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군정치의 논리: '강성대국'으로 가는 21세기의 길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북측의 정치는 사회주의정치이다. 세계사회주의역사를 살펴보면, 사회주의정치란 프롤레타리아계급독재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여 형성, 발전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북측의 사회주의정치도 세계사회주의 정치현실과 궤를 같이하지만, 북측의 사회주의정치는 다른 사회주의나라들에 존재한 사회주의정치와 다른 독특한 정치방식을 가진다. 그 독특한 정치방식을 선군정치라 부른다. 선군정치는 세계사회주의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새로운 개념이다.

북측의 현실을 제대로 알려면 선군정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선군정치는 외부에서 북측의 실상에 가장 가까운 지름길로 다가설 수 있는 열쇠말이다.

사회주의라는 말을 들으면 조건반사적으로 빈곤과 독재부터 연상하는데 너무도 익숙한 자본주의사회에서 사회주의정치일반을 이해하는 것도 힘든데, 선군정치를 이해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특히 선군정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은, 6.25전쟁의 상처, 5.16 군사정변 이후 30년 동안 이어진 군사독재정권의 탄압, 그리고 청년기의 군복무 중에 겪는 부정적 체험이 뒤섞이면서 군대에게 느끼는 거부감과 혐오감이다. 군인을 '군바리'라고 부르는 비속어에는 그러한 거부감과 혐오감이 짙게 깔려있다.

선군정치는 말 그대로 군대를 앞세우는 정치이므로, 군대에 대한 거부감과 혐오감을 접어두고 인민군의 실상을 바로 보아야 선군정치를 이해할 수 있다.

인민군을 알아야 선군정치 알 수 있다

1999년에 탈북한 인민군 군관(장교)출신의 탈북자가 쓴 책 『북한군에는 건빵이 없다?』에서는 남측에 퍼져있는 편견, 무지, 오해와는 전혀 다른 인민군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첫째, 인민군에는 선임병(고참)이 후임병에게 가하는 얼차려(기합)가 없으며, 헌병이나 군대영창이 없다. 또한 취사병도 따로 없다. 하루 단위로 선임병부터 후임병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대원들이 돌아가며 골고루 취사당번을 맡기 때문이다. 취사당번은 하루 24시간 세 끼 식사를 책임지는데, 누구나 쉬고 싶은 명절 때는 분대장급 고참병이 취사당번을 맡는다. 인민군에서는 아무개야 하는 식으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누구나 서로를 동무라고 부른다. 군관에게는 직급 밑에 동지라는 호칭을 붙여 부르지만, 특히 나이 많은 군관에게는 아바이(어르신)라는 친근한 호칭을 붙여 부른다.

인민군에서 군관(장교)이 되려면 반드시 사병에서 출발하여 하사관을 거쳐야 한다. 하사관들 가운데 우수한 병사를 군관학교(사관학교)에 보내어 군관으로 양성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군관이 사병생활을 오랫동안 해보았으므로, 사병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

둘째, 인민군 복무기간은 대체로 10년이다. 그러나 인민군에는 복무기간 10년이 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그것만이 아니라, 신병훈련을 마친 인민군 병사들이 배치되기를 바라는 곳은 최전방부대이다. 그들은 누가 등을 떠밀지 않아도 최전방에 나가서 총을 들고 미국군과 싸우고 싶어한다. 이런 경향은 당간부나 정부고위층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여서 "전반적으로 로비를 해서라도 인민군에 보내는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북측 인민들이 인민군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까닭은, 인민군이 가장 충실하고 선진적이며, 가장 영예롭고 친근한 사회집단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회적 인정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군시기부터 형성되어온 것이다. 인민군의 창군전통은 항일빨치산의 역사에서 시작되었다. 인민군은 8.15 해방 직후에 조직된 인민집단군을 조선인민군으로 개칭한 1948년 2월 8일이 아니라, 일제식민지시기에 김일성 주석이 항일빨치산부대를 조직한 1935년 4월 25일을 자기의 창건일로 삼고 있다.

항일빨치산부대의 경험과 전통은, 8.15 해방 직후 그 부대를 골간으로 하여 창건된 인민군에게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최고사령관에 대한 충성심, 군민일치의 기풍, 당과 군대의 혼연일체는 인민군이 가진 강점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탈북자가 전해준 인민군의 실상에 관한 서술에는 가장 중요한 정보가 빠져있다. 인민군에 관한 정보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의 정치생활과 문화생활, 그리고 최고사령관의 현지지도이다.

정치생활과 문화생활도 군 생활의 중요 부분

다른 나라의 군대는 군사훈련만 하면 되지만, 인민군은 군사훈련 못지 않게 정치생활을 중시한다. 그들의 정치생활을 살펴보면, 인민군에는 각급 부대별 당위원회가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당위원회를 지도하는 책임자는 정치군관이다. 인민군에 당위원회와 정치군관을 둔 것은, 그 군대가 단순히 군사전략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과업을 성취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무력집단임을 말해준다.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은 정치군관을 각 중대에까지 파견하여 군대 전체를 정치적으로 지도하고 있다. 인민군의 기본전투단위가 중대이므로, 중대 단위로 당위원회가 조직되었다는 것은, 인민군 안에서 매우 조밀하고 정연한 당의 정치지도체계가 움직이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인민군은 문화생활에도 열심을 내고 있다. 인민군의 각 중대에서는 악기를 다루거나 노래를 부르는 음악활동이 일상적으로 전개된다. 3-4개 보병사단, 포병여단, 전차여단, 경보병여단, 저격여단, 해안포여단, 교도여단으로 구성된 대연합부대마다 예술선전대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고, 각 중대마다 중대예술소조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일본 교도통신과 영국의 비비씨(BBC) 방송이 『로동신문』 2006년 12월 10일자 기사를 인용하여 보도한 바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몇 해 전부터 모든 인민군 중대마다 영상노래반주기를 보급해주고 있으며, 자신의 수첩에 영상노래반주기를 보내준 부대와 앞으로 보내줄 부대, 그리고 보내주어야 할 영상노래반주기가 몇 대인가를 일일이 적어놓고 있다.

인민군이 가진 가장 커다란 특징은 최고사령관의 현지지도이다. 2002년에 북측에서 펴낸 『고난의 행군을 락원의 행군으로』라는 자료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5년부터 2001년까지 814개 단위의 군부대를 현지지도하였다.

군부대를 찾아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부대지휘관의 영접보고를 받은 직후에 가장 먼저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그 부대를 현지지도하였던 연혁을 살펴보고 나서, 군사훈련정형과 전투준비태세를 검열하고, 교양실에 가서 당위원회의 정치사업과 병사들의 사상무장상태를 점검하며, 병사들이 사용하는 숙소, 세목장, 취사장, 부식창고, 부업농장, 축산기지를 하나하나 돌아보고, 중대예술소조의 소박한 공연을 관람하고, 지휘관들과 병사들을 격려하고 나서 그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러한 현지지도에 의해서 인민군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열렬한 충성심을 갖게 되고, 그를 옹위하고 그의 명령을 관철하려는 전투적 각오를 갖게 된다.

'선군'의 유래는 1960년

북측이 운영하는 인터넷사이트 『우리 민족끼리』가 2007년 1월 19일에 발표한 내용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60년 8월 25일 조선인민군 근위서울 류경수 105땅크(전차)사단을 찾은 것으로 선군혁명영도를 시작하였으며, 1995년 1월 1일 평양 방어를 맡은 고사포여성중대의 다박솔초소를 현지시찰한 때로부터 선군정치를 전면적으로 실현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므로 1960년 8월 25일은 선군혁명영도를 시작한 날이고, 1995년 1월 1일은 선군정치를 실현하기 시작한 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 선군정치가 1960년 8월의 선군혁명영도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60년 8월 25일에 105땅크사단을 찾은 것은, 북측의 표현을 빌리면, '선군혁명영도의 첫 자욱'인 것이다.

북측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1960년 8월 105땅크사단 방문을 '선군혁명영도의 첫 자욱'으로 보는 것은, 그가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된 1991년 12월 24일부터가 아니라 1960년대부터 인민군을 지도해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북측의 표현을 빌리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미 1960년 8월 25일부터 혁명무력건설에 나선 것이다. 이것은 1960년부터 1995년에 이르는 장장 35년 동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수행한 선군혁명영도에 의하여 선군정치가 창시될 수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느 나라나 군사문제에 관해서는 기밀을 유지하는데, 북측도 예외가 아니어서 인민군 내부사정을 외부에 전혀 알리지 않으므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35년 선군혁명영도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외부에서 알 길은 없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인민군의 여러 부문과 단위를 지도하면서 군력강화에 힘써왔을 것이라는 점은 외부의 관찰자들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혁명무력건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정보는, 2006년 12월 23일 평양에서 열린 최고사령관 추대 15주년 경축 중앙보고대회에서 발표한 인민군 총참모장 김영춘 차수의 경축보고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보고내용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혁명무력건설업적 가운데서 가장 커다란 업적은 '전군주체사상화강령'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한 것이라고 한다. '전군주체사상화강령'이란 인민군을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키는 강령을 뜻한다. 경축보고에서 김영춘 차수는, 인민군이 혁명강군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전군주체사상화강령'을 제시하고 인민군을 주체사상으로 무장시켰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한 마디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혁명영도는 인민군을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킨 것이었다.

둘째, 북측에서 105땅크사단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사단은 6.25전쟁 때 서울에 가장 먼저 입성한 인민군부대이다. 한국전쟁을 반미전쟁으로 보는 인민군의 시각에서 보면, 105땅크사단은 반미전쟁 승리의 상징인 것이다. 인민군이 군사작전에 운용하는 군사장비들에는 '조선인민의 철천지 원쑤 미제침략자를 소멸하라'는 전투구호가 새겨져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반미전쟁 승리의 상징인 105땅크사단을 방문한 때로부터 선군혁명영도를 시작한 것은, 그가 애초부터 사회주의생산현장이 아니라 반제군사전선에서 정치활동을 전개해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처럼 반제군사전선에서 정치활동을 전개해왔으므로 그에 의해서 반제자주정치가 실현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선군정치는 자주정치의 최고발현"이라는 북측의 견해(『로동신문』 2003년 4월 22일자 기사)는 그런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셋째, 북측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95년 1월 1일 다박솔초소를 현지시찰한 때로부터 선군정치가 전면적으로 실현되었다고 본다. 그날은 북측이 '고난의 행군'을 막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북측의 자료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것처럼, '고난의 행군'은 북측이 걸어온 사회주의건설역사에서 제국주의세력의 반사회주의공세가 가장 집중적으로 몰아친 최대의 시련이었다. 1995년 1월 1일 다박솔초소를 현지시찰한 때로부터 선군정치가 실현되었다는 말은, 제국주의세력의 반사회주의공세가 가장 집중적으로 몰아친 고난과 역경 속에서 선군정치가 실현되었다는 뜻이다.

제국주의세력의 반사회주의공세가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여섯 해 동안이나 집중되었던 까닭은 당시 국제정세가 북측에게 매우 불리하게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소련이 해체되고 새로 등장한 러시아연방에서는 극단적인 친미주의자 옐친이 집권하였고, 중국의 장쩌민도 반제노선을 포기하고 미국과 화친하는 길로 나아갔으며, 베트남도 미국의 개혁개방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미국과 국교수립을 추진하였다. 이것은 동아시아에서 오직 북측만이 반제군사전선을 고수하는 사회주의나라로 남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러한 정황을 간파한 미국은 북측에게 경제봉쇄와 전쟁위협을 이전보다 더 가중시키면서, 개혁개방과 고립압살 가운데 어느 한 쪽을 택하라고 강요하였다. 강력한 고립책동으로 압박하면 북측의 사회주의체제가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질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제국주의세력의 반사회주의공세는 북측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었다. 에너지, 자재, 원료, 부품을 사들이던 기존의 수입선이 거의 모두 끊겨 심각한 타격을 입은 공장과 기업소는 가동을 멈췄으며, 교통과 수송이 곳곳에서 마비되었고, 연이은 홍수피해까지 겹치는 통에 농업생산력이 급감하였다. 죽과 강냉이를 먹어야 하는 시련은, 식량난이라는 말조차 모르며 살아온 북측 인민들의 인내와 의지를 파고드는 뼈저린 시험이었다. 두만강을 건너가 중국에서 떠도는 탈북자들이 생겨난 것도 그 무렵이다.

선군정치와 사회주의강성대국

반제군사전선과 사회주의계획경제를 포기하고 미국의 개혁개방강요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반제군사전선과 사회주의계획경제를 끝까지 고수하면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북측은 주저하지 않고 강요를 거부하고 고수를 택하였다.

'역사의 종말'과 '일극체제의 완성'을 부르짖는 신자유주의세계화의 광풍 앞에서 북측에게 요구된 것은 고난과 역경에 굴하지 않고 반제군사전선과 사회주의계획경제를 고수하는 위력적인 정치방식이었다. 그러한 시대적 요구를 전면적으로 반영한 사회주의정치방식이 선군정치이다.

그러나 선군정치의 의의를 제국주의세력의 반사회주의압살공세에 맞서 반제군사전선과 사회주의계획경제를 고수한 위기대응과 체제수호의 차원으로 한정하는 것은 너무 피상적인 인식이다. 북측에서 강조하는 선군정치의 역사적 의의는, 선군정치가 사회주의건설(socialist construction)의 장구한 과정에서 새로운 발전단계를 열어놓았다는데 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북측이 걸어온 사회주의건설에 대한 기본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북측에서는 사회주의건설을 주체사상을 전사회적으로 실현해나가는 혁명역사로 본다. 인민대중을 위한 당의 정치적 영도와 인민대중 속에서 벌이는 당의 사상사업에 의하여 주체사상이 실현된다는 명제, 그리고 주체사상을 실현하는 선진역량은 노동계급에게서 나온다는 명제, 이것이 지금까지 북측이 신봉해온 사회역사발전의 진리였다.

그런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사회주의건설이 제국주의세력의 반사회주의공세로 난관에 봉착한 현 시대에 어떤 사회집단을 앞세워 사회주의건설을 더욱 높은 단계로 끌어올릴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35년 동안 계속해온 자신의 선군혁명영도를 총화하고 마침내 1995년 1월 1일에 다박솔초소를 현지시찰함으로써 그 문제의 해답을 찾았다. 사회주의건설을 밀고 나가는 가장 강한 힘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말대로, "가장 혁명적이고 전투적이며 가장 위력한 혁명집단"인 인민군에게서 나온다는 명제, 그리고 인민군을 사회주의건설의 선진역량으로 편성한다는 명제, 이것이 그가 찾은 해답이었다. 그가 창시한 선군정치가 인민군을 '혁명의 주력군'으로 보는 까닭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선군정치가 인민군을 사회주의건설의 선진역량으로 편성한 까닭은, 인민군이 혁명적 군인정신을 발휘하고 그 정신을 사회의 모든 부문에 파급, 침투시킴으로써 어느 사회집단보다 앞장서서 주체혁명위업을 수행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난의 행군' 시기에 제국주의세력의 광란적인 압살공세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싸우며 전진의 돌파구를 열어나간 사회집단은 인민군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선군정치의 목적은 개혁개방강요를 전면거부하는 위기대응과 체제수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민군이 발휘하는 혁명적 군인정신을 사회의 모든 부문에 파급, 침투시켜 주체사상을 실현하고 사회주의건설을 강성대국의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차원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선군정치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생겨났던 위기의 산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군인정신으로 사회주의건설을 추진하는 위력적인 정치방식으로 21세기 세계사회주의운동사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강성대국의 려명이 밝아오고 있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말(『로동신문』 2007년 5월 24일)은, 사회주의강성대국이 선군정치에 의해서 실현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2007년 10월 18일 작성)

* 이 글은 진보적 시사종합지 말 2007년 11월 호에 실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