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화요일에서 승리의 화요일까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이 나라 민중운동사에 대중항쟁의 승리를 기록한 4.19 혁명은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 폭발하였고,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까지 여드레 동안 이어졌다. 그때로부터 마흔 여덟 번이나 해가 바뀌었건만, 혁명은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미완의 혁명은 오늘 진보정치운동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4.19 혁명은 항쟁지휘부가 없이 일어난 자연발생적 대중항쟁의 전형이다. 대중항쟁은 먼저 항쟁의 '도화선'에서 불꽃이 타 들어가다가 항쟁의 '폭약'이 거대한 폭음을 내며 터지는 형태로 일어나는 법인데, 4.19 혁명의 '도화선'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자연발생적 시위투쟁이었다. 국가기록원은 이승만 정권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최악의 선거부정을 저질렀음을 보여주는 당시 작성된 문서들을 2008년 4월 17일에 공개하였다. 1960년 3월 15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일어난 지역적 부정선거규탄투쟁은 약 한 달 뒤인 4월 19일에 이르러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들에서 전면적 정권퇴출투쟁으로 급속히 상승, 확산되었고, 결국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렸다. 4.19 혁명의 역동적인 전개과정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읽어보면 아래와 같다.

용암류 뿜어내는 활화산처럼

무릇 대중항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항쟁동력의 분출이다. 항쟁동력이 분출되는 순간, 항쟁참가자들은 진압경찰이 난사한 총탄이 빗발치는 탄우 속에 뛰어드는가 하면, 철부지 어린 학생들까지 항쟁대오에 합류하는, 평소에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 민중에게 넘쳐나는 것이다. 활화산 분화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용암류처럼 분출하는 거대한 항쟁동력은 사회역사발전을 밀고 나가는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다.

그렇다면 항쟁지휘부도 없었던 4.19 혁명에서 항쟁동력은 어떻게 분출되었을까? 처음에 마산에서 부정선거규탄투쟁이 벌어질 때만해도, 그 투쟁이 급속히 확대되어 서울에서만 20만 명이 참가하는 격렬한 대중항쟁으로 폭발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화선'에 불꽃이 타 들어가는 하였으나 '폭약'까지 옮겨가지 못한 채 도중에 꺼져버린 여러 차례의 좌절경험을 생각하면, 4.19 혁명에서 일어난 항쟁동력의 분출현상 속에는 분명히 어떤 원인이 있었다.

1960년 4월 25일 서울에서 진행된 대학교수 259명의 지지시위가 항쟁동력을 분출시킨 요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그것은 착오이다. 대학교수들의 지지시위는 항쟁승리가 임박한 마지막 시점에, 다시 말하면 승리의 화요일 하루 전에 가서야 일어난 막판현상이지, 그것이 항쟁동력을 분출시킨 요인은 아니다.

항쟁동력을 분출시킨 결정적 요인은, 통속적인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시민들의 합세'였다. 4.19 혁명을 기록한 자료나 현장사진을 분석하면,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선도투쟁을 벌이는 가운데 가정주부, 초등학교 학생, 노인, 그리고 구두닦이, 신문팔이, 실업자를 포함한 도시빈민 등 그야말로 각계각층 대중이 항쟁에 참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사회에서나 가정주부와 노인은 상대적으로 보수화된 사회집단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한 평가는 가정주부와 노인에 대한 폄하가 아니라, 사회적 처지가 정치의식을 규정하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더욱이 초등학교 아이들에게는 정치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4.19 혁명에서는 보수적인 사회집단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의식을 갖지 못한 아이들까지 항쟁의 거리에 뛰쳐나왔다. 183명 희생자와 6천259명 부상자가 10대에서 60대까지 폭넓은 연령층에 분포된 것은 모든 사회계층이 항쟁에 참가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4.19 혁명이 사회구성원 절대다수가 참가한 전민항쟁으로 전개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개인경험을 덧붙이면, 4.19 혁명 당시 항쟁참가자들이 탄 차량이 우리집 앞길을 지날 때마다,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도 할아버지와 함께 문밖에 나와 온종일 손뼉을 치며 성원하였다. 당시 내가 살았던 서울 중구 장충동에서 경찰들이 달아나 버린 파출소에 항쟁참가자들이 불을 지를 때, 동네사람들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교복을 입은 채 트럭에 가득 올라탄 중학생들이 손에 쥔 각목으로 차체를 쾅쾅 두드리며 투쟁구호를 외치던 모습도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대중의 정치의식이 급진화될 때

대중의 정치의식이 급진화될 때, 항쟁동력이 분출된다. 항쟁은, 그것이 대중의 정치의식이 급진화될 때 일어난다는 점에서 여느 폭동과 다르다. 4.19 혁명에서 일어난 대중정치의식의 급진화란, 불과 한 달 사이에 대중의 정치의식이 부정선거규탄에서 출발하여 정권퇴출투쟁으로 급진전한 것을 뜻한다. 항쟁기간에 대중정치의식의 급진화를 객관적 지표로 기록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대중의 정치의식이 급진적으로 전개된 방향은 항쟁참가자들의 집단행동에서 엿보인다. 항쟁참가자들이 공격한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보면, 항쟁참가자들의 의식이 급진적으로 전개된 방향을 알 수 있다. 4.19 혁명을 기록한 자료와 현장사진에서 보이는 공격대상은, 경찰서와 파출소, 자유당 중앙당사와 서울신문사, 반공회관과 반공청년단본부, 이기붕과 이정재의 집, 이승만 동상 등 26개소이다.

경찰서와 파출소를 공격한 것은, 항쟁대오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 살인경찰에 대한 대중적 분노가 폭발한 것이므로 당연한 귀결이었다. 국회의장이었던 이기붕은 3.15 부정선거를 직접 지휘한 부정부패의 화신이었고, 이정재는 이기붕이 하수인으로 부려먹은 정치깡패두목이었으므로, 그들의 집에 불을 지른 것은 부패정치에 대한 항거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말해준다.

주목하는 것은, 항쟁참가자들이 자유당 중앙당사와 서울신문사, 반공회관과 반공청년단본부를 파괴, 방화하였다는 사실이다. 자유당은 반공독재정치의 아성이었고, 정부기관지로 전락한 서울신문은 이승만 정권의 나팔수였으며, 반공회관과 반공청년단은 우익테러의 소굴이었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투쟁이 마산에서 일어나자 이승만은 "마산폭동은 공산주의자들이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비방하면서 유혈진압을 지시하였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정당한 대중투쟁을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으로 일어난 폭동'으로 몰아버릴 만큼, 이승만정권은 반공주의와 부패정치를 응집시킨 반공독재정권의 표본이었다. 항쟁참가자들이 자유당 중앙당사와 서울신문사, 반공회관과 반공청년단본부를 파괴, 방화한 것은 반공독재정권에 대한 격렬한 항거였다.

1960년 4월 26일 항쟁참가자들이 종로 탑골공원에 있는 이승만 동상을 밧줄로 묶어 끌어내린 뒤에 차량 뒷부분에 매달고 서울 거리를 누비며 질질 끌고 다닌 것은 반공독재정권에 대한 대중의 항거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서울 남산공원에 있는 높이 7m나 되는 거대한 이승만 동상은 철거되어 고철상에게 팔린 뒤에 머리가 잘려졌는데, 몸통은 고철로 녹여 없어졌으나 잘려진 머리부분은 48년이 지난 지금도 서울 명륜동의 개인주택 뒷마당에 나뒹굴면서 반공독재정권의 비참한 종말을 증언해주고 있다.

진보당이 그때까지 남아있었다면

4.19 혁명에서 대중의 정치의식이 급진화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 원인은 반공독재정권의 폭압정치, 민생파탄, 부정부패로 고통을 겪고 있던 각계각층 대중이 정권교체를 강하게 요구하였다는데 있다. 전후복구 대신에 반공독재에 열을 올린 이승만 정권이 1950년대 후반에 이 나라 민중에게 안겨준 것은 민생파탄과 부정부패밖에 없었다. 대중의 정권교체 요구는 1956년 5월 15일에 실시한 대선에서 보수야당인 민주당의 대선후보 신익희가 내놓은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로 표현되었다. 1956년 대선에는 자유당의 이승만, 민주당의 신익희, 진보당의 조봉암이 출마하였는데, 신익희가 선거활동 중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선거구도는 이승만과 조봉암의 양자대결로 전환되었다. 진보당의 선거구호는 혁신정치, 계획경제, 평화통일이었다.

그런데 진보당의 정치적 진출을 가로막으려는 민주당은 고인이 된 신익희에게 '추모표'를 몰아주자고 선동하였다. 선거결과는 이승만 504만 표, 조봉암 216만 표, 무효표 185만 표였다. 민주당의 '추모표' 선동에 넘어간 유권자들이 조봉암에게 표를 몰아주지 않고 무효표를 던졌던 것이다.

그로부터 4년 뒤에 4.19 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진보당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대중항쟁으로 반공독재정권을 무너뜨렸으나 진보적 정권교체는 실현하지 못하였다. 4.19 혁명은 반공독재정권을 대중항쟁으로 무너뜨릴 수 있음을 입증하였으나, 진보정당 없는 대중항쟁으로는 진보적 정권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입증한 것이다.

4.19 혁명이 일어나기 아홉 달 전인 1959년 7월에 조봉암을 교수형에 처하고 진보당을 강제로 해산한 것은, 대중항쟁과 진보정치운동의 연결고리를 사전에 끊어버린, 그리하여 대중항쟁-정권교체-평화통일로 이어질 역사발전경로를 미리 차단해버린 폭거였다. 조봉암을 교수형으로 몰아간 대검찰청 검사 오제도의 배후에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북한담당 책임자'가 있었다. 그 책임자는 "진보당 사건을 적시에 처벌하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에서 일대 정변이 일어나 공산화될 위험성이 있었다"면서 오제도를 치하했다. 미국 중앙정보국의 '북한담당 책임자'와 연계된 오제도가 조봉암에게 간첩죄를 뒤집어씌워 처형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아홉 달 뒤에 4.19 혁명이 반공독재정권을 무너뜨렸을 때 진보당이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였다면, 이 나라의 진보적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은 이미 1960년대에 이루어졌을지 모른다.

미완의 혁명이 넘지 못한 한계

4.19 혁명이 일어나자, 주한미국군사령부는 한국 육군 15사단을 계엄군으로 서울에 출동시키면서 실탄이 아니라 공포탄을 지급하도록 지시하고 발포금지명령을 내렸다. 서울에 출동한 계엄군은 항쟁을 진압하기는커녕, 항쟁참가자들을 체포하여 고문하는 경찰의 탄압을 저지하고, 구속자를 석방해주고, 항쟁참가대표들과 이승만의 직접면담을 주선해주는 등 사실상의 항쟁지원임무를 수행하였다.

주한미국군사령부가 한국군 계엄사령부에 발포금지명령을 내리고 사실상의 항쟁지원임무를 수행하도록 조치한 것은, 이승만 정권을 퇴출시키기 위해서였다. 이승만은 한미동맹강화를 열심히 추구하였지만,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그를 제거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시야에는 이승만이 미국의 국익추구에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는 한심한 늙은이로 보였던 탓이다. '미국 대외관계(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제18집에 들어있는 1959년 1월 6일자 문서는 "1960년 선거에서 자유당이 비민주적 책략을 사용할 경우, 한(조선)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소요사태'와 정권붕괴를 예견하였다.

이 나라 민중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동반적으로 정권교체를 요구한 것은 분명히 모순이었다. 그것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장악한 정치체제에서 생겨나는 '기괴한 모순'이다. 정권교체를 향하여 나아간 4.19 혁명의 진로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장악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48년 전 미완의 혁명이 넘어서지 못한 한계였으며, 48년이 지난 오늘에도 이 나라의 진보정치운동이 극복하지 못한 한계이다.

정동교회 장로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한미동맹강화를 제1국정과제로 추진한 것처럼, 소망교회 장로로 대통령이 된 이명박도 48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그의 뒤를 열심히 따르고 있다. 이승만 정권이 1953년 7월 정전 이후 전후복구에 실패하여 민생경제를 파탄에 빠뜨린 것처럼, 이명박 정권도 1987년 11월 금융위기 이후 경제회생에 실패하여 민생경제를 파탄에 빠뜨렸다.

그러나 1960년과 2008년에 서로 다른 점이 있다. 1960년 4월에는 초등학교 아이들도 "부모형제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말라"는 구호를 들고 항쟁에 동참하였건만, 오늘은 대학생들마저도 정치적 무관심에 빠져 있다. 18대 총선에서 전체 유권자의 선거참여율이 46%로 내려앉은 것은 정치적 무관심이 만연하였음을 말해준다.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은 진보정치운동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한계이다. 1956년 5월 대선에서 진보당 조봉암 후보가 23.8%의 득표율을 올렸던 것에 비해, 2007년 12월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얻은 득표율은 3.0%밖에 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하여, 진보정치운동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갈라져 티격태격하는 바람에 대중적 지지기반을 절반이나 잃어버렸다.

진보정치운동은 미완의 혁명이 넘지 못한 한계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진보정치운동은 정치적 무관심에 빠진 대중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통일뉴스 2008년 4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