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협의회가 후대에 남긴 불멸의 유산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중절모와 두루마기 차림에 둥글고 검은 안경테가 인상적인 일흔 두 살의 노인이 수행원 두 사람과 함께 나무푯말 앞에 서 있는 오래 된 흑백사진 한 장이 있다. 1948년 4월 19일 북행길에 나선 김구(1876-1949)가 려현에 이르렀을 때, 현장취재를 위해 그곳까지 따라갔던 조선통신사 기자의 요청에 따라 찍은 사진이다. 저녁 6시 45분, 38도선을 넘어 평양으로 향하는 김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기자는 이런 글을 남겼다. "기어코 이루어질지어다. 남북회담 성공을 상징하는 희망의 별인가. 김구 씨가 떠난 하늘 아래로 별은 반짝인다." 남북연석회의에서 '희망의 별'을 본 것은 조선통신사 기자의 심정만이 아니라, 단선단정(單選單政)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세우려고 힘쓴 각계각층 대중의 한결같은 심정이었다.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전개된 1948년의 거대한 대중운동은, 장차 통일정부를 세우는 날까지 이 나라 정치정세에 변화의 원동력을 끊임없이 보내주는 진보정치운동의 발원지로 남아있을 것이다. 1948년의 대중운동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면, 나라의 통일을 실현해 가는 앞길이 보인다.

남북연석회의라 부르는 사변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정당 및 사회단체의 대표자들이 모인 연석회의와 지도자들이 모인 협의회가 그것이다. 그 사변을 줄곧 남북연석회의라고 불러온 까닭에, 대표자연석회의의 의의는 후대에 전해졌지만 지도자협의회의 의의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전자와 후자를 모두 아우르는 뜻에서 그 사변을 남북정치협상이라 부른다.

1948년 4월 19일 오후 6시에 막이 오른 대표자연석회의는, 전국 각지에서 평양 모란봉극장으로 집결한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석한 가운데 4월 21일부터 23일까지 네 차례 열렸다. 그것은 정치회의라기보다 정치집회에 가까웠다. 그에 비하여, 남북정치지도자 15명이 참가한 지도자협의회는 4월 27일과 30일, 5월 2일에 세 차례 열렸다. 남북정치지도자들이 오해와 불신을 씻고 정치문제를 진지하게 협의하고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낸 자리는 사실상 대표자연석회의가 아니라 지도자협의회였다. 지도자협의회를 더 중시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남북정치협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면 아래와 같은 의의가 돋보인다.

1. 남북정치협상을 이끈 것은, 김구와 김규식(1881-1950)을 대표로 하는 남북협상파가 아니라 북조선로동당이다. 이것은 아래와 같은 사실로 입증된다.

1-1) 1947년 11월 16일과 17일에 진행된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0차 전원회의는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정치과업을 결정한 중요한 회의였다. 그 회의의 결정사항은 임시통일헌법을 제정하고, 유엔조선임시위원단 활동을 차단하고, 남북의 정당, 사회단체들을 단선단정반대운동으로 결집하고,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전국 총선거를 준비해나간다는 4개항으로 요약된다. 4개항 가운데서도 가장 시급한 것은 남북의 정당, 사회단체들을 단선단정반대운동으로 결집하는 과업이었다. 그 정치과업은 1947년 12월 23일에 진행된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1차 전원회의에서 구체화되었는데, 남측의 근로인민당(백남운, 1897-1979), 민주독립당(홍명희, 1880-1968), 인민공화당(김원봉, 1898-1958), 민주한국독립당(권태석)과 손잡고 단선단정반대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1-2) 북로당은 남측의 여러 정당들과 손잡고 벌이는 단선단정반대운동을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다. 그 까닭은 미군정청의 감시와 방해가 심하였을 뿐 아니라, 남조선로동당 당권을 장악한 박헌영과 이승엽이 남측의 민족주의정당들과 정치적으로 연대할 필요가 아직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남북 정당의 정치연대를 사실상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로당은 비공개정치활동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데, 비공개정치활동을 맡길 적임자는 항일운동시기부터 민족주의세력과 친밀한 성시백(1905-1950)이었다. 북측 자료에는 성시백이 1947년 12월에 남측의 민족주의정당들 특히 '임정요인들'과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임무를 받은 것으로 적혀있다.

성시백과 친밀한 김구 측근들로는 한국독립당 선전부장 엄항섭(1898-1962), 그리고 항일운동시기부터 김구의 비서로 일해온 안우생(1907-1991, 안중근[1879-1910]의 동생 안공근[1889-1940]의 장남)이 있었다. 그리고 성시백과 친밀한 김규식 측근들로는 권태양과 최석창이 있었다. 민족자주연맹에서 권태양은 상무위원, 상임위원회 총무국 차장, 비서처 총무였고, 최석창은 상무위원 겸 상임위원회 재무위원장이었다.

성시백은 그들을 통해서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정치협상에 참가하도록 힘썼고, 안우생과 엄항섭은 김구에게 남북정치협상의 필요성을 설득하였다. 1948년 2월 10일 김구가 비장한 결의를 담아 발표한 성명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은 엄항섭이 문안을 작성한 것인데, 엄항섭은 그 성명을 쓰기 전에 성시백을 두 차례 만나서 의견을 나누었다. 그 성명에 나오는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도선 이북을 가고 싶다"는 대목은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남북정치협상에 참가하려는 의사를 드러낸 것이다.

북로당이 남북정치협상에 참가할 남측 정당들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서 보낸 대남연락부장 림해가 서울에 도착한 날은 1948년 2월 11일이었다. 림해는 서울에서 백남운, 홍명희, 김원봉을 만났고, 그 다음으로 김구 측근인 엄항섭과 안우생, 김규식 측근인 권태양과 박건웅(중국 혁명음악의 대부 정율성[1914-1976]의 매형)을 만나고 평양으로 돌아갔다.

남북정치협상을 추진하려는 분위기가 소리 없이 조성되는 가운데, 김규식은 김구를 찾아가 북측에 요인회담을 제안하는 서한을 보내자고 합의하였는데, 그 서한도 엄항섭이 작성하였다. 그 서한이 북로당에 전해진 때는 1948년 2월 16일이다.

1-3) 이승만(1875-1965)이 추진한 남조선단정수립에 동의해오던 김구가 갑자기 단독정부수립반대로 돌아선 때는 1947년 12월 중순이었다. 1947년 12월 23일 김구는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가 갑자기 남조선단정수립을 반대하기 시작한 까닭은, 1947년 12월 2일 장덕수(1894-1947)가 암살된 직후 이승만과 심한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 한국민주당 외교부장 장덕수는 한민당 요인들 가운데서 이승만과 가장 가까웠으며, 사실상 미군정청-이승만-한민당을 연결하는 고리역할을 맡아왔으니, 이승만이 암살사건을 보고 화가 치민 것은 당연하였다. 장덕수 암살사건에 한국독립당 중앙위원 김석황(1894-1950)이 깊이 연관되었다는 정보를 들은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조종자로 의심하였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1893-1969)은 수배를 받고 도피 중이던 김석황을 비롯한 한국독립당 핵심당원들을 줄줄이 연행하고, 1948년 1월 16일 특별성명을 발표하면서 김구를 암살사건 주범으로 몰아갔다.

이에 분개한 김구는 마지막 항에 "남북요인 지도자회의를 소집함을 요구한다"는 내용을 집어넣은 6개항 의견서를 1948년 1월 29일에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반대쪽에 서게 되었다. 이처럼 김구의 남북요인회담 구상은 반이승만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의 반이승만운동은 단독정부수립 반대-남북요인회담 구상-남조선단독선거 불참으로 전개되었다.

1-4) 김구는 자기가 이끄는 한독당이 남북정치협상을 반대할 것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정당대표자회의가 아니라 요인회담을 구상하였다. 그가 말한 요인이라는 개념에는 정당의 대표성이 들어있지 않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요인회담 구상은 한독당의 의사가 아니라 김구 개인의 결심이었다. 위에서 논하였지만, 김구가 요인회담을 추진하기로 결심하기까지, 북로당이 성시백과 김구 측근들을 통하여 남북정치협상에 참가하도록 김구를 설득하였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북로당이 남북정치협상에 참가할 정당 관계자들을 은밀히 접촉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 김구는 자신과 김규식의 공동명의로 북측에 보낸 요인회담 제의에 응답이 오지 않자, 1948년 3월 8일 자신의 비서 안우생을 비공개로 평양에 보냈다. 김구는 평양에 다녀온 안우생을 통하여 남북정치협상에 대한 북측의 진의를 알 수 있었다. 처음에 남북정치협상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김구는 안우생의 방북보고를 듣고 나서 적극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1-5) 다른 한편, 안우생을 통하여 김구의 의사를 파악한 북로당은, 1948년 3월 20일과 24일에 중앙위원회 특별전원회의를 진행하였다. 바로 그 회의에서 남북정치협상에 관한 구체적인 결정이 나왔다. 결성사항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내용은, 대표자연석회의와 지도자협의회를 함께 진행하는 것이다. 대표자연석회의는 단선단정반대운동의 출발점으로, 지도자협의회는 통일정부수립운동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북로당의 결정사항은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전달되었다. 북조선 민전은 이튿날인 3월 25일 평양방송을 통해 남북연석회의를 제안하면서, 지도자협의회에 관한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그 까닭은, 지도자협의회 개최방침까지 언론에 공개할 경우, 미군정청을 자극하여 방해공작이 심해질 것을 의식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 남북지도자협의회 제1차 회의는 4월 27일 오후 2시 평양시 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15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그 역사적인 회의에 참가한 남측 지도자 12인은 한국독립당의 김구, 조소앙(1887-1958), 조완구(1881-1952), 엄항섭, 민족자주연맹의 김규식, 김붕준(1888-1950), 민주독립당의 홍명희, 건민회의 이극로(1897-1982), 남조선로동당의 허헌(1885-1951), 박헌영(1900-1955), 근로인민당의 백남운, 인민공화당의 김원봉이었고, 북측 지도자 3인은 북조선로동당의 김일성(1912-1994), 김두봉(1890-?), 조선민주당의 최용건(1900-1976)이었다.

남북지도자협의회 제1차 회의를 시작하면서 김일성(당시 북조선로동당 부위원장)은 "연석회의의 성과를 더욱 다지고, 미소양군 철수 후에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방도를 무릎을 맞대고 토의, 합의하여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그 회의에 주어진 역사적 임무를 밝혔다. 그에 따라 지도자협의회에서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방도를 논의한 끝에 이 나라의 앞길을 밝혀준 불멸의 통일강령을 담은 문서를 작성하였으니, 그것이 1948년 4월 30일 남북연석회의 마지막 회의에서 채택, 발표된 '전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공동성명서'이다.

지도자협의회가 작성하고, 대표자연석회의에 참가한 정당과 사회단체가 서명하고, 지도자협의회 이름으로 발표한 공동성명서가 후대에 전해주는 것은 세 개의 원칙과 한 개의 경로이다. 제1원칙은 주한미국군 철군을 요구하는 자주의 원칙이다. "미국은...자기 군대를 남조선으로부터 철퇴시킴으로써 조선독립을 실제로 허여하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2원칙은 동족끼리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의 원칙이다. "외국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내전이 발생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밝혔다. 제3원칙은 단선반대 원칙이다. "남조선단독선거는 설사 실시된다 하여도 절대로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 공동성명서는 통일정부를 세우는 경로가 전국정치회의 개최-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입법기관 선거-통일헌법 제정-통일적 민주정부 수립으로 이어질 것임을 밝혔다.

남조선단독선거가 강행되어 제3원칙은 효력을 잃었으나, 제1원칙과 제2원칙은 6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나라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지켜야 할 불멸의 통일강령이다. 놀라운 것은, 이미 60년 전에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는 경로를 밝혔다는 사실이다.

통일정부를 세우는 기본경로는 60년 전이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나, 그 경로에 담긴 개념들은 그 이후 정치정세가 변화하면서 다른 용어로 바뀌기도 하고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전국정치회의를 개최하는 첫 단계에 새로 추가된 것은 통일협의기구 결성이다. 전국정치회의를 열고 통일협의기구를 결성하는 전망을 열어준 정치적 합의는 10.4 선언에 들어있다.

1948년 5월 13일 김구는 유엔조선임시위원단 성원을 만난 자리에서 "국민의 진정한 의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아니라 통일정부 수립"이므로 "모든 문제의 최후결정은 전국정치회의에서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정치회의를 열어 통일정부 수립방안을 합의하자고 결정한 것, 이것이 남북지도자협의회가 후대에 남긴 불멸의 유산이다. (통일뉴스 2008년 4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