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 저항운동'은 무엇을 남겼는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도덕적 승리와 허약한 정치공세

2008년 5월 1일부터 6월 10일까지 40일 동안 이 나라의 광장과 거리에서, 그리고 인터넷 공간에서 일어난 대사변을 이론적으로 해명하려는 토론이 분분하다. 그러한 토론들 가운데서 돋보이는 것은, 분노의 광장, 저항의 거리, 소통의 인터넷에 수십만 명이 운집한 대사변을 국민대중의 항의표명과 의사소통으로 한정하여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물론 이론적 해명에서 일차적으로 중시하는 것은, 이 땅의 국민대중이 자발적으로 광장에 운집하여 항의를 표명하였고 인터넷 공간에서 자율적으로 의사를 소통하였다는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중시해야 할 것은 항의표명과 의사소통에서 출발하여 저항운동으로 나아간 역동적인 발전과정이다. 이 글에서는 대사변을 '40일 저항운동'이라 부른다.

'40일 저항운동'이 남긴 성과들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운동이 거둔 도덕적 승리(moral victory)이다. 도덕적 승리란 시위군중이 경찰의 야만적인 강제진압과 강제해산에 비폭력으로 대응하여 도덕적으로 우위에 선 것을 뜻한다. 아닌게 아니라, 국민대중이 밝힌 촛불은 저항운동 첫날부터 도덕적 승리의 상징으로 등장하여 광장과 거리에서, 인터넷 공간에서 분노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40일 저항운동'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대중의 항의표명에 귀를 막고 국민대중과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차츰 반정부운동으로 발전하였다. '40일 저항운동'이 반정부운동으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은, 군중이 외친 '이명박은 물러가라'는 거대한 함성에서 입증되었다. 이 중요한 변화는 '40일 저항운동'이 정권퇴진이라는, 반정부운동의 전략목표를 제기하였음을 말해준다. '40일 저항운동'은 반정부운동의 전략목표를 제기함으로써 1960년 4.19 혁명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도달한 반정부운동의 최고발전단계인 정권퇴진투쟁에 성큼 다가설 수 있었다.

반정부운동이 정권퇴진이라는 전략목표를 향하여 나아갈 때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양대전략은 협상전략과 투쟁전략이다. 협상전략과 투쟁전략 이외에 다른 전략은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협상과 투쟁은 국민대중과 집권세력의 대립관계를 풀어내는 기본전략이다.

그렇다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중과 그것의 수입을 강행하려는 이명박 대통령 사이에서 협상이 가능하였을까? 대통령의 태도를 보면, 그와 국민대중 사이에서는 어떤 형태의 협상도 불가능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 까닭은, 그가 국민대중의 항의표명에 등돌리고 국민대중과 소통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소통거부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의 정치적 의미이다. 소통거부행위는 대통령에 대한 국민대중의 환멸과 분노를 증폭시킴으로써 결국 대통령이 스스로를 정치곤경에 빠뜨리는 자해행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의 정치적 자해를 바라보는 국민대중의 환멸과 분노가 집단행동으로 번져갈 때, '40일 저항운동'은 청와대를 겨눈 정치압박공세를 개시할 수 있었다.

정치압박공세란, 국민대중과 소통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자해하는 대통령을 협상요구전술로 압박해들어가는 것이다. 만일 '40일 저항운동' 기간에 협상대표단을 구성하여 대통령에게 직접협상을 요구하였더라면, 협상을 거부하는 그에게 사퇴압박을 가할 수 있었을 것이며, 사퇴압박공세는 '40일 저항운동'에 기폭효과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40일 저항운동'에서 직접협상요구전술은 찾아볼 수 없었다.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가 열심히 활동하였지만, 그 회의체는 전술적 판단을 담당할만큼 탄탄하게 조직되지 못하였다.

'40일 저항운동' 기간 동안 각계각층 대중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시민자유발언, 길거리토론, 인터넷 댓글달기를 매우 활발하게 진행하면서 분노와 저항을 고조시켰으나, 그 거대한 동력을 집적하고 분출하는 위력적인 전술은 없었다. 이 땅의 진보정치세력은 광장과 거리, 그리고 인터넷 공간에 넘치는 대중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하였을 뿐이다.

각계각층 대중이 반정부운동에 나섰을 때 직접협상요구전술을 이용하여 대통령에게 사퇴압박을 가하지 못한 것, 그것은 '40일 저항운동'이 도덕적 승리를 거두었으면서도 정치공세에서는 허약해진 원인으로 되었다.

역사적 경험에서 길어올린 진리

'40일 저항운동'이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틈에,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역사적 경험이 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1960년 4.19 혁명에서 전개된 정권퇴진투쟁과 정권교체과정이다. '40일 저항운동'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집단적 항의표명에서 출발하여 반정부운동으로 발전하였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군부독재연장을 반대하는 집단적 항의표명에서 출발하여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하였고, 1960년 4.19 혁명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집단적 항의표명에서 출발하여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6월 민주항쟁과 4.19 혁명이 진보적 정권교체라는 정치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중도에 좌절하였다는 점이다.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된 6월 민주항쟁의 앞길을 가로막은 장애물은 노태우가 발표한 6.29 선언이었고,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된 4.19 혁명의 앞길을 가로막은 장애물은 국회의 대통령 하야 촉구 결의였다.

정권퇴진투쟁과 정권교체과정이 복잡하게 뒤엉킨 그 시기의 역사적 경험을 직선화하면 아래와 같다. 6월 민주항쟁은 6.29 선언 발표→대통령 직선제 개헌→보수야당 분열→대선 실시→군부독재연장으로 이어졌고, 4.19 혁명은 국회의 대통령 하야 촉구 결의→과도정부 수립→내각책임제 개헌→총선 실시→보수야당 집권으로 이어졌다.

위의 역사적 경험에서 관심을 두어야 할 대목은,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사퇴한 직후에 보수야당이 집권한 과정이다. 그 정권교체과정을 살펴보면 이렇다. 1960년 4월 26일 국회 부의장(당시) 이재학의 사회로 진행된 국회 회의는 '이승만 즉시 하야 촉구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였다. 그 결의안이 통과되자마자, 이재학은 중진의원들 가운데 민주당 의원 7명, 자유당 의원 6명, 무소속 4명을 급히 불러모았다. 이재학까지 포함해서 18명의 국회의원은, 외무장관(당시) 허정을 수반으로 하여 과도정부를 내오기로 결정하였다. 과도정부수립문제를 국회의원 18명이 서둘러 결정한 것은, 무정부상태에 빠진 정국이 이재학의 정치선동에 좌우되어버린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정권교체시기에 전면에 나서서 과도정부수립문제를 좌우했던 이재학은, 4.19 혁명의 공격대상인 자유당에 소속되어 3.15 부정선거를 자행할 당시에 자유당 선거기획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검찰이 선거사범을 구속하기 시작하자 이재학은 의원직을 사퇴하고 5월 26일에 구속, 수감되었다. 4.19 혁명의 공격대상인 자유당이 파멸직전에 과도정부수립문제를 좌우한 것은, 그 혁명이 왜 좌절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해준다.

1960년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였고, 국회운영위원회는 여야의원 9명이 참가하는 '국회 내각책임제 개헌안 기초위원회'를 구성하기로 의결하였다. 민주당 의원 4명, 자유당 의원 4명, 무소속 1명으로 구성된 개헌안 기초위원회는 1960년 5월 11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는데, 국회는 6월 15일 개헌안을 의결하였고, 허정 과도정부는 새 헌법을 선포하였다. 이어서 7월 29일에는 새 헌법에 의거하여 총선을 실시하였고,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이러한 정권교체경험에서 돋보이는 것은, 국민대중의 반정부운동이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하였어도 그 운동의 정치적 대표체를 구성하지 못하면, 이미 해체과정에 들어간 집권여당이 보수야당과 야합하여 정권퇴진투쟁의 결과를 고스란히 가로채고 만다는 점이다. 국민대중의 반정부운동이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하였어도 반정부운동의 정치적 대표체를 구성하지 못하면, 4.19 혁명 당시나 그로부터 48년이 지난 오늘이나 마찬가지로 국민대중의 정치적 승리는 기대할 수 없다.

반정부운동의 정치적 대표체란, 진보정치세력이 쓰는 전문용어를 빌리면, 전선체이다. 오늘 진보정치세력이 무력하여 전선을 형성하지 못하였으므로, 각계각층 대중이 반정부운동에 나섰어도 전선체를 결성하지 못하였다. '40일 저항운동' 기간에 정치적 대표체를 구성하지 못한 근본원인은 진보정치세력의 무기력에 있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오해

'40일 저항운동' 기간에 국민대중은 시민자유발언, 길거리토론, 인터넷 댓글달기를 통하여 의사를 소통하고 항의를 표명하였다. 진보정치세력 일각에서는 국민대중이 보여준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집단행동을 직접민주주의(direct democracy) 실현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국민대중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의사를 소통하고 항의를 표명한다고 해서, 그러한 의사소통과 항의표명을 직접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과대평가이다. 국민대중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의사소통과 항의표명은 직접민주주의의를 실현해가는 하나의 방도이다.

또한 국민대중의 자율적인 군중집회를 진보정치세력의 체계적인 정치집회와 대비하면서, 앞의 것을 선진적 집회방식으로, 뒤의 것을 후진적 집회방식으로 보는 것은 오류이다. 진보정치세력의 체계적인 정치집회에는 의식화되고 조직화된 군중이 참가하기 때문에 시민자유발언과 길거리토론 같은 의견수렴절차가 생략되는 것이지, 체계적인 정치집회가 참가군중의 자율성을 제약하는 후진적 집회방식은 결코 아니다.

도리어 지적해야 할 것은 국민대중의 자율적인 군중집회에서 드러나는 한계이다. 자율적인 군중집회는 비체계적인 의견수렴절차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으므로 집단적 항의표명에서 멈추고 집단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인터넷 댓글달기는 인터넷이 국민대중에게 널리 보급된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의사소통방식이지만, 시민자유발언과 길거리토론은 이번에 처음으로 나타난 '신기한 현상'이 아니라 전통적인 군중집회방식이다. 이를테면 1898년 3월 10일 서울에서 열린 만민공동회가 각계각층 대중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이끄는 군중집회의 효시였다. 만민공동회는 같은 해 12월 25일 조선왕조 봉건정부가 탄압하여 강제해산되었지만, 당시 서울 인구의 17분의 1에 이르는 1만 명 대군중이 종로에 운집하였고, 42일 동안이나 철야시위를 진행하는 치열함도 있었다. 시민자유발언과 길거리토론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던 지난 시기에는 국민대중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군중집회를 열 수 없었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 대중통신수단인 인터넷과 손전화기를 이용하여 만민공동회식 군중집회를 열 수 있었다.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은 국민대중의 의사소통과 항의표명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대중이 낡은 지배권력기구를 해체하고 새로운 자율통치기구를 세울 때, 오직 그러할 때 자율통치기구에 의해서, 자율통치기구를 통해서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국민대중이 자율통치기구를 세울 때, 정당정치(party politics)와 의회정치(parliamentary politics)에 의존하는 대의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가 폐기되고, 평의회정치(council poltics)에 의거한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된다.

평의회정치의 역사적 유형은 1871년 파리꼬뮌(Paris Commune), 1917년 사회주의10월혁명 시기의 쏘비엣(Soviet), 1936년 스페인내전 시기의 반파시스트 민병대위원회(Anti-fascist Militia Committee), 1970-1973년 칠레 아옌데 정권 시기의 산업지구대(Cordones industriales) 등이 있다.

정당정치와 의회정치에 의존하는 대의민주주의가 난해한 정치공정을 거쳐서 실현되는 것처럼, 평의회정치에 의거하는 직접민주주의도 그러하다. 더구나 대의민주주의를 폐기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급진적인 정권교체과정은 더 말할 나위 없이 난해하고 어렵다. 이 땅의 진보정치세력이 '40일 저항운동' 기간에 이루어진 국민대중의 의사소통과 항의표명을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으로 과대평가한 것은, 국민대중이 낡은 지배권력기구를 해체하고 새로운 자율통치기구를 세우기까지 전개되는 발전과정이 얼마나 어렵고 난해한지를 알지 못한 정보제약에서 비롯된 것이다.

승리하지 못한 두 가지 전술

국민대중과 대통령 사이에서 어떠한 형태의 협상도 가능하지 않다는 말은, 국민대중에게 투쟁을 선택할 가능성만 남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40일 저항운동' 기간 내내 국민대중이 분노의 광장과 저항의 거리에 운집하였건만, 정작 있었어야 할 정치투쟁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40일 저항운동'이 곧 정치투쟁이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군중이 '이명박은 물러가라'고 외친 것은 정치행동이지 정치투쟁은 아직 아니다. 물론 넓은 의미의 정치행동에 정치투쟁도 포함되지만, 대통령에게 항의를 표명하는 정치행동을 넘어서, 저항의사를 전략과 전술을 통하여 관철하는 능동적이고 조직적인 정치행동을 정치투쟁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반정부운동이 투쟁전략에 집중하면 그 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전술이 필요하다. 그런데 '40일 저항운동'은 광장운집전술과 비폭력대응전술밖에 알지 못하였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21년만에 가장 많은 군중이 참가한 것은 광장운집전술의 승리였고, 진압경찰이 물대포를 쏘고 방패를 휘두를 때 평화적 시위로 대응한 것은 비폭력대응전술의 승리였다.

그러나 현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광장운집전술과 비폭력대응전술로는 도덕적 승리를 거둘 수는 있어도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는 없다. 그 까닭은, 그 두 가지 전술이 '준법질서의 허용범위'라는 결정적인 제약에 묶여있는 '성숙한 시위문화'이기 때문이다. 만일 반정부운동의 목적이 국민대중의 집단적 항의표명에 한정된다면, 그 두 가지 전술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정권퇴진이라는 전략목표를 제기한 반정부운동이 그 두 가지 전술에만 의존하는 것은 전술문제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반정부운동의 투쟁전략이 그 두 가지 전술에 국한될 때, 그 운동이 노리는 정치압박효과는 극도로 제한된다. '40일 저항운동'이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 없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40일 저항운동'이 정치적 승리를 거두려면, 전술문제를 해결하여야 하였는데, 참가군중에게 전술적 판단을 맡기는 것은 무리이다. 시민자유발언, 길거리토론, 인터넷 댓글달기는 전략과 전술에 관한 다양한 토론이 오가는 소통공간이지 전술문제를 결정하는 작전회의는 아니다. 반정부운동의 전략적 사고와 전술적 판단을 시민자유발언, 길거리토론, 인터넷 댓글달기로 대체하는 것은, 자연발생성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반정부운동의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정권퇴진에서 정권교체로 이어지는 격동적인 과정은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생산공정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난해하고 긴박한 과정이다. 자동차 생산공정에 과학적 사고와 기술공학적 판단이 필요한 것처럼, 정권퇴진에서 정권교체로 이어지는 과정에도 전략적 사고와 전술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전략적 사고와 전술적 판단은 누가 담당하는 것일까? 터놓고 말하자면,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전술적으로 판단하는 주체는 '40일 저항운동' 기간 내내 존재하지 않았다. 국민대책회의가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하였지만, 그 회의체는 촛불문화제를 원만하게 진행하는 최저임무에 집중해왔을 뿐 전략적 사고와 전술적 판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40일 저항운동'에 참가한 국민대중이 '이명박은 물러나라'고 외치기 시작할 때, 정권퇴진투쟁에 요구되는 전술을 내와야 하였는데, 국민대책회의에게 그러한 역할과 임무를 기대하기란 사실상 힘들었다.

진보정치세력이 빠지기 쉬운 선동주의적 편향을 극복한다고 하면서, 대중의 자연발생성에만 의존하려는 또 다른 편향에 빠져드는 '패배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 그것은 '40일 저항운동' 이후 진보정치세력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졌다.

대안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군중은 '청와대로 가자'는 구호를 외쳤고, 그 중 일부는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하다가 경찰과 충돌하였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하는 문제를 놓고 찬반토론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청와대 방향 진출전술은, 전술문제에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성난 군중이 청와대에 밀고 들어가 난동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시위군중이 청와대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청와대 방향 진출전술의 의의는 물리적 난입기도가 아니라 정치적 사퇴압박이다. 위에서 논한 직접협상요구전술과 더불어 청와대 방향 진출전술은, 대통령에게 가장 강력한 사퇴압력을 가하는 압박전술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직접협상요구전술과 청와대 방향 진출전술이 배합될 때, 대통령에게 밀려드는 사퇴압력은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청와대 방향 진출전술은 '40일 저항운동'이 반정부운동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전술이다.

그런 까닭에, 청와대 방향 진출의 전술적 의의를 일찌감치 간파한 공안당국은, 광장집회와 거리행진에 대해서는 무대응 비접촉전술로 대응하여 사실상 방치하면서도 청와대 방향 진출시도에 대해서만은 초기부터 예방적으로 차단하는 폭력진압전술로 대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군중이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할 경우, 쌍방의 물리적 충돌은 불가피하다.

군중이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충돌은, 국민대책회의의 비폭력대응전술과 경찰의 무대응 비접촉전술이 한꺼번에 폐기되는 것을 뜻한다. 물리적 충돌에 대비하여 아무런 대책도 갖지 못한 국민대책회의가 청와대 방향 진출전술을 운용하지 못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이제 대안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한 가지 대안은 협상전략과 투쟁전략을 포기하고 도덕적 승리를 자축하는 촛불문화제를 장기화하는 것이다.

만일 청계광장에서 촛불문화제를 다섯 해 동안 계속한다면, 반정부운동이 도덕적 승리를 거둘 수는 있겠지만 정치적으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촛불문화제의 장기화는 정치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일종의 소모전이므로, 소모전이 장기화될수록 불리해지는 쪽은 반정부운동이다. 촛불문화제를 장기적으로 계속하면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은, 소모전에 지친 군중이 흩어져버리는 원심력 작용을 계산에 넣지 않은 단견이다. '차분한 촛불문화제'와 '성숙한 시위문화'를 장기화하는 것은, 전략적 사고와 전술적 판단을 포기하고 시민자유발언, 길거리토론, 인터넷 댓글달기에 관행적으로 집착하는 것으므로 대안으로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다른 대안이 있을까? 지난 6월 12일 기자회견에서 국민대책회의는 대통령에게 6월 20일까지 부쉬 정부와 쇠고기 수입문제를 전면재협상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면서, 전면재협상에 나서지 않을 경우 정권퇴진운동을 벌이겠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현재 전개되는 반정부운동의 전략목표가 정권퇴진임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40일 저항운동' 이후의 대안을 정권퇴진투쟁으로 정하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권퇴진이란 대통령의 사퇴를 뜻한다.

시위군중은 이미 '이명박은 물러나라'고 외쳐왔으므로, 국민대책회의는 한 발 늦게 정권퇴진투쟁을 선언하는 소극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투쟁을 밀고 나가는 조직태세를 갖추는 적극성과 주동성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정권퇴진투쟁의 조직태세를 갖추는 것은 '40일 저항운동'이 넘겨준 최대과제이며, 앞으로 반정부운동의 운명을 좌우할 결정적인 문제이다.

정권퇴진투쟁의 조직태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비상정치회의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비상정치회의 명칭은 거기에 참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합의하여 정하면 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대통령 사퇴촉구에 동의하는 정당과 사회단체가 비상정치회의를 구성할 필요성에 공감하고 폭넓게 결집하는 것이다.

비상정치회의를 구성하는 과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내야당인 민주노동당과 통합민주당, 원외야당인 진보신당이 참가하는 문제이다. 정당참가문제를 중시하는 까닭은, 반정부운동이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하였어도 그 운동의 정치적 대표체를 구성하지 못하여 결국 정치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과거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각 총사퇴를 촉구하기는 하나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지는 않는 통합민주당은, 국회로 돌아가서 한나라당과 타협할 생각에 젖어있기 때문에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비상정치회의에는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통합민주당이 참가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상정치회의를 구성하는 과제를 언제까지나 미루어놓거나 포기할 수는 없다.

통합민주당이 비상정치회의에 참가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반정부운동이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정권퇴진투쟁으로 격화되는 정도에 달려있다. 반정부운동이 격화되어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정권퇴진투쟁이 본격화될 경우, 통합민주당을 비상정치회의로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상정치회의의 구성이 최종적으로 완결되고,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최후의 결전'을 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각계각층 대중이 '이명박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하는 것이 청와대를 물리적으로 압박하는 유일한 전술이라면,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비상정치회의를 구성하는 것은 청와대를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유일한 전술이다. (통일뉴스 2008년 6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