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주년의 숨겨진 역사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미국군 철군과 이승만의 내전준비

38도선 이남지역을 점령하였던 미국군은 1949년 6월 29일에 철군하였다. 소련군은 1948년 12월 26일에 북측에서 철군한 바 있다. 두 나라 군대가 철군하자, 38도선에서 크고 적은 무력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남북의 무력충돌은 내전을 예고하였다.

그 무렵 이승만은 '북한정권해체'를 주장하면서 내전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는 1949년 1월 8일자 '조선일보' 기사에서 "지금은 미국의 경고 때문에 참고 있지만, 전쟁을 개시하면 국군이 사흘 만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1949년 3월 3일 외무장관 임병직은 내전을 도발하려는 명분이 가득한 문서를 유엔한국위원단(UNCOK)에 보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담겨있었다.

1. 북한정권과 모든 정당, 사회단체를 해체한다.

2. 남한정부가 유엔한국위원단 감시 아래 북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

3. 인민군을 즉각 해체하기 위한 특별기구를 북한에 보낸다.

4. 북한정권을 무효화하는 국제협정을 선포한다.

이승만이 선동한 내전은 명백하게도 미국의 동아시아반공전략에 따른 반공내전이었다. 당시 미국의 동아시아반공전략은 한반도와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반공내전을 일으킴으로써, 중국혁명 이후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차단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동아시아반공전략을 열렬히 추종한 이승만 정권은 다음과 같이 내전준비를 다그치고 있었다.

1. 이승만은 반공독재권력을 강화하였다. 권력기반이 취약했던 그가 반공독재권력을 강화한 방도는, 친일파를 권력기반으로 삼는 것이었다.

1948년 9월 1일 국회에서 반민족행위특별법을 입법하였는데도, 이승만은 그 법을 공포하지 않고 버티다가 9월 22일에 가서야 공포하였다. 그 법에 의하여 설치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1949년 1월 8일부터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체포하기 시작하였으나, 1949년 6월 6일 이승만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은 경찰은 반민특위 특별경찰대를 포위하여 무장해제하고, 반민특위 본부를 압수수색하고 현장에서 본부인원 37명을 연행하였다.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반공독재권력의 강화만이 아니라, 내전준비의 일환이었다.

2. 이승만은 강압과 폭력으로 진보정치세력을 말살하였다. 1949년 한 해 동안 무려 11만8천620명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 수감되었고, 1949년 10월 19일에는 133개 정당, 사회단체들이 '국가보안법'에 의하여 불법화되었다.

1949년 6월 5일 이승만 정권은 "대한민국을 절대지지, 수호하고 공산주의를 박멸하기 위한"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하였다.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을 이 단체에 가입시켜 사상검열과 전향교육을 실시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30만 명이나 가입시켰다. '뉴욕타임스' 2008년 5월 18일자 보도와 '에이피(AP)통신' 2008년 7월 5일자 보도에 따르면, '보도연맹원'을 처형하라는 이승만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1950년에 거의 모두 학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의 진보정치세력 말살책동은 국회에까지 확대되었다.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1949년 5월 17일부터 8월 14일까지 무려 여섯 차례에 걸쳐 이른바 '친공 국회의원' 15명이 구속되었다.

3. 이승만은 내전을 반대하고 정치협상으로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려고 애쓴 남북협상파를 제거하였다. 당시 남측에서 남북협상파의 중심인물은 김구였다. 이승만의 암살지령을 받은 육군 포병소위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김구의 거처 경교장에 들어가 그를 총격, 살해하였다.

평양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Terentii F. Shtykov)가 1949년 7월 13일 스탈린(Joseph V. Stalin)에게 보낸 보고서는, 남측이 1949년 7월에 북측을 공격하여 8월 15일까지 북측을 점령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슈티코프의 보고는 과장이 아니었다. 내전준비를 다그치면서 공공연히 내전을 선동해온 이승만 정권이 1949년 여름에 북측을 공격하지 못한 까닭은, 미국군이 한국군에게 공격무기를 넘겨주지 않아서 군사적 준비가 아직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최초의 통일협의기구, 최초의 평화통일방안

이 나라에 임박한 내전을 피할 유일한 방도는 '화평통일'이었다. 당시에는 평화를 화평이라 했다.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면 통일의 당위성을 강조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정세는 통일을 실현할 남북합동 협의기구 설립을 요구하였다. 그 요구에 남측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응답하였다. 남측 민전은 1949년 5월 18일 중앙위원회를 소집하고, 남북을 포괄하는 전국적 범위의 통일협의기구를 내오기 위한 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1949년 5월 25일과 6월 7일에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전국적 범위의 통일협의기구를 내오기 위한 결성준비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마침내 1949년 6월 25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남북의 71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704명이 모인 가운데, 전국적 통일협의기구를 결성하였으니, 그것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이다. 결성대회 마지막 날인 6월 27일 '조국전선' 이름으로 발표한 '남북조선의 제정당, 사회단체들과 전체 인민들에게 보내는 선언서'에는 남북의 71개 정당, 사회단체가 합의한 최초의 평화통일방안이 담겼다. 그것은 분단역사상 처음으로 남북이 합의한 평화통일방안이다.

최초의 평화통일방안은, 남북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선거지도위원회의 지도 아래, 남북총선거를 1949년 9월에 실시하여 단일입법기관을 세우고, 단일입법기관이 단일헌법을 채택하고, 그 헌법에 따라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새로운 정부는 남북에 현존하는 정부로부터 정권을 접수하며, 남북에 현존하는 정부를 해산한다는 것이다. 그 평화통일방안을 단계별로 재구성하면, 남북정치협상→선거지도위원회 결성→남북총선거 실시→단일입법기관 수립→단일헌법 제정→통일정부 수립→남북정부 해산으로 정리된다. 최초의 평화통일방안은 분단고착과 내전위기에서 벗어나 나라의 통일을 평화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공평하고 합리적이며 실현가능한 방안이었다.

1949년 7월 5일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서기국은 위와 같은 평화통일방안을 문서로 작성하여 남측의 정당, 사회단체는 물론 국회의원들, 언론계, 교육계, 문화계, 종교계, 재계, 체육계, 주한군사고문단(KMAG), 유엔한국위원단 등 1천 여 곳에 보냈고, 7월 2일에는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 리(Trygve Lie)에게도 보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남북의 71개 정당 및 사회단체들이 합의한 평화통일방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전준비에만 골몰하였고, 그러는 사이에 해가 바뀌었다. 1950년은 광복 5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였다.

1950년 6월 7일 '조국전선' 중앙위원회에서 채택된 평화통일 호소문은, "남북인민들은 닥쳐오는 8.15 광복 5주년을 통일로써 기념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다음과 같은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1. 1950년 6월 15-17일 남북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협의회를 38선 부근의 해주 또는 개성에서 개최하여, 평화통일을 위한 조건들, 단일입법기관의 총선거를 실시하는 절차, 총선거를 지도할 중앙지도위원회를 설치하는 문제를 결정한다.

2. 대표자협의회에는 평화통일을 방해하는 이승만을 비롯한 9명을 참가시키지 않으며, 유엔한국위원단의 간섭을 배제한다.

3. 1950년 8월 5-8일에 남북총선거를 실시하고 단일입법기관을 세운다.

4. 1950년 8월 15일 광복 5주년에 남북 총선거에 의해 구성된 단일입법기관 제1차 회의를 서울에서 소집한다.

5. 남북 정권은 대표자협의회 기간과 총선거 기간에 사회질서를 보장한다.

1950년 6월 8일, '조국전선'은 라디오방송을 통해 위의 평화통일방안을 남측에 전하기 위해 6월 10일 38도선에 있는 려현역에 파견원 세 사람을 보내겠다고 발표하였다. 파견원 세 사람이 려현역에서 대기하고 있겠으니, 남측의 정당, 사회단체들은 그곳으로 대표를 보내 평화통일방안을 전달받기 바란다는 호소가 라디오방송 전파를 타고 반복해서 남측에 전해졌다.

1950년 6월 10일 오전 10시, 파견원 세 사람이 려현역에 나타나, 천막을 쳐놓고 남측 대표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파견원 세 사람이 평화통일방안을 들고 대기하는 려현역 일대에 세 시간에 걸쳐 1만여 발의 총탄을 퍼붓는 위협사격을 가했다. 위협사격이 멈추고 얼마 뒤 38도선 남측 방향에서 두 사람이 푸른 깃발을 들고 나타났다. 유엔한국위원단 서기국 실무자와 통역관이었다. 파견원들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평화통일방안이 담긴 문서 한 통을 전했다.

이튿날 6월 11일 오전 10시, 파견원 세 사람은 평화통일방안을 남측 각계에 전달하기 위하여 38도선을 넘었다. 38도선을 지나 서울을 향하여 약 1km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경찰은 그들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5.30 총선 이후 국회에 기대를 걸다

파견원이 체포된 날로부터 닷새 뒤인 1950년 6월 16일 이승만은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서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대한민국 국회에 합류해야 할 것이다. 북한 국민이 선출하면 그가 누구든 포용하겠다. 그들이 반성하고 새 국가를 건설하는데 헌신한다면 그들에게 적당한 직위를 허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남북이 합의한 평화통일제안을 전면부정하는 이승만의 기자회견이 진행된 날, '조국전선' 중앙위원회는 제7차 중앙위원회를 소집하고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그 결정서에 담긴 중요한 내용은, '조국전선'이 평화통일과업을 최고인민회의에 공식 제기한 것이다. 이것은 남북합동 통일협의기구의 노력이 한계에 이르렀으니, 이제 최고인민회의가 나서서 평화통일과업을 수행해주기를 요청한 것이다.

평화통일과업을 최고인민회의에 요청한 것은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마지막 방도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남북합동 통일협의기구가 평화통일방안을 제기하는 동안에 남측 정치권에서 예상하지 못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 변화는, 1950년 5월 30일 남측 총선거에서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주의계열의 정치활동가들이 제2대 국회의원으로 상당수 선출된 것이다. 극우반공세력의 테러와 구속이 난무하는 정치적 암흑기에,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정치세력이 총선승리를 거둔 것이다.

당시 극우반공정치권은 여당인 대한국민당(자유당의 전신)과 야당인 민주국민당(한국민주당의 후신)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두 당이 내세운 총선후보 가운데 당선된 사람은 48명밖에 되지 않았다. 두 극우반공정당의 득표율은 합해서 19.5%에 머물렀고, 제2대 국회의석 210석 가운데 22.8%밖에 차지하지 못하였다.

진보성향이 있는 정당을 불법화한 조건에서 진보성향의 정치인들은 무소속으로 출마할 수밖에 없었는데, 무소속 후보들의 득표율은 62.9%, 의석수는 126석(60%)에 이르렀다. 5.30 총선에서 당선된 조소앙, 장건상, 원세훈, 엄항섭, 조봉암, 여운홍, 윤길중 등은 일제식민지시기에는 항일운동에, 미군정시기에는 좌우합작 또는 남북협상에 참가하였고, 단독정부가 세워진 뒤에는 자주독립, 평화통일, 민주개혁을 지향해온 민족주의계열에 속한다.

원내진출에 성공한 민족주의계열의 정치인들은 몇 갈래 분파로 갈라져 있었지만, 만일 그들을 중심으로 무소속 의원들이 정치연합을 실현할 경우, 57석밖에 되지 않는 극우반공정치권을 제압할 수도 있었다.

단일입법기관을 세우기 위한 정치일정

1950년 6월 19일은 제2대 국회 개원일이었다. '조국전선'의 요청을 받은 최고인민회의는, 국회 개원일에 맞춰 평양에서 상임위원회를 소집하고, 최고인민회의가 국회에 보내는 제안서를 채택하였다. '평화적 통일의 추진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작성된 제안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최고인민회의와 국회를 단일입법기관으로 통합한다.

2. 단일입법기관은 단일헌법을 채택하고 임시정부를 구성한다.

3. 단일헌법에 의거하여 남북총선을 실시한다.

4. 평화통일을 방해하는 이승만을 비롯한 9명을 체포한다.

5. 평화통일과 관련된 대책을 1950년 8월 15일까지 실시한다.

6. 국회가 이 제안에 동의할 경우, 최고인민회의는 교섭을 위해 1950년 6월 21일까지 대표단을 서울에 보내든가 또는 국회 대표단을 평양에서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

위의 평화통일방안에서 주목하는 것은 통일방안에서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변화된 내용은 남북총선거를 통해서가 아니라, 최고인민회의와 국회를 통합해서 단일입법기관을 세우자는 것과 광복 5주년까지 평화통일과업을 수행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국회는 최고인민회의가 만나자고 제의한 1950년 6월 21일까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950년 6월 23일 평양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김두봉은, 평화통일제의에 대해 국회가 회답을 보내지 않은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기자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최근 남조선의 좌익정당, 사회단체들과 인민의 지망에 근거하여 상임위원회가 평화적 통일 추진에 관한 문제를 직접 남조선 국회에 제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것은 우리가 남조선 국회 안에 조금이라도 민족적 양심이 있는 분자들이 있다면 응당 우리 제의를 지지하여 나서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조선 국회는 전혀 무권리한 것이며 헌법에 규정된 바와 같이 최고입법기관이 아니라 이승만 통치의 부가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짐작하건대 남조선 국회는 평화적 조국통일을 해결하기에는 무능력할 뿐아니라 그를 해결하려고도 한 것 같지 않다."

단일입법기관을 세우는 평화통일방안은,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이 서울에 가서 국회와 만나 통합문제를 푸는 것이었는데, 그 대표단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서울에 가는 것은, 김두봉의 기자회견 발언에서 나타난 것처럼,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의 서울방문계획을 실현할 비상대책을 요구하였다.

단일입법기관을 세우기 위한 비상대책

1950년 6월 15일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인민군 총참모부의 3단계 작전계획에 관한 정보보고서는,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의 서울방문계획을 실현할 비상대책에 관한 것이었다. 그 비상대책은 1950년 6월 25일에 개시하여 7월 25일 이전에 모두 끝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은 예하 부대장들에게 보낸 작전명령서에서 비상대책이 두 주 안에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비상대책이 7월 10일쯤 끝나야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이 서울에 가서 국회의원들과 합의하여 단일입법기관을 세우고, 단일헌법 제정과 임시정부 구성을 추진하여 광복 5주년에 나라의 통일을 선포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50년 6월 23일 개성지구에 주둔한 인민군 제6사단의 대대장급 이상 군관회의에서 김두봉은 이렇게 연설하였다. "(줄임) 6월 14일에는 다시금 공화국의 최고인민회의와 남조선의 2대 국회와의 합작제의를 하였으나 거부되어버렸습니다. (줄임) 이제는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릴 수 없습니다. (줄임) 부득이 해방전쟁을 개시하게 되는데, 일주일 동안만 서울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줄임) 거기서 남조선 국회를 소집하여 대통령을 새로이 선출하고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정부가 통일이 되었음을 세계 만방에 알리면 어느 외국도 우리를 간섭,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줄임)"

단일입법기관을 세우기 위한 비상대책 1단계는, 인민군이 옹진반도에 주둔하는 한국군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옹진반도를 중시한 까닭은, 인민군이 개성을 거쳐 서울로 기동하는 경우, 옹진반도에 주둔하는 한국군이 남하하는 인민군의 배후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비상대책 2단계는, 중부전선으로 남하한 인민군이 한강 이남지역을 장악하여 이승만 정권의 서울탈출을 막고, 서부전선으로 남하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비상대책의 마지막 단계는, 서울을 포위점령한 뒤에 지방의 대도시와 주요항구를 점령한다는 것이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느 도시와 항구를 점령한다는 작전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서울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점령작전계획을 아니라 통일을 선포한 뒤에 추진할 후속조치만 구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950년 6월 25일 직전에 인민군에게 내린 정찰명령서와 작전명령서에는 서울 이남지역의 작전계획이 없었다. 비상대책에는 9만 명도 채 되지 않는 일부병력만 동원되었다. 인민군이 서울 북부의 창동방어선을 돌파하였을 때, 민족보위상 최용건은 이승만에게 항복하라는 라디오방송을 하고, 서울에 도착하여 중앙청에서 축하연을 가졌다.

148명은 달아나고 62명만 남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남하하지 않고 서울에서 비상대책을 수행하였는데, 그것은 잠적한 국회의원들을 모으는 것, 그리고 북측이 평화통일을 방해하는 '민족반역자'로 규정한 이승만을 비롯한 9명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민군이 서울에서 찾은 국회의원은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있다가 인민군이 석방한 14명을 포함하여 62명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 국회의원 148명은 이미 서울을 빠져나간 뒤였다. 이들이 서울을 재빨리 빠져나갈 수 있었던 까닭은, 비상대책이 예상치 못한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비상대책에 따르면, 중부전선으로 남하하여 춘천을 '해방'한 인민군 제2사단과 홍천을 '해방'한 제7사단이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강 이남지역을 장악하여 이승만 정권의 서울탈출을 막는 것이었다. 그런데 춘천지역을 지키던 한국군 제6사단이 격렬한 방어전으로 인민군 제2사단의 남하를 막는 바람에, 홍천으로 향하던 제7사단을 춘천으로 급히 투입해서 춘천을 '해방'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비상대책에서 예정된 시간이 지났고 국회의원들은 서울을 빠져나갔다.

최고인민회의와 국회를 통합하여 단일입법기관을 세우는 평화통일방안을 추진할 수 없게 되고, 더욱이 1950년 6월 30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Harry S. Truman)이 지상군 출병명령을 내리고 7월 1일 오전 8시 45분 지상군 선견대 스미스 특공대가 부산에 도착하자, 북측은 같은 날 전시총동원령을 내렸다. 전면전은 6월 25일이 아니라 7월 1일에 일어났다.

만일 인민군 제2사단과 제7사단이 중부전선으로 남하하여 예정된 때에 한강 이남지역에 포진하였더라면, 최고인민회의와 국회를 통합한 단일입법기관이 세워지고, 광복 5주년을 맞은 수도 서울에서는 단일입법기관이 임시정부수립을 선포하였을지 모른다. (통일뉴스 2008년 8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