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의 좌절과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의 연장

 

 

<차례>
1. 글을 시작하며
2. 자연발생적 대중항쟁과 변혁지향적 대중항쟁
3. 6월 항쟁의 역사적 경험
    3-1) 항쟁기에 형성된 대립구도
    3-2) 항쟁의 기폭계기들
    3-3) 항쟁기의 네 갈래 대응전략
    3-4) 제국주의반동정권의 반항쟁공작
    3-5) 다시 솟구친 항쟁의 불길
4. 글을 맺으며

1. 글을 시작하며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 서울에서 '박종철 살인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린 것을 계기로 각계각층 군중 25만 명이 시위투쟁에 궐기하였던 날부터, 6월 29일 민주정의당(민정당) 대선후보로 등장한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인다는 '6.29 선언'을 발표한 날까지 19일 동안 남(한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한 거대한 대중항쟁(mass insurrection)이다. 항쟁기간 동안 서울을 비롯한 남(한국)의 모든 대도시들은 분노한 시위군중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화염병과 깨뜨린 보도블럭을 움켜쥔 항쟁참가자들은 연발장치에서 최루탄을 난사하는 경찰 철갑차의 공격에 대항하였고, 각목을 움켜쥐고 진압경찰 체포조(백골단)의 기습타격에 맞서 싸웠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격전은 자정을 지나 새벽까지 이어졌다.

6월 10일 서울 도심에서 벌어진 시위투쟁에 나선 참가자들 가운데 400여 명은 경찰진압에 밀려 명동성당 구내로 들어가 6월 15일까지 농성투쟁을 벌이며 항쟁의 불길을 이어갔고, 6월 18일에는 남(한국) 전역에서 각계각층 군중 150만 명이 '최루탄 추방의 날' 시위투쟁에 궐기하였다. 남녀노소 각계각층 군중 180만 명이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에 총궐기하였던 6월 26일, 서울에서만 25만 명이 시위투쟁에 참가하였다. 서울 도심의 일곱 개 방어거점들에 진압경찰 2만5천 명을 내몰아 구축한 3중 방어선은 분노한 시위군중의 집중공격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전두환을 우두머리로 한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을 물리적으로 방어해주던 경찰력은 마비상태에 빠졌다. 1972년 10월 박정희를 우두머리로 한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이 이른바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휘두르며 초보적 민주주의(rudimentary democracy)마저 말살했던 때로부터 열다섯 해 동안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피땀을 쥐어짜면서 남(한국)사회 전반을 폭압만행으로 짓눌러온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을 대중항쟁으로 퇴진시키고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연립정권(democratic coalition government)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6월 항쟁은 좌절로 막을 내렸다. 직선제 개헌을 반대해온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이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으므로 6월 항쟁이 승리하였다는 견해도 있으나, 그러한 주장은 민주헌법 제정을 외면하고 애초부터 직선제 개헌에만 매달린 보수야당의 집권욕망을 항쟁의 평가기준으로 삼은 오류이다.

주목하는 것은, 6월 항쟁에서 진보변혁세력이 쟁취하려 한 목표가 직선제 개헌(constitutional amendment for direct election)이 아니라 민주헌법 제정(legislation for democratic constitution)이었다는 점이다. 직선제 개헌이 대통령 간선제에 관한 헌법조항만을 부분적으로 개정하는 개량조치의 본보기이라면, 민주헌법 제정은 군정퇴진과 민정수립을 실현하는, 그리하여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나는 민주주의혁명의 수행절차이다. 6월 항쟁을 전후하여 진보적 대중정치조직(progressive mass political organization)으로 투쟁하였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1985년 11월 22일 그 산하에 '군사독재퇴진 및 민주헌법쟁취위원회'를 설치한 것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적 요구에 따라 군정퇴진과 민정수립을 실현하려는 진보변혁세력의 정치적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6월 항쟁이 초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민주화의 전환점'으로 되었다고 평가하고, 6월 항쟁으로 민주주의 실현과정에서 절반의 승리를 거두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런 종류의 주장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무지의 소산이다. 민주주의란 초보적 분량과 진보적 분량으로 50%씩 나누어놓을 수 있는 수량적 물질이 아니다. 초보적 민주주의가 양적으로 늘어나서 진보적 민주주의(progressive democracy)가 실현되는 것이 아니므로, 민주주의를 수량적 개념으로 논하는 것이야말로 몰이해의 극치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투쟁으로 초보적 민주주의를 쟁취하지 못하였을 때, 그리하여 제국주의반동정권과 신식민주의예속정권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초보적 민주주의를 교부(grant)하였을 때, 초보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절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신식민주의체제의 안전을 지켜주는 개량주의정치기제(reformist political mechanism) 곧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로 된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신식민주의체제에서 출현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약간 유연성을 지닌 신식민주의계급독재의 별칭이다. 신식민주의체제의 자유민주주의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안겨주는 것은, 지난 시기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이 저지른 폭압만행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말하는 시민적 자유(civil liberty)뿐이다.

물론 지금 남(한국)에는 '국가보안법'과 그 악법에 기생하는 '국가정보원', '경찰청 보안수사대' 등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어서 시민적 자유마저도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보기 어렵지만, 오늘의 현실이 입증하듯이, 반동군부세력은 정치권에서 꼬리를 감추었고, '공안세력'은 고문살해만행을 더 이상 저지르지 못하게 되었으며, 대통령 직선제와 지방자치제가 정착된 지 오래이다.

그러나 신식민주의체제의 자유민주주의가 안겨주는 시민적 자유란, 남(한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신식민주의체제의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에서 공허한 자유(void freedom)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김영삼의 '문민정부(civilian government)'라는 간판이 내걸린 뒤로 공허한 자유를 흡입하며 자유민주주의의 환상에 도취하였던 1997년 11월,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외환위기(foreign exchange crisis)라는 초대형 태풍이 남(한국)의 경제를 강타했고, 그 뒤로 10년 세월이 흐르면서 실업과 궁핍에서 벗어나기는커녕 피폐해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삶은 이제 한미자유무역협정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눈앞에 두고 있지 아니한가!

남(한국)의 초보적 민주주의는, 제국주의반동정권과 신식민주의예속정권이 신식민주의체제의 안정회복이라는 저들의 전략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교부해준 '양도성 민주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양도성 민주주의'에 도취해버리고, 진보적 지식인들이 민주주의 담론을 과거사의 추억으로 만지작거리는 사상정신적 나태에 빠져있는 한, 남(한국)사회는 사회역사발전의 전망을 잃어버리고 신식민주의체제는 고착되어 가는 것이다.

그 동안 남(한국)의 진보변혁세력은 6월 항쟁에서 입은 좌절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투쟁의 가시밭길을 헤쳐왔으며, 진보정당 창당과 통일전선 형성과 대중조직 건설이라는 참으로 귀중한 3대성과를 쟁취하였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6월 항쟁 이후 남(한국)에서 초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덕택에 3대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가 출현한 이후 10년의 경험이 가르쳐주는 것은, 초보적 민주주의가 진보적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발판'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도취와 나태, 분산과 분열로 유인하는 '수렁'이었다는 점이다. 진보정당(progressive party)을 창당하고 통일전선(united front)을 형성하고 대중조직(mass organization)을 건설하는 3대성과를 쟁취할 수 있었던 요인은, 진보변혁세력에게서 불타오른 신념과 의지, 그리고 헌신의 눈물과 혁신의 노력이었다. 이러한 생각에 바탕을 두고 이 글은 민주주의혁명의 관점에서 6월 항쟁의 역사적 경험을 논한다.

2. 자연발생적 대중항쟁과 변혁지향적 대중항쟁

한(조선)반도에서 전쟁의 포성이 그치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 이후 남(한국)사회는 세 차례 대중항쟁을 경험하였다. 4월 혁명, 5.18 광주민중항쟁, 그리고 6월 민주항쟁이 그것이다. 1960년에 일어난 3.15 마산항쟁, 1979년에 일어난 부마민주항쟁, 1986년에 일어난 5.3 인천항쟁도 있지만, 남(한국) 정치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항쟁사의 최고봉은 4월 혁명, 5.18 광주민중항쟁, 6월 민주항쟁이다.

그 세 차례 역사적 경험은 각각 혁명, 민중항쟁, 민주항쟁이라는 서로 다른 명칭으로 불려지는데, 민주주의혁명으로 상승, 발전하지 못하고 신식민주의체제를 유지한 채 정권의 간판만 바꿔 달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4월 혁명은 리승만 정권의 퇴진과 5.16 군사반란에 의해서 중지되었고, 5.18 광주민중항쟁은 전두환을 우두머리로 한 반동군부세력이 저지른 학살만행으로 짓밟혔고, 6월 민주항쟁은 신식민주의군사정권과 보수야당이 야합하여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는 바람에 좌절되었다.

4월 혁명은 정전협정 체결 이후 일곱 해만에 일어났고, 그로부터 스무 해 뒤 5.18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고, 다시 그로부터 일곱 해만에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고, 올해 2007년이 그로부터 다시 스무 해가 되었음을 헤아려 본다면, 7년과 20년의 주기가 일정하게 교차하는 주기율에 따라서 대중항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배열은 대중항쟁의 주기가 아니라 우연현상이다. 대중항쟁의 주기를 정해놓은 역사의 시간표는 없다. 명백하게도, 대중항쟁은 항쟁의 주체적,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대중항쟁은 그것이 일어나는 주체적, 객관적 조건의 차이에 따라서 자연발생적 대중항쟁과 변혁지향적 대중항쟁으로 나누어진다. 그러한 유형구분에 따르면, 정전협정 체결 이후 남(한국)에서 일어난 세 차례 대중항쟁은 모두 자연발생적 대중항쟁의 유형에 속한다.

주목하는 것은, 6월 항쟁이 일어난 때로부터 스무 해가 지난 오늘 남(한국)에서 자연발생적 대중항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다. 그 까닭은, 자연발생적 대중항쟁의 주체적, 객관적 조건이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미조직상태에 머물러있을 때,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조직인 진보정당이 아직 존재하지 않을 때,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근로농민을 비롯한 사회계층들이 결집한 통일전선을 아직 형성하지 못하였을 때, 항쟁주도세력이 항쟁의 전략목표를 제시하지 못하고 전술목표들 사이에서 배회할 만큼 미숙하여 사회변혁의 전망이 불투명할 때, 그러한 때에 일어나는 대중항쟁이 자연발생적 대중항쟁(spontaneous mass insurrection)이다.

그러나 6월 항쟁 이후 스무 해가 지난 오늘, 위에 열거한 대중항쟁의 자연발생적 요인들은 남(한국)에서 사라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남(한국)에서 일어날 역사상 네 번째 대중항쟁은, 자연발생적 대중항쟁이 아니라 변혁지향적 대중항쟁으로 될 것이다.

변혁지향적 대중항쟁(revolution-oriented mass insurrection)이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그들을 수탈하고 착취하고 짓밟고 속여온 신식민주의체제를 압도적인 힘으로 뒤집어엎는 민주주의혁명(democratic revolution)의 유일무이한 진행방식이다. 오래 전에 서유럽에서 일어났던 고전적 민주주의혁명이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동아시아와 동유럽에서 일어났던 20세기형 민주주의혁명과 달리, 오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식민주의체제를 뒤집어엎을 21세기형 민주주의혁명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진보정당과 통일전선의 기치 아래 단결하여 변혁지향적 대중항쟁을 밀고 나가는 사회변혁이다. 21세기형 민주주의혁명에 관해서는 내가 이전에 발표한 몇몇 글에서 논한 바 있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남(한국)에서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근로농민을 비롯한 사회계층들이 결집한 진보정당과 통일전선은, 변혁지향적 대중항쟁과 민주주의혁명을 탄탄하게 준비하면서 기나긴 준비기를 지나는 중이다. 6월 항쟁 이후 스무 해가 지난 오늘까지 대중항쟁의 임박한 조짐이 눈에 띄지 않는 까닭은, 대중항쟁의 변혁지향적 요인을 합목적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대중항쟁의 자연발생적 요인이 맹목적으로 성숙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우며 긴 시간이 요구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혁명의 준비기가 길어지는 것과는 별도로, 남(한국)에서 변혁지향적 대중항쟁은 불가피한 미래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한 미래상은 남(한국)만이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식민주의체제를 무너뜨리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21세기의 역사적 전망 속에 공통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남(한국)에서 변혁지향적 대중항쟁이 불가피하다는 점은, 남(한국)의 신식민주의체제에 박혀있는 적대적 모순관계가 격화되면서 대중항쟁의 주체적, 객관적 조건이 차츰 무르익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남(한국)에서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10년 동안 제국주의독점자본이 신식민주의금융시장에서 이익배당금 형태로 막대한 이윤을 수탈함으로써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삶이 더욱 피폐해지고 도시소자산계층이 몰락하는 사회계급관계의 양극화가 진행되었고, 다른 한편에서 제국주의반동정권이 이른바 '반테러전쟁'을 수행한다는 구실로 신식민주의체제에 대한 정치군사적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면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고통과 불행으로 몰아넣은 것은, 변혁지향적 대중항쟁의 객관적 조건이 무르익고 있음을 알려주는 뚜렷한 신호이다. 그와 더불어, 아니 그보다 더 중시하는 것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 이후 스무 해 동안 온갖 탄압과 회유에 흔들리지 않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밀고 나간 자연발생적 계급투쟁의 경험을 상당히 축적하였고, 그토록 오랜 투쟁경험의 기초 위에서 제기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세력화라는 전략적 과제가 진보정당 창당과 통일전선 형성으로 해결되고 있는 것은, 변혁지향적 대중항쟁의 주체적 조건이 그것의 객관적 조건과 상응하여 차츰 성숙도를 높여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물론 변혁지향적 대중항쟁의 주체적, 객관적 조건이 완전히 무르익은 성숙단계에 아직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성숙단계에 다가서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3. 6월 항쟁의 역사적 경험

6월 항쟁은 1972년 10월 박정희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이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휘두르며 광란하였던 때로부터 열다섯 해 동안이나 짓눌린 상황에서 폭발한 자연발생적 대중항쟁이었다. "오랫동안 서울의 달동네 단칸방에서 살면서 느껴왔던 까닭 모를 박탈감과 분노"(『한겨레 21』 제663호, 2007년 6월 5일)가 연인원 500만 명의 군중을 19일 동안 항쟁의 거리로 끌어내었다. 6월 항쟁을 자연발생적 대중항쟁으로 규정하는 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항쟁지도부가 없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민운동본부)'는 기존의 대책위원회 수준에서 한 걸음 더 나가 공동투쟁위원회 수준에 이르렀던 정치연대기구였으므로 항쟁지도부라고 보기 힘들다. 위원회나 연합이 아니라 운동본부라는 명칭은,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할 때 기독교계 참가자들이 내놓은 절충개념이었다.

계급적 중심과 대중적 기반을 가진 진보정당과 통일전선의 지도핵심세력만이 대중항쟁을 끝까지 책임지고 이끌어 가는 진정한 의미의 항쟁지도부로 될 수 있는데, 국민운동본부 발기인 2천191명 가운데 노동자는 1.7%(39명), 농민은 7.8%(171명), 도시빈민은 0.8%(18명)밖에 되지 않았으며, 종교단체 대표가 31%(683명)로 가장 많았고, 사회운동단체 대표는 16%(343명)이었다.

국민운동본부 고문 8명 가운데 2명, 공동대표 65명 가운데 8명, 상임공동대표 10명 가운데 2명은 김대중과 김영삼을 비롯한 보수야당 정치인들이었다. 6월 항쟁이 미증유의 폭발력을 발산하면서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을 붕괴위기로 떠밀고 있었던 1987년 6월 19일, 김영삼은 기자간담회를 자청하여 여야영수회담을 갖자고 전두환에게 제안하였다. 180만 명이 궐기한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을 눈앞에 두고 있던 1987년 6월 22일에도 김영삼은 자기가 전두환을 만나서 개헌약속을 받아올 터이니 '국민평화대행진'을 연기해달라고 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들에게 요청하였다. 6월 항쟁의 결정적 시기에 보수야당은 대중항쟁을 중지시키고 밀실야합에 들어가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대중항쟁을 두려워하면서 신식민주의군사정권과 야합하여 '정국안정'을 꾀한 뒤에 대통령 직선제를 이용하여 집권하려는 속셈을 품은 보수야당이 국민운동본부 핵심에 파고들어 6월 항쟁의 운명을 좌우하였다는 사실은, 국민운동본부를 통일전선체로 인정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나는 이전에 발표한 글에서 국민운동본부를 '완성되지 못한 통일전선체의 일종'이라고 말한 적이 있으나,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초보단계의 정치연대기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치강령과 지도핵심세력, 계급적 중심과 대중적 기반을 갖추어야 대중항쟁을 이끌어 갈 항쟁지도부를 세울 수 있다. 대중항쟁을 이끌어 가는 항쟁지도부는 진보정당과 통일전선의 지도핵심세력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항쟁의 전략목표가 없었다. 국민운동본부는 "민주헌법쟁취를 통한 민주정부 수립에 궁극적 목표를 두었다"고 밝혔으나, 그들이 말한 '민주헌법쟁취'란 반동군부세력 1세대가 만들어놓은 제5공화국 헌법을 전면 폐기하고 민주헌법을 새로 제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낡은 헌법을 그대로 두고 대통령 간선제를 규정한 헌법조항만 개정하는 '민주개헌'을 뜻하였다. 그들이 추구한 '민주개헌'은 1987년 7월 30일 미국 연방하원 소위원회 청문회에서 국무차관 더윈스키(Edward J. Derwinski)가 정확하게 표현한 대로 선거개혁이었다.

또한 국민운동본부가 말한 민주정부 수립은 6월 항쟁의 당면과업이 아니라 먼 장래에 일어날 '궁극적 목표'로 미루어졌으므로, 국민운동본부는 민정수립의 정치강령을 가질 수 없었다. 민정수립의 정치강령을 갖지 못하였으니, 항쟁의 전략목표를 내오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전략목표가 없었으므로 항쟁이 승리한 이후의 정치전망을 전혀 공유할 수 없었다.

셋째, 항쟁의 지휘체계가 허술하였다. 국민운동본부는 초보단계의 정치연대기구였으므로 항쟁을 이끌어 갈 짜임새 있는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하였다. 국민운동본부는 폭발적인 대중항쟁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막상 6월 항쟁이 폭발하자 항쟁을 지휘하기는커녕 엄청난 폭발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이리저리 떠밀려 다녔다.

6월 항쟁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대중항쟁과 진보적 정권교체의 상관관계를 통일적으로 사고하는, 그리하여 변혁지향적 대중항쟁의 가능성을 내다보는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6월 항쟁의 역사적 경험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3-1) 항쟁기에 형성된 대립구도

6월 항쟁으로부터 스무 해가 지난 오늘 남(한국)에서는 진보변혁세력, 중도개혁세력, 수구반동세력이 삼자대립구도를 형성하고 있지만, 6월 항쟁 시기에 형성된 것은 양자대립구도였다. 당시 진보변혁세력과 중도개혁세력은 모두 힘이 약했으므로, 힘이 강한 수구반동세력에 맞서 정치적으로 연대하여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진보변혁세력과 중도개혁세력이 느슨하게나마 손잡고 수구반동세력에 맞서는 양자대립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다.

수구반동세력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진보변혁세력이 중도개혁세력과 연대하는 것을 '민주대연합'이라 불렀다. '민주대연합'을 구성하는 원칙은 신식민주의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사회정치세력이 폭넓게 결집한다는 것이었으므로, 그 원칙에 따르면 중도개혁성향의 사회단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보수야당도 '민주대연합'의 일원으로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보수야당은 중도개혁성향의 사회단체들과 처지가 달랐다. 보수야당을 '민주대연합'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진보변혁세력의 의도와 달리, 보수야당이 '민주대연합'을 사실상 좌우하였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보수야당이 '민주대연합'을 사실상 좌우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나름대로 집권강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변혁세력이 '민주대연합'을 추진한 목적은 군정퇴진과 민정수립에 있었는데, 당시 진보변혁세력은 민주연립정권을 세우기 위한 집권강령을 갖지 못한 채 군정퇴진투쟁에만 힘을 집중하고 있었다. 진보변혁세력은 군정퇴진투쟁에서 '민주대연합'이 승리한 뒤에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민정수립강령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설령 진보변혁세력이 민정수립강령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민주연립정권을 세우는 과정에서 보수야당의 정권독점책동에 떠밀려서 완전히 배제되거나 아니면 정권수립에 겨우 발을 들여놓는 경우에도 정권 내 소수파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진보변혁세력은 그처럼 열악한 조건에 가로막혀 있었으므로, 진보정당과 통일전선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1980년대에 '민주대연합' 형성과 민주연립정권 수립이라는 전략목표 이외에 다른 전략목표를 추구할 수 없었다.

1980년대에 진보변혁세력이 제기하였던 '민정수립'이라는 개념은 오늘 진보변혁세력이 말하는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운다는 뜻이 아니다. 진보정당과 통일전선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1980년대에 실현가능성이 있었던 민정수립강령은, 진보변혁세력과 보수야당 및 중도개혁세력이 정치적으로 연대하여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을 퇴진시키고 민주연립정권을 세우는 민주주의혁명의 정치강령이었다. 그에 비해서, 스무 해 뒤에 진보변혁세력이 제기하는 새로운 민정수립강령은, 계급적 중심과 대중적 기반을 가진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변혁지향적 대중항쟁에서 승리하여 신식민주의예속정권을 퇴진시키고 진보정당이 집권하여 자주적 민주정권을 세우는 민주주의혁명의 정치강령이다.

1980년대 후반기에 남(한국)의 사회계급적 모순관계는 정치적 대립구도보다 더 복잡하였다. 당시 사회계급적 모순관계는 반동군부세력의 지휘를 받는 신식민주의예속자본, 도시소자산계층, 노동계급, 근로농민을 비롯한 각계층 대중들 사이에서 복잡한 대결양상을 드러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의 폭압만행으로 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으므로 신식민주의지배계급 대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의 모순관계가 격화되었으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아직 힘있는 사회정치세력으로 나서지 못한 조건에서 신식민주의지배계급 대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의 정치적 대립구도는 형성되지 못하였다.

1980년대 중반기까지만 해도 남(한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조직적 분산상태를 극복하지 못하였으므로 힘있는 사회정치세력이 아니었다. 1987년 여름에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이 연거푸 일어난 때부터 민주노조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지역업종별 노동조합협의회(지노협)와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노운협)의 조직기반 위에서 '민주노조의 전국적 단결'을 성취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된 때는 1990년 1월 22일이었고, 진보적 근로농민의 대표체인 전국농민운동연합(전농련)이 결성된 때는 1989년 3월 2일이었다. 95개 대학의 학생운동세력을 결집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결성된 때는 1987년 8월 19일이었고, 청년운동세력을 결집한 전국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전청대협)가 결성된 때는 1989년 1월 19일이었다.

1980년대 후반기에 독자적인 사회계급이 아니면서도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의 폭압만행에 맞서 정치적 대립구도를 형성한 사회계층은 도시소자산계층이었다. 도시소자산계층이 정치적 대립구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까닭은, 1980년대 중반기에 금리, 유가, 환율이 동반하락하면서 남(한국)의 경제성장률을 연평균 12-13%로 끌어올린 이른바 '3저호황'이라는 일시적 호황기에 도시소자산계층의 양적 구성이 늘어나고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지는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한 변화를 겪은 사회계층이 정치적 요구를 제기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이후 열다섯 해 동안 초보적 민주주의마저 박탈하고 집권을 연장해온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을 향해 반감을 품게 된 것 역시 당연한 이치였다.

신식민주의군사정권에게 반감을 품고 초보적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도시소자산계층의 정치적 요구에 재빨리 부응한 정치세력은, 김대중과 김영삼을 정점으로 결집한 보수야당이었다. 6월 항쟁 직전에 등장한 통일민주당의 정체성은, 1945년 9월 16일 창당한 날부터 입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떠들면서도 극우반동적 행태를 드러냈던 한국민주당(한민당)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남(한국)의 정당사에서 민주당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던 여러 보수야당들의 뿌리는 한민당에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도시소자산계층의 목소리가 커진 1980년대 후반기에 남(한국)의 보수야당은 그 계층의 정치적 요구를 대변하는 중도개혁정당으로 재빨리 변신하면서 자기들의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였다. 이를테면, 1985년 1월 18일 옛 신민당 출신들이 결집하여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하였고, 1987년 5월 1일 김대중과 김영삼이 신민당을 와해시키고 통일민주당(통민당)을 창당하였으며, 1987년 11월 12일 김대중이 통민당에서 갈라져 나가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하였다.

6월 항쟁의 대립구도에서 가장 주목하는 대상은, 군정퇴진과 민정수립이라는 전략목표를 추구한 진보변혁세력이다. 1980년대 후반기에 중도개혁세력이 보수야당과 뒤엉킨 것과는 달리, 진보변혁세력은 '재야민주세력'이라는 모호한 개념에 파묻혀 독자적 실체를 드러내지 못하거나, 또는 노동계급, 청년학생계층, 지식인계층에 산재되어 있었다.

진보변혁세력은 신식민주의군사정권에 맞서 비록 산개전(散開戰)을 벌이고 있었으나, 1986년 5월 3일에 일어난 인천항쟁에서 자기의 독자노선과 투쟁력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인천항쟁에서 진보변혁성향의 여러 운동단체들은 각기 정치집회를 열었고 3만여 명이 시위투쟁에 나섰는데, 진압경찰은 시위현장에서 130여 명을 강제연행하였다. 인천항쟁은 진보변혁세력이 중도개혁세력과 다른 새로운 사회정치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입증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1984년 6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중심으로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가 결성되었고, 1984년 10월에는 '재야민주인사'를 중심으로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가 결성되었다. 1985년 3월 민민협과 국민회의가 통합한 진보적 대중정치조직이 등장하였으니 그것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다. 민통련은 "민중노선을 지향하는 장외 재야정치운동단체"라고 자기 정체성을 밝혔다.

물론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의 악랄한 감시와 탄압 속에서 민주주의혁명이라는 개념을 명시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불가피한 사정도 있었겠으나, '민중노선'이나 '재야정치운동단체'라는 다소 모호한 개념을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민통련에 참여한 진보변혁세력이 민주주의혁명을 인식하는 수준은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식민주의체제를 무너뜨리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민주주의혁명의 역사적 전망을 갖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민통련은 진보변혁세력의 독자적인 대중정치조직이 아니라, '재야민주인사'들과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이 집결한 대중정치조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1980년대 민주주의혁명의 전략목표로 제기된 군정퇴진과 민정수립을 위하여 투쟁하였다는 점에서 민통련을 진보변혁세력의 정치적 대표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국민운동본부 발기인 2천191명 가운데 민통련 계열인사가 3분의 2를 차지하였으므로, 군정퇴진과 민정수립이라는 대중항쟁의 전략목표를 추구한 민통련이 국민운동본부의 주도권을 쥐고 6월 항쟁을 이끌어 가는 것이 당연하였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민통련은 보수야당이 매달렸던 직선제 개헌투쟁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민주헌법쟁취라는 독자적인 투쟁노선에 따라 대중투쟁력을 조직하고 있었으면서도, 민통련에 참가한 일부 중도개혁성향 인사들의 정치적 보수성을 청산하지 못하는 내부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를테면, 민통련은 김대중, 김영삼 같은 보수야당 핵심인사들과 함께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민국련)'라는 비상설 연락기구를 만들어놓고 '재야운동권'과 제도정치권의 정치연대가 실현되기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86년 4월 28일 김세진, 이재호 두 열사의 분신항거로 전투적 학생운동이 반제노선을 선명하게 제기하자, 민국련은 "반미, 용공, 과격시위를 반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내놓았다. 그 사태를 계기로 민통련은 민국련과 관계를 끊고, 민통련 지도부가 사퇴하는 혼란에 빠졌다. 이것은 '재야운동권'과 제도정치권의 정치연대에 기대를 거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꿈이었는지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노태우가 '6.29선언'을 발표하자, 대응전략을 논의하기 위해서 1987년 6월 30일에 열렸던 국민운동본부 전략회의에 김대중과 김영삼도 참석하였다. 전략회의에서 그 두 사람은 6월 항쟁을 중지하고 선거로 정권을 교체하자는 '선거혁명론'을 들고 나왔는데, 민통련은 김대중과 김영삼이 대선후보를 단일화하는 조건으로 '선거혁명론'을 받아들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후보단일화를 약속한다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간 국민운동본부는 항쟁을 중지하고 '선거혁명론'의 수렁 속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이 자기들을 갈라놓으려 하지만 자기들은 "민주화 이후까지도 협력"하면서 "국민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고 떠들었던 김대중과 김영삼은, 1987년 10월 22일 외교구락부 회동을 마지막으로 불과 석 달만에 갈라섰다. (『한겨레』 2007년 6월 10일)

민통련의 한계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대중조직을 건설하지 못하고 아직 분산된 역량으로 투쟁해야 하였던 1980년대 내내 진보변혁세력을 가로막았던 한계, 그리하여 민통련이 6월 항쟁 직후에 폭발한 노동자대투쟁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던 사회계급적 한계였다.

또한 민통련의 한계는 6월 항쟁을 이끌지 못하고 통민당 대 민정당의 대립구도에 휘말려버린 국민운동본부의 한계, 그리고 김대중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는 '선거혁명론'의 환상에서 오래도록 벗어나지 못한 한계였다. 그 한계는 제국주의반동정권과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의 반격과 역공을 막아내지 못하고 6월 항쟁의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진보변혁세력 전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설령 6월 항쟁으로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을 퇴진시켰다 하더라도 진보변혁세력의 힘이 미약하였으므로, 6월 항쟁의 승리가 신식민주의체제의 붕괴로 이어지지 못하고 보수야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정치적 비극으로 막을 내렸을 것이다. 6월 항쟁이 한계에 가로막혀 좌절한 뒤 스무 해 동안,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남(한국)의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이 온갖 시련과 난관을 뚫고 투쟁해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3-2) 항쟁의 기폭계기들

1980년대 후반기에 전개된 투쟁경험을 살펴보면, 1986년 이후 노동계급의 분신항거가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사회적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 까닭은, 당시 노동계급이 민주노조를 건설하지 못한 채 분산적으로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 대학생들의 분신항거, 그리고 고문만행이나 직격최루탄 난사로 숨진 대학생들의 희생은 지역별 학생협의체를 중심으로 전투적 학생계층의 투쟁력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자본주의언론시장에서는 노동계급의 분신항거는 축소하거나 흘려보내면서도 대학생의 분신항거는 크게 보도하였다.

명백하게도, 6월 항쟁이 폭발한 계기는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의 폭압만행이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대중정치집회를 진압경찰의 폭력봉쇄와 강제연행으로 짓밟고, 체포연행한 여대생 활동가에게 전대미문의 성고문을 가하고, 민청련 의장을 체포구금하여 전기고문을 들이대고, 박종철 열사를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살해하고, 시위대오에 나선 이한열 열사를 직격최루탄을 난사하여 살해하는 등 극악무도한 만행은 대중을 극도로 격분케 만들었다. 박정희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이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휘두르며 폭압강도를 한층 높인 이래, 전두환을 우두머리로 하는 반동군부세력 2세대(신군부세력)가 출몰하여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광주민중을 학살하고 정권을 찬탈한 뒤, 폭압만행의 올가미를 틀어쥐고 사회 전반을 암흑천지로 만들더니 극악무도한 고문살해만행까지 저지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86년에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이 저지른 가혹한 탄압으로 잠시 위축되는 듯하였던 대중정치투쟁이 1987년 4월 전두환이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고, 5월 18일에 박종철 열사에 대한 고문살해만행이 폭로된 것에 자극을 받아 엄청난 폭발력을 한꺼번에 발산하면서 터져 나온 것이 6월 항쟁이다. 자연발생적 대중항쟁의 폭발과정이 일보후퇴 십보전진의 돌비양상으로 전개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군정퇴진과 민정수립이라는 전략목표에로 투쟁방향을 잡아야 하였던 6월 항쟁 기간에 울려 퍼진 중심구호는 호헌철폐 독재타도 또는 독재타도 민주쟁취라는 구호였다. 그 구호는 보수야당과 중도개혁세력의 선거개혁구호로 들리기도 하고, 진보변혁세력의 군정퇴진구호로 들리기도 하는, 매우 모호하게 접합된 구호였다. 투쟁방향은 투쟁구호에 반영되는 법인데, 민통련이 통민당 대 민정당의 대립구도에 말려들수록 군정퇴진 민정수립이라는 구호는 들리지 않았다. 군정퇴진과 민정수립이라는 전략목표는 실종되었고, 투쟁방향이 호헌철폐와 직선제 개헌이라는 선거개혁의 전술목표로 집중되었다. 전략목표가 실종된 것은 6월 항쟁을 좌절시킨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주목하는 것은, 전두환이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 직후 이른바 '개헌정국'이 조성되자 보수야당은 군정퇴진과 민정수립이라는 전략목표를 방기하고 호헌철폐와 직선제 개헌이라는 전술목표에 집중하면서 6월 항쟁을 통민당 대 민정당의 대립구도로 몰아갔다는 점이다. 통민당과 일면 공조하고 일면 갈등하였던 민통련은 통민당 대 민정당의 대립구도를 깨뜨리지 못했고, 6월 항쟁의 전략목표를 세우는 데서 실패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요구된다.

6월 항쟁 이전에 여러 형태로 전개된 대중정치투쟁은 명백하게도 진보변혁세력이 이끌고 있었다. 진보변혁세력이 개최한 범국민대회라는 이름의 대중정치집회는 대중의 정치적 요구를 집단적으로 표출시키는 대중정치투쟁의 가장 중요한 전술공간이었다. 6월 항쟁 직전에 대중정치집회라는 전술공간에서 전개된 투쟁은 직선제 개헌투쟁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1987년 2월 7일 '박종철 군 범국민추도식'을 개최하였으나 경찰봉쇄로 무산되자 도심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투쟁이 벌어졌고, 799명이 강제연행되었다. 1987년 3월 3일 '박종철 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을 개최하였으나 또 다시 경찰봉쇄로 무산되자 도심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투쟁이 벌어졌고, 439명이 강제연행되었다. 이처럼 진보변혁세력은 1986년 8월 14일 2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고문, 성고문, 용공조작 범국민폭로대회' 이후 대중정치투쟁을 주도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1987년 상반기에 진보변혁세력이 주도한 대중정치투쟁이 군정퇴진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고문만행 규탄투쟁에 머물렀던 까닭은, 1986년에 전개한 군정퇴진투쟁이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의 악랄한 탄압에 밀리면서 투쟁력이 일시적으로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986년 5월 3일 인천항쟁에서 항쟁참가자들은 광주민중을 학살한 군사독재정권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군정퇴진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은 인천항쟁의 배후세력을 색출하겠다고 떠들면서 전체 진보변혁세력을 마구 짓밟았다. 또한 1986년 10월 28일 26개 대학생 2천여 명이 건국대학교에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 결성대회를 열었으나 진압경찰의 포위망에 갇혀 대학건물에서 농성투쟁에 들어갔는데, 10월 31일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은 진압경찰 8천여 명을 내몰고 헬기까지 출동시킨 진압작전을 벌여 1천219명을 강제연행하였을 뿐 아니라, 학생운동세력을 '정국불안을 획책하는 좌경폭력집단'이라고 비방, 중상하면서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려고 광분하였다.

이처럼 1986년에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의 야만적 탄압에 밀린 진보변혁세력은 신식민주의군사정권에게 전략적 타격을 가하는 군정퇴진투쟁을 잠시 접어둔 채,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의 고문만행과 용공조작을 폭로, 규탄하는 전술적 타격을 가하는 한편, 1986년에 탄압으로 손상을 입은 투쟁역량을 보충, 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87년 4월 13일 이후 진보변혁세력은 대중정치투쟁의 주도권을 보수야당에게 빼앗기고 말았고, 고문만행 규탄투쟁은 직선제 개헌투쟁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그 까닭은, 전두환이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논의를 유보하고, 현행헌법을 고수하며, 대통령 선거를 올해 안에 실시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자 김대중 계열과 김영삼 계열은 재빠르게 신민당에서 탈당하여 통민당을 창당하였다. 통민당 창당은 보수야당이 주도하는 개헌정국이 조성되었음을 뜻하였다.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보수야당은 대중정치투쟁의 방향을 호헌철폐와 직선제 개헌으로 몰아가기 시작하였다.

3-3) 항쟁기의 네 갈래 대응전략

고문만행 중지와 최루탄 추방, 호헌철폐와 직선제 개헌은 6월 항쟁의 전술목표였고, 군정퇴진과 민정수립은 6월 항쟁의 전략목표였다.

대통령 직선제는 보수야당이 정치적 이익을 거머쥘 최대의 정치현안이었고, 직선제 개헌은 보수야당이 정치적 주도권을 틀어쥘 사활적 과제였다. 그리하여 신민당은 1985년 10월 정기국회 대표연설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일찌감치 밝힌 바 있었고, 1986년 2월 12일에는 개헌추진 1천만 명 서명운동을 개시하였다.

직선제 개헌요구가 자본주의언론시장의 증폭기능에 힘입어 가장 폭넓은 사회정치적 공감대를 형성하였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나, 직선제 개헌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적 요구라고 하기보다는 보수야당과 도시소자산계층의 정치적 요구였다. 직선제 개헌을 성사시키면 보수야당은 집권기회를 낚아챌 수 있었고, 경제성장의 열매를 따먹고 있던 도시소자산계층은 시민적 자유를 즐길 수 있었으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투표용지만 받아 쥐는 것뿐이었다. 1987년 10월 29일 신식민주의군사정권과 보수야당이 야합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채택하고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고 '국민기본권'을 더 많이 보장해주는 내용으로 헌법을 개정함으로써 제6공화국이 출범하였으나, 제6공화국이 보장하는 '국민기본권'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겪는 고통과 불행을 덜어주지 못하는 사이비 기본권이다.

6월 항쟁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진정한 정치적 요구는 군정퇴진과 민정수립이었다. 군정퇴진과 민정수립은, 시민적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개헌'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는 민주헌법 제정으로 해결될 수 있는 근본요구였다. 그러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적 요구는 보수야당과 중도개혁세력의 직선제 개헌요구에 밀려나 거의 들리지 않았다.

집권욕망에 사로잡힌 보수야당이 6월 항쟁 기간에 취한 행동은 6월 항쟁의 정치적 대표성을 선점하고 장악한 것밖에 없었다. 청와대와 민정당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경우, 통민당은 신식민주의군사정권에 대한 투쟁을 즉각 그만두고 밀실야합으로 넘어가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다는 '6.29 선언'을 내놓자, 보수야당은 투쟁을 그만두고 야합으로 돌아섬으로써 기회주의적 속성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노태우가 발표한 '6.29 선언'이 호헌철폐, 직선제 쟁취라는 투쟁목표를 제거하자마자 6월 항쟁의 투쟁열기는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항쟁의 거리는 일상의 거리로 되돌아갔다. 신식민주의군사정권과 보수야당의 야합은, 자연발생적 대중항쟁이 변혁지향적 대중항쟁으로 상승,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았을 뿐 아니라 진보변혁세력의 정치적 진출마저 가로막았다.

그런데 보수야당과는 달리, 진보변혁세력의 대응전략은 하나로 일치되지 못하고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첫째,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의 정세인식이다. 그들은 직선제 개헌을 쟁취함으로써 신식민주의체제에 붕괴의 파열구를 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들은 직선제 개헌투쟁이 대중을 군정퇴진투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견인투쟁이라고 보고, 직선제 개헌투쟁을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을 퇴진시킬 '실질적 대안'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6월 항쟁의 경험은 자민투의 정세판단과 대응전략이 오류였음을 말해준다. 직선제 개헌투쟁으로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을 퇴진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었다. 그들은 우경적 주관주의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둘째, 우경적 주관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한 다른 학생운동세력은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였다. 그들은 항쟁기를 혁명의 성숙기라고 판단하였고, 직선제 개헌요구를 대중의 혁명적 요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보수야당이 주도하는 개헌정국에서 그들은 군사독재정권을 타도하고 제헌의회를 소집하여 혁명정권을 세우는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들은 좌경적 주관주의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셋째, 그러한 좌우경적 오류를 범하지 않고 합리적인 견해를 내놓은 진보변혁세력이 있었다. 그들은 1985년 11월 22일 '군사독재퇴진 및 민주헌법쟁취위원회'를 결성함으로써 군정퇴진과 민주헌법 쟁취라는 전략목표를 제기하였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을 퇴진시켜야 민주헌법을 제정할 수 있으므로, 지금은 군정퇴진투쟁에 투쟁력을 집중할 때라는 것이다. 그들은 군정퇴진→민주헌법 제정→민주연립정권 수립이라는 사회변혁경로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군사독재퇴진 및 민주헌법쟁취위원회'를 확대, 개편하여 세운 진보적 대중정치조직이 민통련이다.

항쟁기의 대응전략에 관해서는 진보변혁세력만 고민한 것이 아니라,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이나 제국주의반동정권 역시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대응전략을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이 네 갈래로 갈라진다.

첫째, 대중항쟁 승리→군정퇴진→민주헌법 제정→민주연립정권 수립으로 이어지는 대응전략이다. 이것은 진보변혁세력의 대응전략이었으나, 그 세력의 힘이 약하여 아무 것도 실현할 수 없었다.

둘째, 야합에 의한 직선제 개헌→신식민주의체제 안정회복→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보수야당 집권으로 이어지는 대응전략이다. 이것은 보수야당의 대응전략이었다. 1987년 12월 16일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가 36.6%를 득표하여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보수야당의 대응전략은 파탄되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득표수를 합하면 55.1%나 되었으나, 그들의 분열은 보수야당의 전략적 패배를 자초하였다. 보수야당의 대응전략은 1987년 10월 10일 김영삼이 통민당 대선후보로 나서고, 10월 28일 김대중이 평민당 대선후보로 나섬으로써 분열의 수렁에 빠져들었을 때 이미 파탄된 것이다.

셋째, 대중항쟁 유혈진압→신식민주의체제 안정회복→군정연장으로 이어지는 대응전략이다. 이것은 전두환을 우두머리로 한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의 대응전략이었다. 전두환은 위수령을 발동해서라도 6월 항쟁을 유혈적으로 진압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이 내리누른 제동압력에 굴복하여 유혈진압작전을 포기하였다.

넷째, 야합에 의한 직선제 개헌→신식민주의체제 안정회복→군정연장으로 이어지는 대응전략이다. 이것은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이 밀고 나간 대응전략이었다. 6월 항쟁에서 12월 대통령선거까지 약 다섯 달 동안의 경험을 되짚어보면, 정치정세는 제국주의반동정권이 의도한 방향으로 밀려갔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6월 항쟁에서 격돌한 진보변혁세력과 제국주의반동정권의 대결이 진보변혁세력의 패배로 끝났음을 말해준다.

3-4) 제국주의반동정권의 반항쟁공작

위에서 지적한 대로, 6월 항쟁은 직선제 개헌쟁취라는 전술목표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이 6월 항쟁을 야만적으로 탄압할수록, 그리하여 그 항쟁이 폭력수단을 동원하는 격전양상을 띄게 되는 경우, 보수야당과 중도개혁세력은 겁을 집어먹고 뒤로 물러서고 그 대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전투적 청년학생계층 속에 산재되어 있는 진보변혁세력에게 항쟁의 주도권이 넘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6월 항쟁은 보수야당과 중도개혁세력이 내건 직선제 개헌쟁취라는 전술목표를 넘어서 진보개혁세력이 추구하는 군정퇴진과 민정수립이라는 전략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6월 항쟁이 전술목표를 넘어서 전략목표로 나아가는 것은,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이 대중항쟁으로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군정퇴진은 신식민주의체제의 중심기둥을 쓰러뜨리는 결정적인 사변이 될 수 있었다. 6월 항쟁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고심하였던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은 자연발생적 대중항쟁이 민주주의혁명으로 상승, 발전하는 길을 가로막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길을 가로막음으로써 신식민주의체제의 안정을 회복하여야 하였다. 자본계급이 '노사안정'이라는 구실로 반동적 착취체제의 안전을 지키는 것처럼, 제국주의반동정권은 '정국안정'이라는 구실로 반동적 신식민주의체제의 안전을 지킨다. 제국주의반동정권의 반항쟁공작이 일으킨 다음과 같은 사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첫째,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은 폭동진압군을 출동시켜 6월 항쟁을 유혈사태로 진압하려던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을 내리누르는 제동압력을 가했다. 주한미국군사령부가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틀어쥐고 한국군지휘부의 움직임을 낱낱이 감시하고 있었고, 항쟁기에 남(한국)에 증파된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이 주한미국대사관을 거점으로 삼고 암약하면서 청와대, 고위각료, 민정당 수뇌부의 동선을 낱낱이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위수령 발동과 진압군 출동을 막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남(한국) 전역에서 각계각층 군중 150만 명이 '최루탄 추방의 날' 시위투쟁에 궐기하였던 6월 18일 밤, 경찰력이 곳곳에서 마비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전두환은 부산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한국군 26사단에 폭동진압 출동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주한미국군사령관과 주한미국대사는 전두환에게 위수령 발동을 철회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제국주의반동정권의 제동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전두환은 6월 19일에 위수령을 해제하였고, 폭동진압무장을 하고 부산행 군용열차를 타려고 역으로 이동하던 26사단 병력은 영내로 돌아갔다. 위수령 발동이 미국의 압력으로 철회되었음을 보도한 것은 미국 언론이었다. (『워싱턴포스트』 1987년 7월 5일)

전두환이 제멋대로 위수령을 발동하자 미국 대통령 도널드 레이건(Ronald W. Reagan, 1911-2004)은 그날로 특사를 청와대에 급파하여 전두환에게 친서를 전달하였다. 이튿날인 6월 20일 국무차관 더윈스키가 서울에 가서 "군부개입은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다"고 제동을 걸었고, 6월 23일에는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차관보 개스턴 시거(Gaston J. Sigur, Jr.)가 서울에 가서 한국군의 개입을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6월 항쟁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던 결정적 시기에 미국 국무부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우리는 현재의 한국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군이 개입하는 것이 한국의 국익에 심각한 해악을 끼칠 것이라고 지적하고, 한국군지휘관들은 국방에만 전념하고 한국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통해 정치과정이 전개되도록 하라고 촉구하였다." (『동아일보』 1987년 6월 23일)

6월 항쟁이 끝난 뒤,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진 1987년 9월 2일 현대중공업 노동자 2만여 명이 시위투쟁에 참가하여 울산시청을 점거하였을 때도, 전두환은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9월 3일 오전 폭동진압병력이 출동하기 1시간 전에 갑자기 위수령이 해제되었는데(『내일신문』 1995년 12월 13일), 이것 역시 제국주의반동정권의 제동압력을 받아 해제한 것이었다.

둘째,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이 위수령 발동과 진압군 출동을 막는 것보다 더 어려움을 겪은 것은, 신식민주의군사정권과 보수야당이 직선제 개헌안에 야합하게 만드는 비밀공작이었다. 제국주의반동정권은 신식민주의군사정권과 보수야당이 직선제 개헌안에 야합해야 대중항쟁을 좌절시키고 신식민주의체제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제국주의반동정권은 신식민주의군사정권과 보수야당이 직선제 개헌에 야합하면, 1987년 12월에 실시하는 대통령선거에서 설령 보수야당이 집권하여 '문민정부'가 출현하더라도 자기들이 지배, 수탈하는 신식민주의체제는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직선제 개헌문제를 놓고 날카로운 대결이 벌어져 신식민주의체제가 혼란과 위기에 빠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은, 1987년 초부터 신식민주의군사정권에게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라는 노골적인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1987년 2월 6일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차관보 개스턴 시거는 한미협회에서 연설하면서 "한국은 문민정부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여야대결을 해결하는 혁신적인 타협안을 수용할 것을 희망한다"는 내용으로 발언하였다. (『월간중앙』 1990년 4월호) 그러나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한 달 뒤인 3월 6일 미국 국무장관 조지 슐츠(George P. Shultz)가 몸소 서울에 나타나서 신식민주의군사정권에게 "현실적 타협안으로 협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은,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이 지시한 여야타협을 거부하고 '4.13 호헌조치'를 전격적으로 발표함으로써 직선제 개헌투쟁을 물리적으로 진압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은 직선제 개헌투쟁에 불이 붙어 대중항쟁이 일어나더라도,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대중항쟁을 진압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였다. 이미 '애학투' 결성대회를 진압하고, 운동단체 해산명령을 내리고, 대중정치집회를 경찰봉쇄로 여러 차례 무산시킨 신식민주의군사정권에게는 대중항쟁도 진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신식민주의군사정권과 달리,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은 대중항쟁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던 1987년 5월부터 노골적으로 반항쟁공작에 나섰다. 1987년 5월 6일 미국 연방하원 청문회에서 개스턴 시거는 "부분적인 민주화를 위해 여야타협이 요구된다"고 말했으며, 5월 14일 국무장관 조지 슐츠는 신식민주의군사정권과 보수야당의 대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이튿날 국무부도 유사한 내용의 성명을 내놓았다. 두말할 나위 없이,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은 언론에서 드러난 공개행동보다 비밀공작에 더 힘썼을 것이다.

그러나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은 제국주의반동정권의 눈치를 살피며 시간만 끌었고, 직선제 개헌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버텼다. 정국이 팽팽한 대치상태에 잠겨있었던 1987년 5월 18일 박종철 열사 고문살해만행이 조작, 은폐되었음이 드러났고, 그것을 기폭제로 하여 투쟁의 불길이 치솟았으며, 결국 6월 항쟁이 폭발하였다.

6월 항쟁의 폭발력이 경찰력을 마비상태에 빠뜨리면서 신식민주의체제를 위협하자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은 자기들이 직접 작성한 타협문안을 전두환에게 들이대고 수락할 것을 지시하였다. 전두환은 결국 제국주의반동정권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제국주의반동정권은 1987년 6월 29일 노태우를 앞에 내세워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인다는 '6.29 선언'을 전격적으로 발표하게 하였다. 노태우가 '6.29 선언'을 발표하고 전두환이 7월 1일에 그 발표를 수락한 것은, 6월 항쟁이 신식민주의체제를 위협하는 수위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이 배후조종한 공작이었다.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에 주재하던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이 뒷날 언론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전두환과 노태우는 미국이 작성한 '6.29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버텼으나, 결국 전두환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노태우는 미국의 회유에 넘어가서 받아들였다고 한다. (『월간 WIN』 1996년 4월호)

제국주의반동정권의 반항쟁공작은 성공하였다. 노태우는 '6.29 선언'을 발표한 것이 자신의 '고독한 결단'이었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제국주의반동정권의 비밀공작을 감추려는 거짓말을 늘어놓았고, 신식민주의체제의 지배예속구조가 어떻게 작동되어 6월 항쟁을 좌절시켰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6.29 선언'을 6월 항쟁이 쟁취한 '전리품'으로 여기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노태우의 '6.29 선언'으로 6월 항쟁이 중지되었던 1987년 6월 30일 미국 연방하원 청문회에서 하원의원 스티븐 솔라즈(Stephen J. Solarz)는 "이번 일의 주역인 개스턴 시거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1987년 7월 1일) 솔라즈의 눈에는, 신식민주의군사정권과 보수야당을 야합으로 끌어내어 6월 항쟁을 좌절시키고 신식민주의체제의 안전을 지켜낸 개스턴 시거의 반항쟁공작이 노벨평화상을 줄만큼 '위대한 공로'로 보였을 것이다.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이 신식민주의군사정권과 보수야당을 야합하게 만든 것은, 세 방향에서 6월 항쟁에 치명타를 가했다.

첫째,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이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이자, 직선제 개헌투쟁에 집중하였던 6월 항쟁은 갑자기 투쟁목표를 잃어버렸다. 투쟁목표의 상실은 항쟁중지, 국민운동본부 자진해산, 그리고 민통련의 분열, 분산이라는 좌절의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둘째, 5.18 광주민중항쟁 시기 양민학살의 공범이었으며 12.12 군사반란의 공범인 극우분자 노태우가 대중의 직선제 개헌요구를 해결해준 '민주화의 기수'로 등장하였다.

셋째, 직선제를 쟁취하였으니 연말에 예정된 대통령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교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선거혁명의 환상'이 대중에게 확산되었다.

만일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이 '6.29 선언'으로 6월 항쟁을 좌절시키지 않았다면, 그 항쟁은 직선제 개헌이라는 전술목표를 넘어서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을 퇴진시키고 보수야당에게 집권기회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국주의반동정권의 반항쟁공작이 성공하여 6월 항쟁이 멈춰서고, 붕괴위기에 몰렸던 신식민주의군사정권이 수명을 연장하고, 신식민주의체제가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명백하게도, 6월 항쟁을 좌절시키고 신식민주의체제의 안정회복과 군정연장을 밀고 나간 것은 제국주의반동정권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신식민주의체제에 맞서 싸우는 진보정당과 통일전선이 반제투쟁을 경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사회변혁의 필패요인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1987년 6월 26일 서울에서 총궐기한 시위군중 25만 명은, 진압경찰이 구축한 3중 방어선을 무너뜨리면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주한미국대사관 진격투쟁에 나서지는 않았다. '독재지원 내정간섭 미국은 물러가라'는 구호는, 6월 항쟁의 폭발력이 이미 한풀 꺾인 7월 9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군중 10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거행된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나왔으나, 때는 너무 늦었다. 항쟁의 불길은 사그라졌고 국민운동본부는 기가 꺾였고 전투적 청년학생계층은 항쟁의 거리에서 떠나버렸다.

3-5) 다시 솟구친 항쟁의 불길

대중항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대중항쟁의 불씨마저 꺼져버렸다고 체념하는 분위기가 번져가고 있었던 1987년 7월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대중항쟁이 일어났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짓눌리며 사회계급적 착취를 당해온 노동계급이 1987년 7월 5일 현대엔진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투쟁을 벌인 것을 신호탄으로 하여, 항쟁의 불길이 다시 솟구친 것이다. 8월 16-17일에는 현대그룹노조협의회가 주도하고 노동자 4만여 명이 참가한 대투쟁이 전개되었다. 자연발생적 계급투쟁은 남(한국) 전역의 공장과 기업으로 확산되었다. 도시소자산계층이 주도한 자연발생적 대중항쟁이 1987년 7월 이후 노동계급이 궐기한 자연발생적 계급투쟁으로 대체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87년 남(한국)의 노동계급이 궐기한 자연발생적 계급투쟁을 노동자대투쟁이라 부른다.

1986년에 2천658개였던 노동조합은 1987년 4천86개, 1988년 6천142개, 1989년 7천882개로 장성하였고, 노조조직률도 1987년 13.8%, 1988년 17.8%, 1989년 18.7%로 늘어났으며, 자연발생적 계급투쟁도 1986년 276회에서 1987년에는 3천747회로 폭증하였고, 1988년 1천873회, 1989년 1천616회를 기록하며 꾸준히 상승세를 이어갔다. 노동자대투쟁의 열기 속에서 개별적 노동자들은 연속적인 분신항거로 '자본의 세상'에 저항하였다. 1986년에는 박영진 열사와 변형진 열사의 분신이 있었던 것에 비해, 1987년 3월 6일 표정두 열사 분신, 3월 27일 장재완 열사 자결, 5월 17일 황보영국 열사 분신, 10월 16일 김수배 열사 분신, 11월 3일 김성애 열사 투신, 12월 5일 박응수 열사 분신, 12월 10일 박태영 분신이 있었다. 1987년 8월 22일 이석규 열사가 진압경찰이 난사한 직격최루탄을 맞고 희생되었다. 1988년에는 1월 6일 이대건 열사 분신, 3월 1일 김장수 열사 분신, 4월 25일 최윤범 열사 분신, 5월 24일 장용훈 열사 분신, 6월 29일 성완희 열사 분신, 11월 6일 이문철 열사 분신으로 이어졌다. 1988년에 노동자 오범근, 문용섭, 배중손은 의문사로 희생되었고, 이상남은 구사대폭력으로 피살되었다.

노동자대투쟁 시기에 전투적 노동계급이 제기한 요구는 민주노조 건설, 임금인상, 근로조건 개선이었다. 그것은 자연발생적 계급투쟁에서 제기되는 생존권 요구이고, 생존권 요구만 제기하는 것으로는 자연발생적 계급투쟁을 변혁지향적 계급투쟁으로 상승, 발전시킬 수 없었으나, 노동자대투쟁은 6월 항쟁을 좌절시킨 제국주의반동정권의 반항쟁공작을 파탄시켰을 뿐 아니라, 남(한국)의 노동계급을 사회역사발전의 주체로 나서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로 되었다. 6월 항쟁에 부분적으로 참가하고 그 항쟁에서 부차적인 지위밖에 갖지 못하였던 노동계급은, 그로부터 스무 해가 지난 오늘 신식민주의체제에 맞서 싸우는 최전선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4. 글을 맺으며

전투적 학생계층이 격전의 선봉에 섰던 6월 항쟁으로부터 스무 해가 지난 오늘 학생계층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언론은 오늘 학생계층이 "도서관과 고시학원, 피씨(PC)방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다"고 지적하면서, "6월 항쟁을 주도했던 학생운동세력은 대학 안에서도 소수로 전락해 총학생회 선거에서 비운동권에 잇따라 고배를 마실 정도로 외면 당하고" 있고, 그나마 남아있는 몇몇 운동권 총학생회는 6월 항쟁 2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다가 학생들의 무관심에 떠밀려 행사를 취소하거나 축소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연합뉴스』 2007년 6월 3일)

학생운동이 전반적으로 침체하고 학생계층의 사회정치의식이 퇴행한 것은, 사회계급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요인인지를 일깨워주며, 또한 진보정당과 통일전선에 계급적 중심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지를 일깨워준다.

"노조가 임금협상을 유리하게 끌어내는 것 못지 않게 고루 잘 사는 사회를 만드는 데 가장 앞장서야 한다"는 믿음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경험에서 얻었다고 말하는 현대중공업 특수선 생산부 노동자 한 사람은 얼마 전 신문기사에 이런 말을 남겼다.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20년이 지났는데 노동자도 다 같은 노동자로 대접 받지 못하고 있고, 노조는 '이익단체'로 전락해 따가운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생활은 확실히 나아졌지만 노동자들이 맘 편하게 일하고 정당한 대우를 받고 사는 세상은 아직 아니죠. 내가 정규직이라 안심하고, 다른 이들보다 좀 더 받는다고 위로 받는 사이 내 아이들이 차별 받는 비정규직이 되는 미래를 결코 잊어선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한겨레』 2007년 6월 8일)

더 이상 해설을 요구하지 않을 만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민주주의혁명을 끝까지 밀고 나갈 중심역량이라는 점이 명백하고, 노동계급적 관점을 가진 진보변혁세력이 대중항쟁을 끝까지 이끌어갈 핵심역량이라는 점이 명백하다.

보수야당은 그토록 갈망하였던 집권에 성공하자 신자유주의세계화의 길에 성큼 뛰어들었다. 전에는 듣지도 못했던 기업구조조정 강행, 비정규직 확대, 신식민주의무역협정이 노동계급의 피땀을 쥐어짜고 근로농민을 비롯한 각계층 대중의 목을 조르고 있다. 보수야당이 집권하여 정권이 교체되고 초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하는 이른바 '87년 체제'는 민주화라는 이름을 내던지고 반동화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세계화 이후 반동화된 '87년 체제'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한미자유무역협정의 재앙 속으로 마구 떠미는 중이다.

앞으로 언젠가 남(한국)에서 일어나게 될 변혁지향적 대중항쟁은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결합한 제3형태의 거대한 대중항쟁이 될 것이다. 변혁지향적 대중항쟁의 과학적 전망 속에서 민주주의혁명의 승리가 보인다. (2007년 6월 17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