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문화제의 한계, 홰잡이를 기다린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촛불문화제가 추억으로 남지 않으려면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민심이반은 정치분석가들이 예상하는 때보다 훨씬 일찍 전면화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민심이반이 불신과 환멸에 머물렀었다면, 현 대통령에 대한 민심이반은 대중저항운동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대중저항심리가 대중저항운동으로 상향발전한 것이다. 대중저항운동을 중시하는 까닭은, 기층근로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도시중산층까지 그 운동에 참여하거나 지지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기층근로대중의 생존권운동을 외면하고, 진보정치운동의 한미자유무역협정 폐기운동을 관망하던 도시중산층이 대중저항운동에 나선 것은 중대한 변화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문화제'로 진행되는 대중저항운동은 전선을 형성한 대중저항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그리하여 다종다양한 전술목표들만 제기하였을 뿐 아직 전략목표를 움켜쥐지 못한 초보단계의 대중저항운동이다. 망라폭이 좁고 추동력이 약한 이 땅의 진보정치운동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대중저항운동을 힘있게 이끌어 가지 못하고 있으니, 대중저항운동이 일어나도 강력한 전선이 형성될 수 없는 것은 정한 이치이다.

솔직히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자연발생적 대중저항운동은 전략공세는커녕 위력적인 전술공세도 취하기 힘들다. 이것은 동서고금 대중저항운동의 역사적 경험에서 입증된 움직일 수 없는 결론이다. 인터넷과 손전화를 이용하여 각계각층 대중을 결집시킨 촛불문화제는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와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효과를 보았으나, 저항적 분위기가 감도는 군중집회 이상으로 발전하기는 힘들다. 이명박 정권이 촛불문화제를 이끄는 '주동자'를 잡아가는 역풍공세를 취하면서, 사회여론을 기만, 회유하는 이른바 '민심수습책'을 밀고 나오는 경우, 자연발생적 대중저항운동은 자칫 강온분열의 혼란에 휘말리고 동력을 급격히 잃어버리면서 흐지부지 막을 내릴 가능성이 있다. 이명박 정권이 각개격파전술과 기만선동전술로 '촛불'을 꺼버리려는 역풍공세를 취하면, 역풍을 맞은 '촛불'이 꺼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만일 '촛불'이 꺼지면, 이 땅의 대중에게 남는 것은 그들이 마주할 죽음의 쇠고기 식단과, 밤하늘을 수놓았던 촛불문화제의 아름다운 추억뿐일 것이다.

민주노총이나 전농 같은 진보적 대중단체들은 이명박 정권의 역풍공세를 내치며 끝까지 싸울 수 있지만, 조직화되지 않은 자연발생적 대중저항운동이 역풍공세에 놀라 흩어지면 전열을 다시 갖추기 힘들다. 진보정치운동은 대중저항운동이 분출하는 거대한 동력을 계속 공급받으며 진격로를 열어놓아야 하는데, 촛불문화제에 결집한 각계각층 대중이 흩어지면 진보정치운동에는 동력공급이 끊긴다.

자연발생적 대중저항운동이 제기한 전술목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저지하여 국민건강권을 지키는 것이다. 좀더 분석적으로 파헤쳐 보면, 비정규직 확대, 물가폭등, 대량실업, 고용불안, 농업기반말살, 영세자영업 파산, 중소기업 위축 같은 절망적인 현실에서 뚜렷이 드러난 것처럼 이 땅의 민생경제를 파탄으로 내몬 집권세력에 대한 저항감이 대중저항운동을 일으킨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대중저항운동은 국민건강권 수호운동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대중은 이명박 정권이 미국 정부와 쇠고기 수입문제를 재협상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 쟁점을 정치문제가 아니라 협상문제로 좁혀 생각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생존권수호운동이 개별기업의 벽을 넘지 못하는 것처럼, 촛불문화제의 대중저항운동은 국민건강권의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 대중저항운동이 전술공세에서 전략공세로 상향발전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낙관적 전망은 전선이 형성된 조건, 오로지 그처럼 유리하고 우세한 조건에서만 허용되는 대중저항운동의 발전전망이다. 전선이 형성되지 못하였는데도, 자연발생적 대중저항운동의 승리를 섣불리 논하는 것은 실패를 부르는 비과학적인 발상이다.

대중저항운동이 추구해야 할 전략목표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 운동의 깊은 곳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다. 촛불문화제를 이어가는 대중저항운동이 폭발적인 동력을 아직 분출하지 않는 까닭은, 그 운동 속에 잠재된 전략목표가 발현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면문제는 대중저항운동 속에 잠재된 전략목표를 언제 누가 어떻게 발현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과제로 좁혀진다. 명백하게도, 그것은 어느 누구의 일방적인 선동으로 될 법한 일이 아니다. 촛불을 들고 밤거리에 나선 각계각층 대중 스스로, 그들의 함성으로 전략목표를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이 고심 어린 물음에 해답을 내오는 것은, 이 땅의 진보정치운동에게 주어진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정세는 바뀌고, 전술은 달라지고

지난 시기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대중저항운동과 오늘 이명박 정권에 맞서 싸우는 대중저항운동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20년에 걸친 시대적 간격이 그런 차이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운동적 현실의 차이는 현 시기 대중저항운동의 전술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만일 진보정치운동이 이 차이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오래된 전술에 집착한다면, 대중저항운동과 끝내 만나지 못할 것이다.

첫째, 객관정세가 달라졌다. 이명박 정권은 이전 시기의 군사독재정권과 달리 선거를 통하여 등장한 합법정권이다. 이것은 이명박 정권을 받쳐주는 기반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전 시기의 군사독재정권은 태생적으로 불법정권이었으므로, 대중저항운동은 어렵지 않게 정권퇴진구호를 들 수 있었다. 그래서 민주화와 정권퇴진은 사실상 동의어였다.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는 정권퇴진운동이 고조기에 이르렀을 때, 보수야당이 그 운동에 합류할 수 있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등장한 이명박 정권에 맞서 싸우는 현 시기 대중저항운동이 정권퇴진구호를 드는 것은 매우 힘들다. 이명박 대통령 지지도는 크게 떨어진 반면, 한나라당 지지도는 되레 올라갔음을 알려준 최근 여론조사결과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명박 정권이 자기의 합법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러한 때에나 대중저항운동은 정권퇴진구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땅의 대중은 이명박 정권이 미국산 쇠고기 협상에서 부쉬 정부에게 '너무 많이 양보한 실책'을 강하게 비난하기는 하나, 그 '실책'이 현 정권의 합법성을 부정하는 대미굴종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이 '실책'을 자인하고 미국과 재협상을 하여 문제를 바로잡으면, '실책'을 용서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현 시기 대중저항운동이 정권퇴진구호를 들지 않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둘째, 주체적 조건이 달라졌다.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지난 시기에는 학생운동과 재야민주세력이 대중저항운동을 선도 또는 주도하였으나, 지금은 그러한 선도성, 주도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현 시기 대중저항운동은 불특정 다수가 자연발생적으로 결집한 운동이다.

다른 한편, 민주노총과 전농을 비롯한 진보적 대중단체들은 진보정치운동의 대중적 지지기반을 형성하였다. 더 중요한 것은, 비록 분당사태로 지지기반을 잃긴 하였으나, 민주노동당이 진보정치운동을 이끌어왔다는 점이다.

만일 진보적 대중단체들과 민주노동당이 각계각층 대중 속에 넓고 든든한 기반을 가진 전선체를 결성하였다면, 대중저항운동을 촛불문화제로 진행하지 않았을 것이고, 전선체가 대중저항운동과 진보정치운동을 결집한 전선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허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대중저항운동은, 이명박 정권의 역풍공세에 취약한 촛불문화제로 진행되면서, 초보단계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

자연발생적 대중저항운동은 어떻게 상향발전할 수 있을까? 대중저항운동이 상향발전하는 것은, 그 운동이 진보정치운동과 결합될 때, 오직 그렇게 될 때에만 가능하다. 자연발생적인 대중저항운동과 조직화된 진보정치운동이 일체화될 때, 대중저항운동은 진보정치운동이 설정한 전략목표를 제공받게 될 것이며, 진보정치운동은 대중저항운동에 잠재된 거대한 역량을 공급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대중저항운동은 진보정치운동과 결합하기를 꺼리고 있다. 보수야당을 지지하는 대중적 기반이 대중저항운동 속에 상당히 내포되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한 조건에서는 대중저항운동이 보수야당과 결합해야 나머지 문제도 풀린다. 대중저항운동이 보수야당과 결합하면, 대중저항운동과 진보정치운동과 보수야당이 결집한 3자역량이 생겨날 것이다. 전선은 3자역량 위에 형성될 것이다.

당면과제는 전선형성이다. 전선이 형성되어야 전술공세를 승리로 이끌 수 있고, 전략목표를 내올 수 있으며, 전략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다.

1987년 6월항쟁 시기에는 민주화운동세력과 보수야당이 재야민주세력이라는 모호한 이름 아래 뒤엉켜 있었으므로, 대중저항운동과 재야민주세력이 결집한 2자역량 위에 전선을 형성하면 되었지만, 오늘은 사정이 다르다. 이 땅의 진보정치운동은 재야민주세력이라는 낡은 틀을 박차고 나와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 성공함으로써 전선형성구도를 2자역량의 결집에서 3자역량의 결집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물론 보수야당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태생적으로 온건하고 중도적이며 타협적이고 심지어 기회주의적 속성마저 지닌 까닭에, 대중저항운동을 등에 엎고 국회 청문회나 정치권 협상에 열중하면서 정파적 이익이나 챙기려 할 것이다. 보수야당이 대중저항운동과 연대하여 이른바 장외투쟁에 나서려면, 현재 국면을 뒤흔들 만큼 강한 충격이 정치권에 가해질 필요가 있다. 그 정치적 충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섣불리 단정하기 힘들지만, 그러한 정치적 충격이 대중저항운동에서 나온다는 점은 분명하다.

전술목표도 있고 전략목표도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 나라 민생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간 주범은 집권세력이다. 민생경제의 파탄이란, 역대정권들이 전적으로 의존해온 수출만능주의와 시장만능주의가 이 나라 경제를 불구화하였다는 뜻이다. 민생경제의 파탄은 곧 불구경제의 파산이다. 이 나라 경제를 불구화한 정치적 책임이 집권세력에게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명박 정권에게만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일면적이다. 이 나라 경제가 불구화된 근본원인은 따로 있다.

광우병 위험이 도사린 미국산 쇠고기를 팔고 사는 관계는 명백하게도 한미관계이다. 광우병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 미국 시장에서 잘 팔리지 않는 저질 쇠고기를 백악관이 사가라고 요구하면, 청와대는 교역주권을 내던지고 그 요구에 자진하여 굴종하는 관계, 초등학생도 내막을 알면 절로 고개를 내저을 바로 그런 변태적 관계가 한미관계이다.

그런데 미국산 쇠고기에 광우병 위험이 있으므로 쇠고기 수입을 저지하고 국민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전술목표만 가지고서는, 변태적 한미관계에 공세를 취하지 못한다. 그 전술목표 아래서는, 대중의 건강만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전체와 운명까지 결정짓는 한미관계가 드러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변태적 한미관계가 이 땅의 경제를 불구화하였고, 경제가 불구화된 까닭에 민생경제가 파탄을 면치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변태적 한미관계를 청산하지 못하면, 불구화된 경제를 정상화할 수 없고, 불구화된 경제를 정상화하지 못하면 민생경제를 살릴 수 없다. 명백하게도, 전략목표는 변태적 한미관계를 청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촛불문화제는 대중적 반미정서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을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반미라는 말만 들어도 질겁하는 보수야당을 장외투쟁으로 끌어내어 폭넓은 전선을 쳐야 할 때에, 진보정치운동이 반미자주화강령을 내걸면 대중저항운동과 멀어지게 될 것이다.

현 시기 대중저항운동에게 반미자주화강령을 요구하는 것은 조급성의 발로이다. 정권퇴진구호를 들지 못하는 대중저항운동이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반미자주화운동으로 상향발전하려면 앞으로 거쳐야 할 단계가 많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반미자주화운동이라는 전략공세는 국민건강권수호운동이라는 전술공세와 질적으로 다르다. 전략공세는 아무 때나 가능하지 않으며, 전술공세의 승리가 일정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축적되었을 때 가능하다. 대중저항운동이 전술공세에서 맴돌면서 전략공세를 언제까지나 외면해도 실패할 것이고, 진보정치운동이 전술공세를 소홀히 대하면서 전략공세에 조급해도 실패할 것이다. 전략목표는 하나지만,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전술공세는 다양하고 다층적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홰잡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전깃불로 어둠을 밝히기 전, 민중에게 황랍초는 그리 친숙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뒷산에서 툭툭 꺾어온 싸리를 질끈 동여매거나 논바닥에서 걷어온 짚을 탄탄하게 엮은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홰가 있었다. 촛불이 궁궐의 침소를 밝혔다면, 횃불은 민중의 밤길을 밝혔다. 민중이 밤길을 갈 때는 초나 등잔이 아니라 홰를 쓴다. 불붙은 홰를 손에 움켜쥐고 밤길을 헤쳐 가는 것이다.

원래 촛불집회(candlelight vigil)는 고상하고 엄숙한 서양식 집회인데, 이 땅에서 열리는 촛불문화제에서는 서양식 촛불집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질적 차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땅에서 열리는 촛불문화제는 각계각층 대중이 시대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슬픔에 잠겨들다가, 어느새 지배세력을 질타하는 촌철살인의 풍자와 해학으로 웃음바다를 이루는가 싶더니, 이내 함성으로 어우러지며 저항의지를 불태운다. 대중의 자발성 또는 촛불문화제의 자연발생성이란 그처럼 역동적이고 저항적인 분위기를 일으켜 세우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그런 역동적이고 저항적인 분위기에 어울리는 것은, 실내공간을 은은히 비추는 촛불이 아니라 밤하늘의 어둠을 내치는 횃불이다.

타래쳐 오르는 횃불을 움켜쥐고 무리의 앞장에서 밤길을 밝히며 나아가는 사람을 홰잡이라 하나니, 지금 촛불문화제가 기다리는, 아니 정세가 절실히 요구하는 것은 홰잡이의 출현이다. 진보정치운동이 홰잡이가 되어 칠흑같이 캄캄한 시대의 어둠을 횃불로 힘껏 내쳐야 할 때가 아닌가! (통일뉴스 2008년 5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