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리코우 보고서와 백악관의 외교실험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국무부 삼인방'의 부쉬 설득

부쉬 집권 2기에 국무장관에 임명된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는 2005년 2월 25일 가장 가까운 자기 동료를 국무부 고문(Counselor)으로 지명하였으니, 그가 필립 젤리코우(Philip D. Zelikow)이다. 2001년 9월 11일 9.11 테러참사가 일어난 뒤, 미국 국방부의 선제공격전략에 조응하는 국무부의 외교정책을 내와야 하였던 라이스가 새로운 외교정책의 이론적 근거를 밝히는 임무를 젤리코우에게 맡길 만큼 그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

라이스가 국무장관에 임명되면서 부장관에 로벗 조울릭(Robert B. Zoellick), 고문에 젤리코우가 각각 임명되었는데, 부쉬 집권 2기에 미국의 외교정책을 재정립하는 임무를 수행했던 '국무부 삼인방'은 그렇게 등장하였다.

'국무부 삼인방'이 등장한 2005년 2월에 북측은 핵무기 보유 및 증산을 선언하였고, 그 선언의 충격파에 휘말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 충격선언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게 전략적 선택을 요구하였는데, 미국이 북측과 군사적으로 충돌하던지 아니면 북측과 외교적으로 협상하던지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야 하였다.

'국무부 삼인방'은 미국의 외교활동을 총지휘하는 임무를 맡았으므로 당연히 북측의 강공책에 대응하는 외교협상의 원칙과 방도를 모색하게 되었다. 미국 국무부가 북측 외무성과 협상하여 비핵화를 실현하려면, 핵무기 보유 및 증산을 선언한 북측의 대미강공책에 대처하는 외교대응책을 세워야 하였는데, 그 외교대응책을 보고서로 작성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 젤리코우이다.

젤리코우가 외교대응책 보고서를 마무리한 때는 2005년 늦은 봄이었다. '국무부 삼인방'은 그 보고서를 들고 부쉬를 만나 그를 설득하였다. 젤리코우가 훗날 언론에 밝힌 바에 따르면, 2005년 여름과 가을 국무부 고위관리들이 부쉬와 만나 외교대응책을 몇 차례 논의하였고, 부쉬의 동의를 얻어냈다고 한다. 그 무렵 언론에는 전혀 알려진 바 없으나, 젤리코우가 작성한 외교대응책 보고서가 부쉬에게 보고되고, 동의를 얻어내기까지 하였다는 사실이 돋보인다.

이 글에서는 그가 작성한 대북외교대응책 보고서를 '젤리코우 보고서'라 부른다. '젤리코우 보고서'는 클린턴 집권 2기에 대북정책조정관에 임명된 윌리엄 페리(William J. Perry)가 작성했던 '페리 보고서'에 견줄만한 대북정책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페리 보고서'가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대전환을 일으켰던 것처럼, '젤리코우 보고서'도 부쉬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대전환을 일으켰다.

'젤리코우 보고서'가 발휘한 영향력은, 2006년부터 조심스러운 변화조짐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해마다 새해 국정연설에서 북측을 비방해오던 부쉬는 2006년도 새해 국정연설에서는 북측을 비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년도 새해 국정연설에서 "북측이 핵야망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고 있다"고 밝혔던 비핵화에 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밀보고서, 변화를 일으키다

'국무부 삼인방'이 부쉬를 설득할 수 있었던 정치적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뜸 떠오르는 것은, 북측이 2005년 2월 10일에 핵무기 보유 및 증산을 선언한 뒤에, 녕변 원자로에서 폐연료봉 8천여 개를 꺼내어 재처리하기 시작한 대미강공책이다. 폐연료봉 재처리는 곧 핵무기 증산으로 이어질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하였음을 뜻한다는 점에서 더 할 나위 없는 대미강공책이었다.

핵무기를 이미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더 많이 만들겠다는 북측의 선언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게 던진 공갈 따위가 아니었다. 북측이 실제로 핵무기를 보유하였을 뿐 아니라 증산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라이스에게 보고된 때는, 북측의 충격선언이 나온 뒤 약 여섯 달이 지난 2005년 8월이었다. 2004년 1월과 2005년 8월에 녕변 핵시설을 방문한 미국의 저명한 핵과학자 씩프릿 헥커(Sigfried Hecker)가 2005년 8월에 라이스에게 대외비 방북보고서를 제출하였던 것이다. 그 방북보고서에 담긴 충격적인 사실은, "북측이 2년 뒤쯤 완공될 것으로 보이는 50MW 원자로 건설공사를 마치고 본격가동에 들어갈 경우, 2008년부터 해마다 핵무기 10개 씩 만들어낼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방북보고서에 나오는 2008년이라는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헥커는 2005년 11월 초 카네기 국제평화재단(CEIP)이 워싱턴에서 주최한 학술회의에 참석하여 자신이 석 달 전에 라이스에게 제출한 방북보고서 내용을 공개하였다. 헥커가 공개한 내용이 워싱턴포스트 2005년 11월 9일자 보도를 통해서 알려지자 워싱턴 정가는 또다시 충격에 빠졌다.

그로부터 두 달 뒤, 북측의 핵무기 보유 및 증산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고위관리들 사이에서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던 2006년 1월, 미국 국가정보국(DNI)은 기밀문서인 국가정보평가서(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s)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하였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고위관리들은 그 평가서를 읽고 북측의 핵무기 생산능력에 관련하여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미국 국가정보기관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보고한 북측의 핵무기 생산능력에 관한 정보가 무엇인지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것은 이전의 과소평가를 슬그머니 접고, 북측의 핵무기 생산능력이 위협적인 수준에 이르렀다는 충격적인 정보였을 것이다.

2006년 1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제출된 국가정보평가서(NIEs)는 2005년 8월에 헥커의 방북보고서가 '국무부 삼인방'에게 안겨준 충격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안겨주었을 것이다. 그 까닭은, 국가정보평가서에는 헥커의 방북보고서에 들어있는 북측의 핵무기 생산능력에 관한 정보만이 아니라, 그 방북보고서에 들어있지 않은 가장 민감한 정보까지 들어있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민감한 정보는 북측의 핵확산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당시 제1대 국가정보국장(DNI)이었던 존 니그로판티(John D. Negroponte)가 2006년 2월 2일 연방상원 정보위원회에 나가서 증언한 핵심내용은, 북측의 핵무기 생산능력이 중동의 반미세력에게 확산될 가능성을 심각하게 우려한 것이었다.

국가정보평가서가 대외비 기밀문서인 것처럼 '젤리코우 보고서'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고위관리들끼리만 돌려읽었고, 외부에는 그 존재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부쉬가 '젤리코우 보고서'를 읽어보고 동의한 때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지난 2006년 5월 18일에 가서야, 뉴욕타임스가 '젤리코우 보고서'에 관해서 처음으로 보도하였다. '페리 보고서'는 작성책임자가 누구인지, 언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는지, 그리고 공개본(declassified version)까지 언론에 보도되었던 반면에 '젤리코우 보고서'는 비밀에 파묻어 두었다. '젤리코우 보고서'에 관하여 알 수 있는 자료는, 뉴욕타임스가 2006년 5월 18일에 보도한 기사내용이 유일하다. 그 보도내용을 분석하면 아래와 같은 밑그림이 그려진다.

북측이 비핵화를 완결하기 이전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두 종류의 정치회담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두 종류의 정치회담이란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평화회담과 조미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수교회담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북측 최고수뇌부에게 일방적으로 비핵화를 요구해오던 기존정책만으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핵증산과 핵확산으로 핵확산금지체제를 무너뜨리려는 북측의 대미강공책에 도저히 맞설 수 없으므로, 북측 최고수뇌부가 요구해온 평화협정 체결과 조미관계정상화라는 정치의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 바로 이것이 '젤리코우 보고서'의 결론이다. 문화일보가 2007년 10월 6일에 보도한 전자우편대담에서 젤리코우는 '젤리코우 보고서'의 핵심개념을 "협력적 접근(cooperative approach)"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뉴욕타임스는 위의 기사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젤리코우 보고서'를 받아들임으로써 "또 하나의 중대한 전술적 변화(another major change of tactics)"를 겪었다고 묘사하였지만, 또 하나의 중대한 전략적 변화라고 표현해야 이치에 맞는다. 평화협정 체결과 조미관계정상화를 명시한 9.19 공동성명을 2005년 9월 19일에 채택, 발표하였던 전략적 변화의 배경을 미국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2005년 여름 어느 날 '국무부 삼인방'이 '젤리코우 보고서'를 들고 부쉬를 만나 설득하였던 사정이 엿보인다.

이율배반과 대미불신 사이에서

그러나 '젤리코우 보고서'가 처음부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대북적대정책을 고수하려는 부통령 딕 체니(Dick Cheney)와 국방장관(당시) 도널드 럼스펠드(Donald H. Rumsfeld)를 중심으로 하는 극우파 고위관리들이 내밀고 있었던 이른바 '방어조치(defensive measures)'를 그 보고서의 영향력이 압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러하였다. '방어조치'를 내미는 극우파 고위관리들의 목소리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주름잡고 있었으므로, '방어조치'가 '협력적 접근'의 손발을 묶어버린 형국이었다. 이를테면 극우파 고위관리들은 2006년 3월 7일 뉴욕에서 열린 조미양자접촉에 국무부 관리가 나서지 말라고 목청을 높이다가, 차관보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R. Hill)보다 한 급 낮은 부차관보(당시) 캐슬린 스티븐스(Kathleen Stevens)의 참석을 허용해줄 만큼 '협력적 접근'의 손발을 묶어버린 것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협력적 접근'을 주장하는 '협상파'가 '방어조치'를 주장하는 '대결파'에게 밀려 고립되었다는 소문이 워싱턴 정가에 떠돌기 시작한 때가 그 무렵이다.

9.19 공동성명이 채택되자, 극우파 고위관리들은 그에 반발하여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를테면, 2005년 9월 15일 미국 재무부가 '애국법 311조'를 들고 나와 마카오 은행 방코 델타 아시아(BDA)의 북측 예금구좌를 동결하고 국제금융거래를 봉쇄하는 제재조치를 밀어붙였다. 또한 2005년 11월 12일에는 파키스탄 대통령 퍼베즈 무샤라프(Pervez Musharraf)가 핵무기개발사업 책임자 압둘 카디르 칸(A. Q. Khan)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라고 하면서, 우라늄농축에 쓰는 파키스탄제 원심분리기(centrifuge) 열두 기가 북측으로 넘어갔다고 주장하였다. 무샤라프가 주장한 조선-파키스탄 핵협력설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극우파 고위관리들이 9.19 공동성명을 파기하기 위해서 기다리던 '정보'였다.

명백하게도, '협력적 접근'과 '방어조치'는 이율배반이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이율배반에 빠져 갈팡질팡하였고, 북측 최고수뇌부의 대미불신만 증폭시켰다. 클린턴 정부시기에 국무부 비확산 차관보를 지냈고, 지금은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상임고문으로 있는 로벗 아인혼(Robert J. Einhorn)은 2006년 5월 9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당시 이율배반에 빠져 갈팡질팡하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모습을 좀 부정확하지만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미국이 9.19 공동성명을 통해 북측에 관계정상화와 평화공존 의지를 보였으나 미국측 고위인사들이 그 의지에 의문을 갖게 하는 말을 해왔다. 북측은 미국이 정말로 자국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공존하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다."

2006년 4월 20일 백악관에서 열린 중미정상회담에서 부쉬는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검토할 수 있다는 자신의 의견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해달라고 중국 국가주석 후진타오(胡錦濤)에게 부탁하였다. 후진타오는 베이징으로 돌아가자마자 국무위원 탕자쉬안(唐家璇)을 평양에 급파하였다. 그러나 이율배반에 빠져 갈팡질팡하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불신하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탕자쉬안을 통해 전달받은 부쉬의 의견을 믿을 수 없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논하자고 하기 전에 금융제재부터 해제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부쉬의 의견을 일축하였다.

북측 최고수뇌부는 부쉬를 믿지 않았으나, 그의 의견을 직접 알아볼 기회까지 접은 것은 아니었다. 그 기회는 2006년 6월 1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힐을 평양으로 공식 초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방어조치'를 내미는 극우파 고위관리들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주름잡은 상황에서 힐이 외무성 초청을 받아 평양을 방문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므로, 국무부는 외무성 초청에 응할 수 없었다. 국무부의 무응답은 북측 최고수뇌부가 부쉬의 의견을 직접 들어볼 기회마저 사라졌음을 뜻하였다.

이제 북측 최고수뇌부에게는 초강경한 공세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압박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2006년 7월 5일 미사일발사훈련을 실시하고, 10월 9일 지하핵실험(글쓴이의 판단으로는 고방사능무기[HRW] 실험)을 실시한 것은, 북측 최고수뇌부가 그러한 배경에서 취한 초강경한 대미공세였다.

백악관을 외교실험으로 끌어낸 핵실험

북측 최고수뇌부의 초강경한 공세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대응할 방책은 '협력적 접근' 이외에 없었다. '젤리코우 보고서'는 '방어조치'를 불능화하기 시작하였다. 북측의 초강경한 공세가 개시되었음을 직감한 부쉬는 2006년 9월 14일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마침내 '공동적이고 포괄적인 접근(common and comprehensive approach)'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그것은 그가 '젤리코우 보고서'에 제시된 '협력적 접근(cooperative approach)'에 의거하여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려는 의사를 처음으로 표명한 것이었다.

부쉬는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려는 의사를 표명하였으나, 북측은 예고한 대로 2006년 10월 9일에 지하핵실험을 실시하였다. 지하핵실험은 '협력적 접근'과 '방어조치'의 이율배반에 빠져 갈팡질팡하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강타했고, 그 결과 '방어조치'가 떨어져나가고 '협력적 접근'만 남게 되었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핵문제 전문가로 일했던 캐롤린 레디(Carolyn Leddy)는 워싱턴포스트 2008년 5월 26일자 기사에서 지하핵실험 직후 "핵실험을 실시한 북측을 응징하려는 모든 노력에 중지명령이 내려졌다. 더 이상 협상도 없었고, 더 이상의 압박도 없었다"고 말했다. 2006년 11월 5일에 실시된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하였기 때문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대북정책에서 대결노선을 접고 협상노선으로 돌아섰다는 식의 분석은, '협력적 접근'과 '방어조치'의 이율배반에 빠져 갈팡질팡해오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대북정책이 북측이 실시한 지하핵실험으로 결정타를 얻어맞고 정리되었음을 알지 못하는 착오이다.

2006년 11월 18일 하노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담 중에 진행된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쉬는 종전선언을 발표하기 위한 남, 북, 미 3자 회동을 언급하였고, 그로부터 열흘 뒤인 11월 28일 베이징에서 열린 조미양자회담에서 크리스토퍼 힐은 북측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고 국가관계를 정상화하는 문제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검토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그 양자회담에서 힐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부쉬의 임기 마지막해인 2008년 중반까지 평화체제 수립과 조미관계정상화를 실현할 터이니, 그에 상응하여 북측 최고수뇌부도 완전한 비핵화를 실현해주기 바란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2007년 1월 16-17일 베를린에서 열린 조미양자회담에서 힐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북측과 국가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조미양자회담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고, 김계관 부상은 그렇게만 된다면 북측도 녕변 핵시설 가동을 중지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재입국을 허용하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조미 두 나라는 양자회담에서 사전합의를 거친 뒤에 2.13 초기조치 합의와 10.3 합의를 내올 수 있었다.

미국 언론들은 '협력적 접근'에 기초한 대북정책을, 북측의 핵실험(nuclear test)에 대응한다는 뜻에서 외교실험(diplomatic test)라 부른다. 그러나 외교실험이 핵실험에 대응한다는 인식보다 더 중시해야 할 것은, 핵실험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외교실험으로 끌어냈다는 사실이다.

지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벌이고 있는 외교실험은 성패의 갈림길에 다가서는 것으로 보인다. '젤리코우 보고서'는 '페리 보고서'처럼 실행도중에 멈추고 말 것인가 아니면 더 나아갈 것인가? (통일뉴스 2008년 5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