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정국에 다시 읽는 진보정당사의 교훈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2007년 12월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참패한 뒤, 당내 정파갈등이 심해지더니 결국 소수정파가 갈라져나가 2008년 3월 16일 진보신당을 급조하였다. 분당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따지기 전에, 그것은 명백하게도 진보정치운동의 분열이었다.

정견이 서로 다른 정파들이 민주노동당 안에서 다투느니 차라리 정견이 같은 정파들끼리 결집한 두 개의 진보정당을 따로 세우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한 생각은 이 나라 진보정당사를 모르는 몰역사적 인식이다. 60년을 헤아리는 이 나라 진보정당사를 살펴보면, 오늘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분열구도를 형성한 것은 분당사태를 넘어서 진보정치운동의 쇠퇴와 몰락을 뜻한다.

너무 비관적인 견해가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민주노동당의 분당사태가 진보정치운동을 쇠퇴, 몰락시킬 것이라는 견해는 이 나라 진보정당사가 남겨준 뼈저린 역사적 교훈이다. 제18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얻는 득표결과가 그 교훈을 다시 일깨워준다. 분당사태를 '낡은 진보'와 '새로운 진보'의 불가피한 결별로 정당화하거나 또는 '성장을 위한 진통'으로 분식하는 견해는, 진보정당사의 역사적 교훈을 망각한 오류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 나라 진보정치운동은 60년 전에도 분당사태를 겪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늘의 분당사태는 60년 전의 정파대립이 주조한 원형에 그 뿌리를 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파대립과 분당사태의 역사적 원형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려면, 1945년 8월 15일 식민지해방으로부터 1948년 8월 15일 단정수립까지 3년 동안에 이 나라 진보정치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단정수립 이전에 남조선이라고 불렀던,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의 정치지형은 매우 복잡하였다. 형형색색의 진보정당들과 수구정당들이 경쟁하듯이 생겨났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식민주의체제를 청산하고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워야 하는 대전환기에 어느 정파가 집권할 것인가 하는 사활적 문제를 놓고 진보정당과 수구정당이 대립하는 것은 불가피하였다.

진보정당과 수구정당의 대립은 세 가지 정치현안을 놓고 정면충돌로 격화되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청산하는 문제,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노동삼법을 제정하며 중요산업을 국유화하는 문제, 모스크바 삼국회의 결정사항을 이행하는 문제가 충돌지점이었다.

당연한 귀결이었지만, 친일파 민족반역자 청산, 토지개혁 실시, 노동삼법 제정, 중요산업 국유화를 모두 반대하고, 모스크바 삼국회의 결정이행을 방해하는 정치세력은 수구정당에 집결하였고, 그 반대의 경우는 진보정당에 집결하였다. 주요한 수구정당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이승만), 한국민주당(김성수), 한국독립당(김구), 민족자주련맹(김규식)이었고, 주요한 진보정당은 조선공산당(박헌영), 남조선신민당(백남운), 조선인민당(여운형)이었다.

진보정치운동은 여러 정파, 여러 정당으로 사분오열되었고, 따라서 수구정치운동에 대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진보정당들이 1946년과 1947년 단 이태 동안에 진보정치역량을 시급히 확대, 강화하여 정세변화의 주도권을 쥐지 못하면, 미군정청이 남조선단독선거를 강행하고 남조선단정을 수립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미군정청의 단선단정전략에 말려드는 경우, 친일파 민족반역자 청산, 토지개혁 실시, 노동삼법 제정, 중요산업 국유화 같은 민주개혁은 물 건너가고, 나라의 분단을 막을 마지막 방파제로 남아있던 모스크바 삼국회의 결정마저 무효화되어 건국운동은 대파국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진보정당들이 난국을 돌파할 방략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새로운 정치지형을 조성하여 진보정치운동의 역량을 강화, 확대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정치지형의 조성이란, 세 개의 진보정당으로 나누어진 진보정치운동을 통합하여 단일진보정당을 창당하는 것이었으며, 단선단정전략을 저지하는 강력한 정치역량을 단일진보정당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것이었다. 진보정치운동에게 주어진 시급하고 중대한 과업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진보정당 합당에 기초한 단일진보정당 창당 바로 그것이었다.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으로 나누어진 진보삼당구도에서 대중적 진보정당인 조선인민당이 합당의 중심에 서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조선인민당을 중심으로 진보삼당을 합당하여야 하는 까닭은, 삼당합당의 기초 위에서 한국독립당, 민족자주련맹 등에 산재하는 중도정치세력들과 손잡고 폭넓은 진보정치연합을 형성하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만일 좌파적 진보정당인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삼당을 합당하면, 중도정치세력과 폭넓은 진보정치연합을 형성할 수 없고, 단일진보정당도 창당할 수 없었다.

삼당합당에서 제기된 과제를 요즈음 진보정치운동에서 쓰는 개념으로 표현하면 진보정당의 혁신과 재창당이라고 할 수 있다. 60년 전에 제기된 삼당합당의 당면과제는, 당명을 좌파적 진보정당의 당명(공산당)에서 대중적 진보정당의 당명(노동당)으로 한 급 내리고, 대중노선에 기초한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노동계급과 각계층 근로대중에게 제시함으로써 재창당하는 제1과제, 그리고 여운형을 단일진보정당의 위원장으로 선출하는 제2과제, 그리고 이른바 '임정좌파'라고 불렸던 한국독립당과 민족자주련맹의 중도정치세력을 단일진보정당의 지도부에 영입하는 제3과제 등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선결적인 것은 두 번째 과제였다. 대중적 신망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중도정치세력과 친화적인 여운형을 중심으로 단일진보정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꾸려야 나머지 과제들이 순조롭게 풀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삼당합당과 단일진보정당 창당으로 폭넓은 진보정치연합을 형성하면, 미군정청을 추종하는 수구정치의 아성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한국민주당을 고립, 약화시킬 수 있으며, 미군정청이 그 두 수구정당을 앞세워 추진하는 단선단정전략을 저지, 파탄시킬 수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삼당합당과 단일진보정당 창당은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에서 민주주의통일전선을 형성하는 사회변혁의 핵심과제로 되었을 뿐 아니라, 미군정청의 분단체제 수립기도를 저지하고 통일적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우는 민족통일전선의 선결과제로 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나라 진보정당사는 삼당합당과 단일진보정당 창당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음을 전해주고 있다. 정치적 식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던 삼당합당과 단일진보정당 창당은 왜 실패로 끝났을까?

역사자료에서 나타나듯이, 가장 열성적으로 삼당합당을 추진한 사람은 여운형이다. 1946년 8월 3일 여운형이 위원장으로 있는 조선인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공식문서에서 "3개 당을 1개 정당으로 통일할 것을 제안"하면서 "로동자, 농민, 소시민, 인테리 등 모든 근로인민의 리익을 옹호하는 신민당, 공산당, 인민당의 합동은 조선민족통일의 기초를 구축하고 민주진영의 주도체를 완성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여운형 자신도 "합동은 현 단계의 민주주의적 과업을 가장 성실히 또 능률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주도력을 광범한 인민의 정당으로 일원화함으로써 민주주의 전체력량의 일층 능동적 강화를 위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튿날인 8월 4일 조선공산당은 조선인민당의 삼당합당 제의를 받아들이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8월 7일에는 남조선신민당도 그 제의를 받아들이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삼당합당의 앞길은 두 개의 커다란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첫째, 조선공산당 안에서 간부파와 대회파가 충돌하여 그 파장이 삼당합당을 가로막았다. 간부파란 일제식민지 시기에 잠시 존재하였던 조선공산당의 한 분파인 화요파에 그 뿌리를 두고, 해방 직후 재건된 조선공산당에서 당권을 장악한 박헌영파이다. 대회파란 일제식민지 시기의 조선공산당의 한 분파인 엠엘파에 그 뿌리를 두고,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재건과정에서 당권을 장악하지 못한 비당권파이다. 당연히 간부파와 대회파는 갈등관계에 있었다. 삼당합당 문제가 제기되자, 대회파는 당대회를 소집하여 당의 의사를 수렴한 뒤에 삼당합당을 추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간부파는 그 요구를 묵살하였다.

둘째, 간부파와 대회파가 일으킨 충돌파장이 조선인민당과 남조선신민당에 파급되면서 그 두 당에서도 정파갈등이 불거졌다.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 간부파는 진보정치운동 전체의 주도권을 독점할 기회를 노리면서 조선인민당과 남조선신민당에 각각 프락치를 들여보냈는데, 간부파와 대회파의 충돌파장이 그 프락치들을 통해서 다른 두 당에까지 파급된 것이다. 조선인민당의 이기석파는 간부파와 단합하자고 했고, 다른 파는 조선공산당 내부파쟁이 누그러들 때까지 합당을 보류하자고 했다. 남조선신민당의 허헌파는 삼당합당을 추진하자고 했고, 백남운파는 조선공산당을 배제하고 조선인민당과 합당하자고 했다.

정파대립이 격화되어 삼당합당이 난관에 빠진 상황을 틈타서 정치음모가 진행되었으니, 그것은 삼당 지도부가 합의하여 합당을 추진한다는 원칙을 깨뜨리고, 자기 정파를 중심으로 삼당을 합당하려는 분파주의 음모였다. 음모의 주동자는 박헌영이었다.

결국 간부파는 이기석파와 허헌파를 끌어들여 1946년 9월 4일에 자기들끼리만 모인 가운데 삼당합동 준비위원회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남조선로동당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남조선로동당 준비위원회 결성과정에서 배제된 나머지 정파들은 1946년 10월 16일 사회로동당 창당준비를 선언하였고, 11월 1일 조선인민당 당사에 모여 삼당연합 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사회로동당을 창당하였다. 분당사태를 수습하려고 힘썼으나 한계를 넘지 못한 여운형은 사회로동당 창당을 반대하였고, 분당사태에 대한 항의표시로 창당대회에 참석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여운형을 당 위원장으로, 백남운(남조선신민당)과 강진(조선공산당)을 부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그에 맞서 11월 23일에는 남조선로동당이 창당되었다. 박헌영이 사전에 조율한 바에 따라서, 남조선로동당 위원장에 허헌(남조선신민당), 부위원장에는 박헌영 자신과 이기석(조선인민당)이 선출되었다.

주목하는 것은, 삼당합당추진이 박헌영의 당권욕과 간부파의 분파주의를 돌파하지 못하고 좌절하였다는 점이다. 박헌영은 자기의 당권에 도전하는 세력에게 반동세력이라는 누명을 씌우거나 적대함으로써 진보정치운동을 파쟁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조선인민당과 남조선신민당에 프락치를 들여보내어 진보정치운동의 주도권을 독점하려고 애썼으며, 자신의 최대 경쟁자인 여운형을 따돌리기 위하여 남조선신민당 위원장 허헌을 삼당합당으로 창당될 단일진보정당의 위원장으로 선출하도록 막후에서 움직였다. 그는 여운형을 대중선동을 좋아하는 야심가, 친미주의자, 기회주의자, 양반지주 출신이라고 비방하였다. 그의 언행은 진보정치운동을 망치는 합의파기, 권모술수, 중상비방의 전형이었다. 60년 전이나 오늘이나 마찬가지로, 당권욕과 정파이익에 눈이 멀어버린 분파주의자들은 주도권을 독점하기 위해 진보정치운동을 갈라놓는 해악을 저지른다.

박헌영이 월북한 뒤에 남조선로동당 당권을 쥔 이승엽은, 사회로동당 당원들을 남조선로동당에 집단적으로 입당시켜달라는 여운형의 요구를 거절하고, 사회로동당에게 공개적인 자기비판을 한 뒤에 개별적으로 입당할 것을 요구하였다. 사회로동당은 와해되었고, 분파주의자들에게 환멸을 느껴 잠시 낙향하였다가 재기한 여운형은 남조선로동당 창당과정에서 배제된 진보정치세력을 규합하여 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였다. 삼당분열이 남조선로동당과 근로인민당의 양당분열로 개편, 고착된 것이다.

다른 한편, 집권하자마자 진보정치운동 탄압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이승만은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진보정치운동을 파괴하는 집중공세를 벌이더니, 1949년 10월 19일에는 법령 제55호 2조를 발동하여 남조선로동당과 근로인민당의 정당등록을 취소하였다. 정파대립과 분당사태에 휘말려 지칠 대로 지쳐버린 이 나라 진보정치운동은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만일 이 나라 진보정치운동이 60년 전에 삼당합당과 단일진보정당 창당에 성공하였더라면, 오늘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합당과 재창당의 길로 나간다면 내일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게 될지 모른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2008년 제18대 총선결과를 놓고 합당과 재창당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통일뉴스 2008년 4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