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만에 다시 만나는 진보정치의 개척자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잊을 수 없는 ‘화두’

모시 바지저고리 차림에 흰 고무신을 신고 말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사형수가 있었다. 두 눈은 광목천으로 가려졌고, 목에는 오랏줄이 걸렸다. 숨막히는 정적 속에 몇 초가 지났을까, 갑자기 마룻바닥이 덜컹 열리자 그의 몸은 밑모를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3분, 극우반공독재권력은 진보정치와 평화통일을 위해 살았던 죽산 조봉암의 목숨을 그렇게 앗아갔다. 그의 나이 예순 한 살이었다.

일제식민지시기에 사회주의계열의 항일운동가로, 8.15 해방 직후에 민족통일전선운동에 참가한 정치활동가로, 1948년에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단독정부에 발을 들여놓은 ‘전향정치인’으로, 그리고 1950년대에는 진보정치의 구심으로 살아온 조봉암. 그는 이 나라의 남과 북에 두 기의 무덤을 남긴 특별한 사연만으로도 우리 시대가 기억해야 할 역사적 인물이다.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 묘지공원 어느 언덕에는 수인번호 2310을 가슴에 붙이고 처형당한 그의 유해가 누워있고, 평양에 있는 가묘에는 남북으로 갈라진 나라의 운명을 아파하며 끝내 잠들지 못하는 그의 넋이 숨쉬고 있다.

1950년대 후반 이 땅의 정치권에서 격렬한 충돌의 불꽃을 일으킨 것은 조봉암 대 이승만의 대립구도였다. 조봉암은 참신한 진보정치의 대명사이었고, 이승만은 부패한 극우반공독재의 대명사였다. 경찰력에 의존하여 지탱하고 있었던 극우반공 독재권력은, 미국 중앙정보국의 배후조종을 받은 ‘공안당국자들’에게 지령을 내려 조봉암을 교수형에 처하였으며, 그가 이끄는 진보당을 강제해산하였다. 조봉암이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숨을 거둔 때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오늘, 이 나라 진보정치운동이 진보당을 새삼스럽게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전쟁과 학살 속에서 숨죽이던 진보정치의 동맥을 다시 뛰게 하고, 진보정치운동에 재기의 활력을 불어넣어준 것이 고스란히 진보당의 공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발표된 진보당 관련자료들은 거의 모두 조봉암 사형과 진보당 강제해산에 얽힌 ‘진보당 사건’의 사실관계를 밝히는 것에 붓끝을 모으거나, 진보당을 사회민주주의 칫수에 맞춰 마름하는 것으로 자족하였다.

그러나 관행처럼 굳어진 듯한 인식의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두 개의 물음표와 선뜻 마주치게 되나니, 문제제기와 문제의식의 물음표이다. 문제제기란 진보당을 사회민주주의 칫수에 맞춰 마름한 것이 과연 옳은 평가인가 하는 것이고, 문제의식이란 진보당이 맞물려놓은 평화통일강령과 진보정치강령의 상관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논제를 꺼내놓는 것은, 1950년대의 진보정치운동을 과거사로 만나려는 것이 아니라, 진보당이 남긴 ‘화두’를 재해석의 시선으로 만나려는 것이다.

진보당을 감싼 껍질

진보당을 사회민주주의 칫수로 마름한 기존의 평가는 옳은 것일까? 이 문제를 논하려면, 먼저 사회적 민주주의, 또는 줄여서 사회민주주의, 더 줄여서 사민주의라고 부르는 정치이념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터이다.

설명을 요구하지 않을 만큼 분명하게, 사회적 민주주의(social democracy)와 혁명적 사회주의(revolutionary socialism)는 날카롭게 맞선다. 양자가 맞설 수밖에 없는 까닭은, 전자가 후자를 수정(revise)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수정이라는 말은 바르게 고친다는 사전적 의미를 담고 있지만, 이념적 대립관계에서는 변질이라는 뜻을 담게 된다. 수정이라는 말 속에 담기는 것은, 사회주의 이념에서 혁명적 요소를 제거하고, 혁명적 요소가 제거된 사회주의로 자본주의체제를 점진적, 평화적으로 개량하여 ‘모든 인민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복지사회’를 세울 수 있다고 믿는 사민주의자들의 정치적 신념이다. 사회주의이념의 수정과 자본주의체제의 개량을 추구하는 정치이념을 통칭하여 사민주의라 한다.

지금까지 진보당에 관한 연구에서 사민주의적 평가가 하나의 공식처럼 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진보당이 창당을 준비하던 때는 국제사민주의운동이 힘을 내던 때였고, 따라서 진보당은 그 운동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이다. 조봉암이 ‘우리의 당면과업’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때가 1954년 5월이었고, 진보당을 창당하기 위하여 40여 명의 혁신계 인사들이 모인 ‘광릉회합’이 1955년 9월 1일에 있었고, 그로부터 약 석 달 뒤인 12월 22일 진보당 창당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당시 서유럽과 아시아에서 사민주의가 힘을 내고 있었던 국제정치정세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닌게 아니라, 1951년 7월 2일 여러 나라 사민주의정당들이 독일 라인강변의 도시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라 부르는 국제사민주의강령을 선포하고 사회주의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을 결성하였을 때, 전쟁의 포성을 들으며 새로운 정치진로를 모색하던 조봉암은 1951년 10월에 ‘자유사회당’이라는 이름의 비합법정치조직을 결성하였다. 또한 1953년 1월 미얀마 양곤에서 인도, 일본,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미얀마, 이스라엘, 레바논의 사민주의정당들이 참가한 가운데 국제기구인 아시아사회당회의(Asian Socialist Parties Conference)가 결성되었던 것에 대해서, 진보당은 1956년 11월 10일에 발표한 창당선언문에서 “인도를 비롯한 이들 아시아제국이 중공의 볼쉐비즘적 노선과는 상반되는 사회적 민주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는 것은 역사의 현단계에 있어서의 특징적인 일대 사실이 아닐 수 없다”고 평가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실들은 진보당이 국제사민주의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말해준다.

둘째, 1953년 7월 27일 정전 이후 남측의 정치지형에서는 극우반공 독재권력이 사회주의 정치세력을 완전히 배제하고 지배권을 틀어쥐었다. 좌파민족주의계열의 정치활동가들과 사민주의계열의 정치활동가들이 재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탄압을 피해 정치활동을 접고 잠적한 사회주의계열의 정치인들은 극소수였다. 이 땅의 정치지형에서 좌파민족주의와 사민주의는 친화성을 갖는다. 그런 조건에서 좌파민족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이 진보정치운동의 재기를 꾀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위와 같은 국제적, 국내적 요인을 인정한다 해도, 진보당을 사민주의정당으로 단정하는 것은 너무 도식적이다. 물론 진보당이 사민주의를 표방하면서 ‘사회적 복지국가 건설’을 지향한다고 밝힌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진보당은 “낡은 자유민주주의 또는 개인적 민주주의를 폐기, 지양하고 분연 과감히 새로운 민주주의, 즉 사회적 민주주의에로 옮아서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하였고, ‘가장 민주적인 복지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그렇지만 진보당이 사용한 사민주의적 언어는 그 당이 간직한 알맹이가 아니라 그 당을 감싼 껍질이다. 진보당의 강령과 정책을 다시 분석하여 알맹이와 껍질을 가려보는 새로운 시각이 요구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진보당은 겉으로 사민주의를 표방하였으나, 실제로 추구한 것은 사민주의가 아니었다.

그 이름에 채워넣은 내용

진보당은 자기가 추구한 “사회적 민주주의는 평등적 민주주의이며 동시에 계획적 민주주의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진보당에 따르면, “사회적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 즉 다수인의 자유를 의미하며, 따라서 그것은 사람의 자유와 평등의 실천적 구현을 위한 평등적 민주주의이다. 그리고 사회적 민주주의는 동시에 계획과 통제의 제원칙에 입각하는 계획적 민주주의이다. 계획과 통제는 자본주의경제에 있어서의 모순과 무정부성을 극복, 지양하기 위해서 (줄임) 불가결한 것이다.”

인용문에 나타난 것처럼, 진보당은 시장경제의 모순과 무정부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중앙집중적 계획경제를 추구하려고 하였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진보당의 정치강령은, 시장경제에 기반을 두고 계획경제를 부정하면서 다만 ‘생산수단의 공공적 소유’를 부분적으로만 허용하는 사민주의강령과 명백히 다르다. 겉으로는 사민주의와 같으나 속으로는 그것과 다른 진보당의 정치노선을 진보적 민주주의(progressive democracy)라 한다. 진보당의 정치노선을 진보적 민주주의라고 보는 논거는, 그 당의 강령과 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보당의 강령은 생산분배의 합리적 계획, 민족자본의 육성, 그리고 농민, 노동자, 모든 문화인 및 봉급생활자의 생활권 확보를 천명하였는데, 이 3대강령을 다르게 표현하면, 계획경제, 민족자립경제, 각계층 근로대중의 생활권 보장이다. 이것은 진보적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중요산업 국유화강령, 경제자립강령, 민생보장강령과 표현방식만 다를 뿐 내용적으로는 어긋남없이 들어맞는다.

진보당의 경제정책은 진보적 민주주의의 성격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낸다. 그 경제정책은 교통, 체신, 운수, 은행 등 중요산업부문과 거대한 기업체를 국유화하며, 국가자본과 외국원조에 의해 필요한 산업부문을 신설하고 이를 국유화, 국영화하고, 중소기업을 국가적 지도와 원조를 통하여 보호, 육성하는 것이다.

진보당의 강령과 정책에 따르면, 세 종류의 생산수단 소유형태가 공존하게 된다. 그것은 중요산업과 독점대기업의 국유화(국가적 소유), 공공적인 성격을 지닌 대기업의 공유화(공공적 소유), 일반대중의 생산재 및 소비재 생산부문의 사유화, 그리고 건실한 대기업 및 중소기업의 사유화(사적 소유)가 공존하는 경제체제인데, 이것이야말로 진보적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생산수단 소유형태이다.

중요산업의 국유화강령 및 계획경제강령은, 2000년 1월 30일 이 나라 진보정치운동사에 새로운 장을 열어놓은 민주노동당에 의해서 다시 공론화의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8.15 해방정국에서는 심지어 우익정당들까지도 그 강령을 공인한 바 있다. 이를테면, 가장 완고한 우익정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이 1945년 9월 16일에 발표한 당의 정책에도 “주요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가 들어있고, 한국민주당과 우익의 앞자리를 다툰 한국독립당도 1945년 8월 28일 5차 대표자대회에서 “계획경제제도를 확립하여서 균등사회의 행복생활을 보장할 것”이라는 강령을 채택하고, “교통, 광산, 산림, 수리, 운수, 전기, 어업, 농업 등 전국성의 대규모 생산기관은 국가경영”으로 규정한 정책을 내놓을 정도였다.

진보당이 중시한 농업정책 역시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진보당은 “우리는 농촌과 농민에 대한 원시적인 수탈을 강력히 배제할 것이며 경자유전의 원칙 하에 농업생산력을 증강시키고 확대재생산을 이룩함으로써 농민생활 수준의 급진적인 향상을 도모하도록 하려는 것이다”고 밝혔다. 그에 따라, 농촌고리채 통제와 현물세 폐지, 부재지주의 토지소유 금지와 소작 금지, 영농자재 및 영농기구를 공급하고 축산과 부업을 장려하기 위한 농촌협동조합 조직, 자연재해로 농경지가 피해를 입었을 때 정부가 농민생활을 보장해주는 농업보험제 도입, 문화오락시설과 보건위생시설과 탁아시설을 확충하는 농촌근대화사업 추진, 농촌협동조합의 임야 공유제 도입 등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진보당은 자기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이름을 사민주의라 불렀지만, 그 이름에 채워넣은 내용은 명백하게도 진보적 민주주의였다. 그런데도 진보당을 사민주의정당으로 규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인 까닭은, 사민주의나 좌파민족주의에 기울어진 시각으로 진보당을 연구해왔기 때문이며 동시에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역량의 보위, 양대강령의 맞물림

극우반공 독재권력이 배타적 지배권을 장악한 1950년대의 정치암흑기에 진보정치운동이 설 수 있는 공간은 너무도 비좁고 험난하였다. 그 공간에서 조봉암과 진보당은 극우반공 독재권력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보위전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조봉암은 일제식민지시기에 사회주의계열의 항일운동가로 활동하였던 경력이 있기 때문에, 극우반공독재권력의 탄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남달리 애써야 하였다.

이를테면, 조봉암은 1952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면서 악명높은 서북청년단에서 부단장을 지낸 김성주를 선거본부 사무국장에 앉힌 적도 있었다. 또한 합법정당인 진보당이 비밀당원제를 채택한 것도 보위전술의 일환이었는데, 진보당 비밀당원은 약 200명에 이르렀다.

진보당의 보위전술 가운데서 눈길을 끄는 것은 반공주의 표방이다. 특히 조봉암이 조선공산당과 갈라선 것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나선다. 조봉암이 1946년 5월 7일 ‘박헌영 동무에게 보내는 사신’이라는 글을 대중언론에 내고 조선공산당과 갈라선 것을 두고,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였다느니 또는 사민주의로 전향하였다느니 하는 평가가 일반적이지만 그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조봉암은 당시 조선공산당 지도부를 장악하고 인민위원회,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자파 세력확장에 골몰하며 패권주의 전횡을 부리던 박헌영파와 갈라서면서 조선공산당을 떠난 것이지, 반공주의자로 변신하거나 사민주의자로 전향한 것이 아니다.

서유럽 사민주의정당들은 예외없이 반공주의를 부르짖으며 냉전체제에 매달려 있었지만, 진보당의 반공주의 표방은 자유당과 민주당이 서로 결탁한 보수대연합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진보당 안에 반공주의 정치노선을 추구하는 사민주의분파가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진보당 문서들에서 눈에 띄는 반공주의적 언어는 반공주의 정치노선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당역량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보위전술이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평화통일강령을 중시한 진보당이 그 강령과 배치되는 반공주의강령을 채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런데 진보당에 관한 기존의 연구성과를 살펴보면, 이승만정권은 진보당의 평화통일강령을 탄압의 빌미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진보당 핵심인사들의 공판기록에서는, 진보당의 평화통일강령만이 아니라 진보정치강령에 대해서도 탄압의 구실을 찾아보려고 시도하였음이 드러나지만, 진보당을 강제해산시킨 결정적인 탄압표적은 평화통일강령이었다.

이승만정권이 진보당의 진보정치강령을 탄압표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평화통일강령을 탄압표적으로 삼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평화통일강령이 이 땅의 낡고 썩은 극우반공독재체제를 새로운 민주주의체제로 교체하는 진보정치강령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평화통일강령이 극우반공독재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까닭은, 평화통일이 진보정치와 무관하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당이 집권하는 진보적 정권교체를 통하여 실현되기 때문이다.

김대중정권이나 노무현정권 같은 중도우파정권은 화해협력정책을 수행하면서 평화통일의 길을 예비하는 것으로 자기의 역사적 임무를 다하게 되는데, 그 두 정권이 10년 동안 추진해온 예비작업은 이명박정권 같은 보수우파정권이 들어설 때 전면 중지될 만큼 맥없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오직 진보정권만이 평화통일의 역사적 임무를 완수할 수 있으며, 평화통일실현과 진보적 정권교체를 떼어놓는 것은 이 나라 역사발전 전망에 대한 오판이며 몰이해이다.

평화통일 실현과 진보적 정권교체가 맞물리는 까닭은, 이 땅의 보수정치세력이 의존해오는 분단체제와 전쟁체제가 평화통일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무너지고,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진보정권이 들어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당은 나라를 통일하는 평화통일의 역사적 임무와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진보정치의 역사적 임무를 하나의 강령으로 통합하였다. 진보당은 창당선언문에서 평화통일실현과 진보적 정권교체의 상관관계를 가리켜, “민주세력이 결정적으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평화적 방식에 의한 조국통일의 실현”이라고 표현하였다. 진보당이 남긴 ‘화두’는, 평화통일과 진보정치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임을 말해준다.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해가는 과정에서 나라가 평화적으로 통일되고, 평화통일이 실현되어가는 과정에서 진보정치세력이 집권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평화통일과 진보정치의 맞물림을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실천하는 역사적 임무는, 진보당이 이승만정권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고 강제해산당하는 바람에 수행되지 못하였다. 1956년 11월 10일에 창당되었다가 1958년 2월 25일에 정당등록취소로 강제해산당하였던 진보당이, 불과 1년 3개월 동안에 평화통일과 진보정치의 맞물림을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그것을 당의 강령과 정책에 담아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평화통일과 진보정치의 맞물림이 진보당이 강제해산당한 이후 후대에게 ‘화두’로 전해진 까닭이 거기에 있다.

역사적 평가에서 역사적 임무에로

극우반공독재권력의 탄압으로 비록 1년 3개월 밖에 활동하지 못하고 자기의 존재를 마치었으나, 진보당은 평화통일과 진보정치를 맞물려놓은 ‘화두’를 이 나라 진보정치운동에 제기한 것만으로도 진보정치의 개척자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 진보당이 제기하였으나 풀지 못한 그 ‘화두’를 집단적으로 기억하고,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정치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오늘 이 땅의 진보정치운동이 힘껏 떠맡아야 할 역사적 임무이다.

진보당이 활동하였던 때로부터 어언 반세기가 지난 오늘, 나라 안팎의 정세는 참으로 몰라보게 바뀌었다.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이 발표되어 평화통일정세가 획기적인 진전을 보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보수양당구도에 돌파구를 내며 진보정치운동을 떠밀고 나가는 중이다. 9.19 공동성명에 따라 비핵화정세가 진전되면서 낡은 정전체제를 새로운 평화체제로 교체하는 전망이 열렸으며, 그로써 평화통일과 진보정치를 실현하기에 유리한 정세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진보당이 남긴 평화통일과 진보정치의 ‘화두’를 오늘의 진보정치운동이 절실한 심정으로 마주해야 하는 까닭은, 비핵화정세의 진전에 따라 평화통일과 진보정치를 실현하기에 유리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당은 창당선언문에서 “광범한 근로대중의 이익실현을 위하여 노력하고 투쟁하는 근로대중 자신의 민주적, 혁신적 정당”이라고 밝혔고,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진보적 근로인뗄리, 중소상공업자, 양심적 종교인 등의 광범한 근로대중의 정치적 집결체”로서 “국민대중의 이익실현을 위해 투쟁한다”고 선포하였다. 이것은 조봉암이 이끈 진보당이, “근로대중을 중심으로 한 전인민의 정치적 집결체이며 근로대중을 중심으로 한 전인민의 완전해방을 위한 정당”임을 선포한, 여운형이 이끈 조선인민당의 진보적 대중정당노선을 계승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진보적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은 반세기 전이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진보적 대중정당이 추구하는 최고강령이다.

1956년 11월 10일 서울시공관에서 진보당 창당대회의 막이 오를 때 장내에 울려퍼진 묵념시의 한 구절 그대로, “흉흉한 민심들이 가득한 찢기운 이 강토를 표독히 흘러내리는 검은 회오리바람을 뚫고 찬란히 솟아오르는 새로운 우리들의 태양”은 진보정치의 앞길에 빛날 것이다. (통일뉴스 2008년 7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