자 신변위험을 느낀 이윤영은 서울로 도피해서 이승만과 손을 잡았다.

이승만 정권시기의 국회의장은 신익희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8.15 광복 이후 남측에서 우익정치활동을 주도하였으며 한국민주당의 기초를 다졌다.

이승만 정권시기의 법무장관은 여덟 사람인데, 조선어학회사건 관련자인 이인, 동아일보 주필이었던 김준연, 대구애국단사건 관련자인 서상환을 제외하고, 이우익, 조진만, 조용순, 이호, 홍진기는 모두 친일파이다.

검찰총장은 김익진, 서상환, 한격만, 민복기, 정순석, 박승준 여섯 사람인데, 서상환만 비친일파이고 나머지 다섯 사람은 모두 친일파이다.

경찰총수(치안국장)는 네 사람인데, 장석윤은 상해임시정부에 참가한 경력이 있으나, 이호, 이익홍, 홍순봉은 모두 친일파이다.

국방장관은 네 사람인데, 이범석과 손원일은 비친일파이고, 신태영과 김정렬은 친일파이다.

합참의장은 네 사람인데, 유재홍, 백선엽, 이형근, 정일권 모두 친일파이다.

육군참모총장은 여덟 사람인데, 이응준, 신태영, 채병덕, 정일권, 이종찬, 백선엽, 이형근, 송요찬은 모두 친일파이다. 군부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소굴이었다.

요컨대, 8.15 광복 후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집권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계승에 대한 전면 부정이었다. 그들은 정부수립 과정에서 법통계승을 사실상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명박의 건국론과 삼박자론

일찍이 이승만은 민국부활론을 주장하였다. 한성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것이 ‘민국의 부활’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법통론이 정치신화라면, 그의 민국부활론은 궤변이다. 민국부활론을 궤변으로 보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일제식민지시기에 상해임시정부는 민족주의계열 항일운동의 우익분파로 존재하였으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일제의 침략과 강점으로 망한 봉건군주국 조선이 식민지로 존재하였을 뿐이다. 일제식민지시기에 상해임시정부가 존재하였으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도 존재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이다. 이승만의 민국부활론은 일제식민지시기에 존재하지 않은 대한민국이 ‘부활’하였다는 억지를 부렸다는 점에서 궤변이다.

그런데 이승만이 민국부활론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은 때로부터 60년이 지난 2008년에 건국론을 꺼내어 때아닌 소동을 일으킨 사람이 있으니 그가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는 2008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올해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맞이”한다고 말했다.

엄밀히 따지면,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되었다는 건국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이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당시)이다. 1998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 50년사는 우리에게 영광과 오욕이 함께했던 파란의 시기였”다고 지적하고, “제2의 건국을 향한 첫걸음을 시작”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꿔놓았다는 점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시기에 건국론을 언급하고 지나간 것과 차원이 다르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4월 국무총리실 산하에 ‘건국 60년 기념사업단’을 설치하였고, 2008년 5월 22일에는 ‘건국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는 청와대에서 열린 ‘건국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 위촉식 및 제1차 회의를 주재하면서 “건국 60년 행사가 (줄임)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미래비전으로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정부의 중요사업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각계각층이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지 말라고 반대하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명박 대통령은 역사상 처음으로 정부차원의 건국절 기념행사를 강행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왜 건국론을 주장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위에서 논한 대로,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질 때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지 않은 것은 역사적 사실인데, 그가 주장한 건국론은 법통을 갖지 못한 정부를 세웠다는 역사적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건국론을 해석하면, 법통을 갖지 못한 정부를 세운 것은 법통을 창시한 정부를 세운 것이며, 법통을 창시한 정부를 세운 것은 곧 나라를 세운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통 없는 정부수립을 건국으로 규정하는 것은 궤변이다. 정부가 법통을 갖지 못했다는 말은 정부의 존재근원이 없다는 뜻이다. 법통을 갖지 못한 정부를 세운 것은, 비유로 말하면,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생아가 출산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주장한 건국론은 대한민국 정부가 법통을 갖지 못한 정치적 사생아임을 자인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15일 경복궁에서 열린 ‘제63주년 광복절 및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중앙경축식’에서 읽어내려간 경축사에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였고 발전의 역사였으며 기적의 역사였다”고 말했다. 그 발언은, 10년 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건국 이후 50년을 “영광과 오욕이 함께했던 파란의 시기였다”고 지적한 발언과 매우 다르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축사에 나온 그 글귀는 경축사의 기조를 압축적으로 표현하였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명박 정권의 역사인식과 정치이념을 집약한 핵심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핵심문장을 분석해보면, 이명박 정권이 광복절을 왜 건국절로 바꿔놓았는지가 드러난다. 그 까닭은, 1948년 8월 15일 이후 60년 동안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가 이루어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성공, 발전, 기적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늘어놓은 것은, 단순한 수사학적 표현이 아니라, ‘민국 60년사’가 ‘삼박자’에 맞춰 전개되어왔음을 뜻한다. 삼박자 발전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한 삼박자 발전론은 법통을 갖지 못한 60년 역사를 거꾸로 뒤집어버린 도착사관(倒錯史觀)의 산물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가 말한 성공의 역사란 이승만 정권의 친미반공독재가 분단고착에 ‘성공’하였음을 뜻하며, 그가 말한 발전의 역사란 박정희 정권의 개발주의독재가 대미예속을 ‘발전’시켰음을 뜻하며, 그가 말한 기적의 역사란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강화된 시장주의독재가 민생경제파탄의 ‘기적’을 일으켰음을 뜻한다.

성공, 발전, 기적의 삼박자론을 달리 표현하면, 이승만의 건국영웅화, 박정희의 경제발전예찬, 이명박의 자유시장숭배로 이어지는 삼박자 정치선동으로 된다. 또한 삼박자론은 친미주의, 반공주의, 신자유주의가 뒤엉킨 우익독재정치의 이념줄기를 매만진다.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는 주장은, 친일파 청산을 ‘좌익공산세력의 음모’로 몰아대며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앞세워 집권하였던 이승만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궤변 중의 궤변이다. 건국 60주년 기념행사는 이승만을 능가하는 희대의 궤변가들이 벌인 소동이었다.   (통일뉴스 2008년 8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