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초기조치 합의와 초기단계의 전략적 승리

 

<차례>
1. 글을 시작하며
2. 양보가 아니라 포기이다
3. 북(조선)이 관철한 2대 원칙

4. 동아시아담당보좌관의 비밀접촉
5. 베를린 회담의 비공개 양해각서
6.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저지른 훼방
7. 제국주의금융제재의 시작과 끝
8. 허물어지는 것과 재생되는 것

9. 글을 맺으며

1. 글을 시작하며

정치적 기적(political miracle)이 일어날 수 있을까? 상상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기적이라 한다면, 2007년 2월 8일부터 13일까지 베이징에서 열린 제5차 6자회담 3단계 회의에서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한 초기조치(Initial Actions for the Implementation of the Joint Statement)를 합의한 것은 정치적 기적이라 부를 만하다.

언론은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한 초기조치를 2.13 합의로 줄여서 부르는데, 내가 보기에는, 2.13 초기조치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하다.

2.13 초기조치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왜곡선전에 휘말려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조치가 발표된 것을 보면서도 덤덤하겠지만, 1993년부터 오늘까지 14년 긴 세월동안 '핵문제'를 풀어내려고 끊임없이 투쟁해온 북(조선)의 시좌(視座)에서 바라보면 그 조치를 왜 정치적 기적이라 하는지를 직감할 수 있다.

정치적 기적은 허공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땅속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거창한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고 결심한 사람들이 노력과 투쟁으로 쟁취한 값진 성과이다. 정치적 기적 속에 소리 없이 스며있는 수많은 피땀의 흔적을 헤아려 보아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2.13 초기조치를 합의한 정치적 기적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이 물음을 총체적으로 해명한 완성도를 그리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너무 성급한 일이며, 나 같은 개별 연구자가 지닌 제한된 정보력과 집필력으로는 가능하지도 않다. 세계사를 바꿔놓은 전환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이 그러하듯이, 2.13 초기조치도 훗날에 내려질 역사적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초기조치(initial actions)를 넘어 최종조치(final actions)까지 완수한 뒤, 사연도 많고 곡절도 많았던 길고 오랜 과정을 되돌아볼 때를 만나야 비로소 완성도를 그릴 수 있을지 모른다. 오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언제나 미래에 속해 있다.

완성도에 거는 기대를 먼 훗날로 미루면서, 나는 이 글에서 2.13 초기조치를 왜 정치적 기적으로 보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기적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논하려고 한다.

이미 두루 알려졌을 뿐 아니라, 2.13 초기조치를 합의하는 과정에서도 다시 입증된 것처럼, '핵문제'는 북(조선)의 핵문제(nuclear issue)도 아니고 동북아시아의 지역문제(regional issue)도 아니고, 명백하게도 조미관계의 근본문제(fundamental issue)이다. 다시 말해서, 조미관계의 근본문제가 '핵문제'라는 현상을 뒤집어쓰고 나타나, 지난 14년 동안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요동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2.13 초기조치를 합의한 정치적 기적이 6자회담에 참가하는 여러 당사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조미관계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모든 사물은 힘(energy)이 작용할 때 변화를 일으키는 법이다. 이 법칙은 물리학이 밝혀준 자연현상의 진리이자, 사회과학이 밝혀준 사회역사발전의 진리이다. 이 글에서 정치적 기적이라고 부르는 현상 속에서도 어김없이 그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핵문제'를 놓고 날카로운 대립구도를 형성한 조미관계에 어떤 강한 힘이 작용하면서 일어난 변화가 바로 2.13 초기조치의 합의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조미 대결구도를 팽팽하게 지탱해오던 힘의 균형은 그 균형을 유지해온 힘보다 더 강한 힘이 작용하자 마침내 깨졌고, 그에 따라 2.13 초기조치를 합의한 정치적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2.13 초기조치가 조미관계에서 합의되었으므로, 그 조치의 의미를 파악하는 관점은 북(조선)의 사회주의적 관점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관점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관점밖에 다른 관점은 있을 수 없다. 2.13 초기조치를 논할 때, 제3자의 관점은 방관자의 관점이 아니면 기껏해야 방조자의 관점밖에 되지 못한다.

2.13 초기조치를 논하는 이 글은 두말할 나위 없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관점을 외면하고 북(조선)의 사회주의적 관점을 취한다.

2. 양보가 아니라 포기이다

말장난으로 사람을 속이는 짓을 기만행위라 한다. 내가 보기에, 2.13 초기조치와 관련하여 자본주의언론시장에 떠도는 이러저러한 헛소리들은 정치적 기만행위의 산물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엉뚱한 곳으로 쏠리게 만드는 기만행위에 동원되는 것이 핵시설의 불능화(disablement)라는 신조어이다. 이 신조어는 2.13 초기조치에 들어있는 "모든 현존하는 핵시설의 불능화(disablement of all existing nuclear facilities)"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명백하게도, 북(조선) 핵시설의 불능화는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는 초기단계를 넘어섰을 때, 미국이 관철하게 될 정치적 요구이다. 2.13 초기조치는 한(조선)반도를 비핵화하는 초기단계에서 북(조선)의 핵시설들을 '폐쇄(shut down)'하고 '봉인(seal)'하고, 그 다음 단계에 가서 불능화한다고 명시하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명시는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에서 발표한 조미기본합의(Agreed Framework)가 초기단계에서 북(조선)의 핵시설들을 '동결(freeze)'하고, 그 다음 단계에 가서 '해체(dismantle)'한다고 명시한 것과 똑같은 의미이다. 말만 바꾼 것뿐이지, 아무런 차이가 없다. 미국의 대외관계협의회(CFR) 부회장 개리 새모어(Gary Samore)가 지적한 것처럼(『연합뉴스』 2007년 2월 16일), 부쉬정부가 2.13 초기조치에 불능화라는 새로운 용어를 집어넣은 까닭은 클린턴정부 시기에 발표된 조미기본합의와 똑같은 접근방식을 취했다는 비판을 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언론시장에서 글을 팔아먹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전혀 엉뚱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들은 불능화가 마치 2.13 초기조치의 중심개념인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2.13 초기조치를 불능화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은, 북(조선)의 핵시설들을 하루라도 더 일찍 불능화하려고 안달하는 미국의 정치적 요구에 들어맞는 부분만 골라내어 그 의미를 확대해석하는 오류이다. 2.13 초기조치를 합의하는 과정이나 그 조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마치 미국의 정치적 요구가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의 오류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러한 종류의 오류는 무지의 소산이 아니라 정치적 의도가 빚어내는 기만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적 기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상황은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2.13 초기조치를 합의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자기의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기는커녕 슬그머니 접어두어야 하였다. 미국이 자기의 정치적 요구를 접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미국과 대결하는 북(조선)이 자국의 정치적 요구를 강한 힘으로 밀어붙이면서 기어이 관철하였기 때문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미국의 정치적 요구와 북(조선)의 정치적 요구는 상반된 것이어서 절충이나 타협을 배제한다. 적대관계에서 어느 한 쪽이 자기의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면, 다른 한 쪽은 자기의 정치적 요구를 불가피하게 포기해야 한다.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에서는 승리와 패배 이외에 다른 결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본주의언론시장에서는 부쉬정부가 북(조선)에게 '양보(concession)'하여 2.13 초기조치가 합의된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원래 양보란 자기의 의견이나 주장을 접고 남의 의견이나 주장을 따르는 겸양의 미덕(virtue of modesty)이다. 그런데 2.13 초기조치에서 미국은 자기의 의견과 주장을 접고 겸양의 미덕을 보여준 것이 결코 아니다. 헤리티지재단(Heritage Foundation)의 분석가 브루스 클링너(Bruce Klingner)가 지적하였듯이, 부쉬정부는 자기의 원칙을 '포기(abandon)'하였던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2007년 2월 14일)

원칙이란 모든 행동을 규제하는 기본법칙이므로, 부쉬정부가 자기의 원칙을 포기하고 북(조선)의 원칙에 끌려간 것은 양보가 아니다. 미국이 원칙을 포기한 것은 양보가 아니라 전략적 패배이고, 북(조선)이 원칙을 관철한 것은 양보를 받아낸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승리한 것이다. 이에 관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3. 북(조선)이 관철한 2대 원칙

2.13 초기조치에서 북(조선)은 2대 원칙을 관철하였다. 북(조선)은 '핵문제'가 제기된 1993년 이후 지금까지 변함없이 직접협상 원칙(the principle of direct negotiation)과 행동 대 행동의 원칙(the principle of action for action)에 의거하여 자기의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려고 힘써왔다. 반면에, 북(조선)과 적대관계에 있는 미국은 북(조선)의 직접협상 요구를 거부하고 이른바 다자외교 원칙(the principle of multilateral diplomacy)을 완강히 고집하였고, 특히 부쉬정부는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을 거부하면서 자신은 말만 하고 상대에게 먼저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일방행동의 원칙(the principle of unilateral action)을 고집하였다. 부쉬정부는 자기들이 이른바 '악의 축(the axis of evil)'으로 비방중상한 상대에게 일방행동의 원칙을 강요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핵문제'가 정상화되지 않은 조미관계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조미관계를 정상화하여야 하며, 조미관계를 정상화하려면 반드시 조미직접협상을 진행해야 한다. 조미직접협상은 '핵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도이다.

그러므로 조미직접협상으로 '핵문제'를 풀어가려는 북(조선)의 직접협상 원칙은 합리적이고 정당하지만, 직접협상 요구를 거부하면서 조미관계에서 발생한 '핵문제'를 다자구도로 끌어가는 부쉬정부의 다자외교 원칙은 불합리하고 부당한 것이다. 지난 14년 동안 '핵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투쟁은 직접협상 원칙과 다자외교 원칙, 그리고 행동 대 행동의 원칙과 일방행동의 원칙 사이에서 벌어진 투쟁이었다.

사리를 판단할 줄 아는 중학생이 보아도 합리적이고 정당한 직접협상 원칙을 부쉬정부가 줄곧 거부해온 까닭은, '핵문제'를 합리적으로, 정당하게 해결할 의사가 그들에게 애초부터 없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부쉬정부가 직접협상 원칙을 부정한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부쉬정부에게 조미관계를 정상화하려는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제43대 미국 대통령 부쉬(George W. Bush)를 우두머리로 하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성원들의 머리 속에는 제국주의적 강압과 전횡으로, 더 나아가서 제국주의전쟁위협으로 '핵문제'를 '해결'해보려는 난폭한 의지와 욕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부쉬정부가 '핵문제'를 다자구도로 끌어간 것은 다자외교를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강압과 전횡, 그리고 제국주의전쟁위협을 다자외교의 요란한 토론으로 가려놓으려고 하였던 술책이다.

2006년 6월 1일 국무부 부대변인 톰 케이시(Tom Casey)는 "지금 문제는 북미 직접대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6자회담의 틀 속에서 북한과 직접대화를 해왔다"고 말했으며, 백악관 대변인 토니 스노우(Robert Antony Snow)는 "미국은 북한과의 양자협상을 수용하지 않을 방침"이며 "미국정부는 어떠한 협상도 6자회담을 통해서 한다는 기존입장을 고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2006년 6월 2일) 2006년 10월 27일 국무부 대변인 숀 맥코맥(Sean McCormack)은 북(조선)이 6자회담에 응할 경우 조미 양자 사이의 대화가 진행될 것이나 그 대화는 '협상(negotiation)'이 아니라 '논의(discussion)'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북(조선)과 1대1로 협상하지 않을 것이며, 협상은 6자 사이에서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6년 10월 28일) 다자외교 원칙을 고집하는 부쉬정부의 태도는 그처럼 고집스럽고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돌덩이처럼 굳어진 부쉬정부의 원칙은 놀랍게도 어느 한 순간 맥없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붕괴과정은 다음과 같다.

2006년 12월 18일 베이징의 낚시터국빈관(釣魚臺)에서 제5차 6자회담 2단계 회의가 열렸다. 『도쿄신붕』이 회담 소식통의 말을 빌려 보도한 바에 따르면, 12월 17일 미국 대표단은 북(조선) 대표단에게 만나자고 제의하였으나 북(조선) 대표단은 6자회담을 시작한 뒤에 그 틀 안에서 직접협상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응하지 않았다. 6자회담이 열린 첫날인 12월 18일 오후 또 다시 미국 대표단은 북(조선) 대표단에게 세 차례가 넘게 만나자고 제의하였으나, 북(조선) 대표단은 만나는 시간을 바꾸자고 하면서 사실상 거절하였다.

2006년 4월 9일부터 11일까지 도쿄에서 열린 동북아시아협력대화(NEACD)에 참석한 김계관 부상이 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R. Hill)에게 만나자고 제의하였으나 거절당했고, 6월 1일 북(조선)이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힐을 평양에 초청하였으나 거절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상황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북(조선) 대표단이 직접협상에 안달하는 미국 대표단을 틀어쥐고 이리저리 흔드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다.

직접협상을 요구해온 북(조선)이 이처럼 거듭 만나자고 간청하는 미국을 쌀쌀맞게 대한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때까지 완강하게 거부해왔던 직접협상을 거듭 간청하는 미국 대표단의 달라진 행동을 본 북(조선) 대표단은, 미국이 그들의 다자외교 원칙을 접고 자기의 직접협상 원칙을 따를 수밖에 없을 만큼 다급한 처지에 있음을 알았다. 북(조선) 군사문제에 정통한 미국인 전문가이며 제인스 정보집단(Janes Information Group)의 선임연구자인 조셉 벌무디즈(Joseph Bermudez)는 6자회담에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까닭에 부쉬정부는 협상을 벌이려고 '필사적(desperate)'이었다고 말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2007년 2월 15일) 그래서 북(조선)은 다급한 처지에 빠져 필사적으로 돌파구를 찾는 미국이 애를 태우게 만들면서, 곧 시작할 직접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자기의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려는 기민한 협상전술을 취하였던 것이다.

북(조선) 대표단은 6자회담이 열리고 이틀이 지난 12월 20일 오전에 가서야 미국 대표단의 간청을 들어주면서 직접협상을 진행하였다. 다급한 처지에 빠져 애가 탈대로 탄 미국 대표단은 직접협상이 어렵사리 열린 자리에서 장차 조미 두 나라가 합의하고 실행할 단계적 조치를 담은 이행로정도(road map)를 북(조선)에게 처음으로 건넸다. (『연합뉴스』 2006년 12월 20일)

미국이 북(조선)에게 이행로정도를 건넨 것은, 자기들은 행동하지 않고 말만 하면서 상대에게 먼저 행동하라고 강요하는 일방행동의 원칙을 포기하였음을 뜻한다. 자기들은 요란하게 말만 앞세우고 북(조선)에게 먼저 행동할 것을 강요해오던 오만방자한 미국은 북(조선)이 요구해온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을 마침내 따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북(조선)이 요구하였고, 부쉬정부가 거부해왔던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이라는 용어가 2.13 초기조치에 명기될 수 있었고, 조미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실무단(Working Group)을 구성한다는 합의내용이 2.13 초기조치에 명시될 수 있었다. 북(조선)이 직접협상을 통해서 미국으로부터 이행로정도를 받아내고, '핵문제'를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해결하기 위해서 조미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실무단을 구성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낸 것은, 부쉬정부의 원칙을 포기시키고 기어이 직접협상 원칙을 관철한 것이다. 이것은 북(조선)이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는 초기단계에서 이미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음을 뜻한다.

더 놀라운 것은, 미국이 북(조선)의 원칙을 따르는 것으로 상황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기의 원칙을 접는 대신 북(조선)이 요구해온 2대 원칙을 따르기로 한 부쉬정부의 전향적인 태도변화는 사실 북(조선)이 내심 바라던 것이지만, 북(조선)은 방코델타아시아에 넣어둔 자금을 동결한 제국주의금융제재(imperialist financial sanction)부터 먼저 해결하라고 요구하면서 고압적 자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기가 꺾인 채 뒤로 물러서는 미국을 한층 더 압박하는 북(조선)이 고압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가운데, 12월 21일에 다시 열린 직접협상에서도 북(조선)은 미국에게 제국주의금융제재부터 먼저 해결하라고 요구하였다. 당시 줄이어 진행된 조미직접협상에서 북(조선)이 미국에게 제국주의금융제재부터 먼저 해결하라고 요구하였다는 사실은 남(한국)의 언론보도(『연합뉴스』 2006년 12월 21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국언론의 표현을 빌리면, 닷새 동안 계속된 6자회담이 결국 미국의 '실패(failure)'와 북(조선)의 '표독함(acrimony)'으로 끝나던 날(『뉴욕타임스』 2007년 2월 14일), 미국 대표단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북(조선)이 요구해온 2대 원칙을 따랐으나 협상하고 싶으면 제국주의금융제재부터 먼저 해결하라는 요구에 답을 내놓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북(조선)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한 채 6자회담을 끝내고 말았기 때문이다. '워싱턴 수뇌부의 뜻이 담긴' 이행로정도를 북(조선) 대표단에게 건네는 순간, 막혔던 문제가 풀려나갈 것으로 예상하였던 미국 대표단이 당황망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4. 동아시아담당보좌관의 비밀접촉

미국사회에서 가장 큰 명절인 성탄절 연말휴가를 코앞에 둔 미국 대표단이 조미직접협상과 6자회담을 교착상태로 마감하고 빈손으로 귀국해야 하였던 2006년 12월 22일 오후, 베이징주재 북(조선)대사관 정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남(한국)언론은 북(조선)대사관을 조용히 찾아갔던 그 사람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동아시아담당보좌관 빅터 차(Victor Cha)로 지목하였다. (『연합뉴스』 2007년 2월 15일)

당시 부쉬는 재미동포 2세인 빅터 차를 6자회담 미국 대표단 부대표(deputy)로 임명하여 회담장에 내보냈으니, 이례적인 일이다. 이것은 2006년 12월 13일 미국 국무부의 6자회담에 관한 언론설명회에서 크리스토퍼 힐이 밝힌 대로, 부쉬가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와 그의 직속부하 힐을 "매우 강하게 뒷받침(very strong support)해주었음"을 뜻한다.

빅터 차의 북(조선)대사관 비밀방문은, 미국이 거의 1년 동안 틀어쥐고 조미직접협상을 가로막았던 제국주의금융제재를 스스로 포기하는 전향적인 태도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북(조선)대사관을 찾아간 빅터 차는 방코델타아시아의 북(조선) 예금계좌를 동결한 조치를 끝낼 수 있다고 밝히면서 조미 양국 수석대표가 1대1로 협상하자고 제안하였다. (『연합뉴스』 2007년 2월 14일) 북(조선)은 그 제안에 동의를 표하면서 조미직접협상을 진행할 장소로 베를린을 선택하였다. (『뉴욕타임스』 2007년 2월 14일)

제국주의금융제재를 중단하겠으니 직접협상을 시작하자는 놀라운 제안은 빅터 차의 입에서 나온 것이지만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에 지나지 않은 그에게는 부쉬정부의 원칙을 바꾸거나 포기할 권한이 없었다. 그 원칙은 수석대표로 베이징에 나가있던 크리스토퍼 힐이나 그의 직속상관인 콘돌리자 라이스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원칙을 포기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오직 미국 대통령 조지 부쉬 한 사람 뿐이다. 빅터 차를 북(조선)대사관에 급히 보낸 것이나, 제국주의금융제재를 중단하겠으니 직접협상을 시작하자는 제안을 북(조선)에 건넨 것은, 부쉬가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에서 직접 결정하여 자기의 심복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스티븐 해들리(Stephen J. Hadley)를 통해서 베이징 현장의 미국 대표단에게 지시한 것이다.

부쉬가 내린 그러한 결정과 지시는 미국언론이 왜곡한 것처럼 미국 대표단에게 그 무슨 '새로운 유연성(new flexibility)'을 허락한 것(『워싱턴포스트』 2007년 2월 14일)이 아니다. 12월 22일 빅터 차의 비밀방문으로 드러난 전향적 태도변화는, 부쉬가 집권한 이후 변함없이 완강하게 고수해오던 원칙을 스스로 포기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시한 원칙에 끌려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음을 뜻한다. 이 변화는 협상원칙을 놓고 격렬하게 충돌한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에서 미국 대통령 부쉬가 패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승리하였음을 뜻한다.

부쉬가 자기의 원칙을 포기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원칙에 끌려간 극적인 전환은 2007년 1월 16일부터 18일까지 6자회담의 틀을 벗어나 베를린에서 열린 조미직접협상에서 세상에 알려졌다.

5. 베를린 회담의 비공개 양해각서

베를린에서 조미직접협상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던 2007년 1월 17일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쿠웨이트에서 몇몇 아랍나라 외무장관들과 회담을 마치자마자 황급히 베를린으로 날아갔다. 미국 국무장관이 조미직접협상이 진행되는 베를린에 나타난 것부터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베를린 회담에서 조미 수석대표들이 어떤 의견을 주고받았는지는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으나, 직접협상이 사흘 동안이나 계속된 것으로 봐서, 그리고 라이스가 베를린에 나타난 것으로 봐서, 2006년 12월 20일 6자회담 중에 열린 조미직접협상에서 힐이 워싱턴 수뇌부의 뜻이 담겼다고 하면서 김계관 부상에게 건넨 9.19 공동성명 이행로정도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논의한 것이 분명하다.

베를린에 도착한 라이스에게 힐은 한 쪽 짜리 문서를 건네면서, 그 내용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뉴욕타임스』 2007년 2월 14일, 2월 16일) 이 사건을 보도한 미국언론은 그 문서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으나, 그 문서는 베를린 회담의 합의사항을 담은 비공개 양해각서(memorandum of understanding) 초안이었을 것이다. 미국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그 문서는 북(조선)이 작성하여 미국에게 제시한 것이다. (『뉴욕타임스』 2007년 2월 16일) 1994년 10월 제네바에서 조미기본합의를 내올 때도, 조미 수석대표가 별도로 비공개 양해각서에 서명한 적이 있다.

베를린 회담에서 비공개 양해각서를 채택하는 문제는 라이스가 혼자서 결정할 수 없었다. 결재권은 부쉬에게 있었다. 라이스는 그 자리에서 부쉬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고, 양해각서 초안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스티븐 해들리에게 급히 전송하도록 조치한 뒤, 그 초안을 받아보고 검토하고 있었던 해들리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뉴욕타임스』 2007년 2월 16일) 부쉬는 그 문서에 동의를 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뉴욕타임스』 2007년 2월 14일) 부쉬는 초안을 검토한 해들리로부터 보고를 받자마자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부쉬정부의 고위관리는 힐이 그 문서에 서명하였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 2007년 2월 16일)

미국 국무부 부대변인 톰 케이시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부인하였으나(『연합뉴스』 2007년 2월 9일), 일본언론에 따르면, 베를린 회담에서 조미 수석대표는 각서에 서명하였다고 한다. (『아사히신붕』 2007년 2월 8일)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이 조미직접협상으로 또 한 차례 숨가쁘게 고비를 넘어서는 순간이었다.

크리스토퍼 힐이 베를린 회담을 마친 직후 기자들과 만나 "미국은 북한을 공격할 의도가 없다. 또한 북한 사람들(people)에 대해서 악의(animosity)가 없다. 6자회담 진행과정은 1953년 정전협정 이후 미북관계의 포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며 미국은 북한과 수교를 원하고 있다"는 전향적인 발언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연합뉴스』 2007년 1월 17일)은, 그가 부쉬의 긴급지시에 따라 비공개 양해각서에 서명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베를린 회담에서 비공개 양해각서가 나오지 않았다면 2.13 초기조치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미국언론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베를린 회담은 '전환점(turning point)'이다. (『뉴욕타임스』 2007년 2월 14일) 베를린 회담이 "6자회담을 소생시켜 2.13 초기조치를 내오는 데서 결정적이었다"는 미국언론의 평가(『뉴욕타임스』 2007년 2월 14일)는 과장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2.13 초기조치는 베를린 회담에서 서명한 비공개 양해각서를 6자회담의 틀에서 공개적으로, 다자적으로 재확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조미직접협상에서 비공개적으로, 일차적으로 현안을 해결하고, 6자회담에서 그 해결을 공개하고 재확인하는 새로운 협상방식이 생겨났음을 뜻한다. 2.13 초기조치는 그러한 새로운 협상방식으로 채택한 첫 외교문서이다.

위에서 논한 대로,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제국주의 미국에 맞서 투쟁하는 북(조선)이 부쉬정부가 집권한 이후 다섯 해 동안 완강하게 틀어쥐고 있었던 두 가지 원칙을 포기시키고 자기가 제시한 두 가지 원칙을 관철한 것은, 세계정치사에 기록될만한 경이로운 사변이자 정치적 기적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있는 수많은 나라들 가운데 힘과 힘이 충돌하며 밀고 당기는 정치협상을 벌여 미국이 완강하게 틀어쥔 원칙을 포기시키고 자기의 원칙을 관철한 그런 나라가 북(조선)말고 또 있을까? 미국의 원칙을 포기시키기는커녕 미국이 협상상대로 인정해주지도 않아서 정치협상이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중국공산당 중앙당학교 교수 장 리안귀가 지적한 대로, 6자회담 참가자들이 합의를 내왔건 내오지 못했건 간에, 북(조선)은 '대승(major victory)'을 거둔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2007년 2월 13일)

그런데도 부쉬는 2007년 2월 14일 백악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2.13 초기조치를 '다자외교의 승리'라고 칭송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자기의 패배를 감추어야 하였으니 그러한 거짓말밖에 할 수 없었으리라.

6.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저지른 훼방

9.19 공동성명은 한(조선)반도를 비핵화하는 멀고 험한 과정에서 붙들고 나아가야 할 이정표이다. 만일 그 이정표를 내려놓으면 한(조선)반도를 비핵화하는 역사적 과업은 한낱 빈말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런데 부쉬정부는 그 이정표가 세워지기가 무섭게 그것을 내던지고 말았다. 부쉬정부 1기에 조미직접협상에 나섰던 제임스 켈리(James A. Kelly)가 지적한 대로, 부쉬정부가 9.19 공동성명을 "너무 서둘러 내버린 것은 실수였다." (『유에스에이 투데이』, 2007년 2월 13일)

부쉬정부가 9.19 공동성명이라는 이정표를 내던진 것은, 아예 그것을 땅속에 파묻어 버리려고 날뛴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세력은 9.19 공동성명을 실현하는 경우 북(조선)과의 대결에서 미국이 결국 패할 것이라고 예상하였기에 그 공동성명이 나오는 때에 맞춰 그 공동성명을 파기하려는 훼방을 놓았다. 지금까지 언론에 드러난 것을 살펴보면, 그들의 훼방은 다음과 같다.

9.19 공동성명을 파기하려는 훼방은,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에서 그 공동성명이 채택되었던 2005년 9월 19일에 있었다. 그날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의 수석대표 우다웨이(武大偉)가 9.19 공동성명을 읽었고, 회담 참석자들은 기립박수로 찬의를 표시하였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이어 취재진이 퇴장하고 참가국들이 각기 폐막성명을 발표하는 순서가 진행되었다.

『아사히신붕』 편집위원 후나바시 요이치로(船橋洋一)가 자신의 책 『한(조선)반도 문제(The Peninsula Question)』 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미국 수석대표 크리스토퍼 힐은 자기 차례가 되어 폐막성명을 읽기 직전에 장내에 다 들릴만한 목소리로 "왜 이런 말까지 해야 되나. 심하군 심해"라고 투덜거렸다고 한다. 그가 북(조선)을 심히 자극할 것으로 생각하여 폐막성명 읽기를 꺼려했던 까닭은, '체제(system)'와 '인권(human right)'이라는 두 낱말이 폐막성명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읽은 미국의 폐막성명은 "이번에 채택된 6자회담 공동성명이 북한의 체제나 인권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중앙일보』 2006년 10월 21일) 9.19 공동성명을 채택하면서 기립박수를 보냈던 감동적인 분위기는, 힐이 폐막성명의 그 대목을 읽자 가뭇없이 사라졌고, 회담장은 순식간에 긴장 속에 빨려 들어갔다.

6자회담의 공식문서에 들어가는 말은 각별히 신경을 써서 골라야 하는 법인데, 미국의 폐막성명에 그러한 오만방자한 내용이 들어간 것은 결코 언어선택의 실수가 아니었다. 폐막성명을 발표할 수석대표도 모르는 사이에, 북(조선)을 자극하는 새로운 내용이 그 성명에 들어간 것은 누군가가 긴급하게 취한 의도적인 행동이 분명하였다. 국무부 차관보이자 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인 힐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북(조선)을 심히 자극하는 내용을 폐막성명에 급히 집어넣은 것은, 9.19 공동성명에 서명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 성명을 파기하려는 훼방이었다.

그러한 훼방을 놓을 수 있는 고위관리는 부통령 딕 체니(Dick Cheney) 밖에 없었다. 부통령실에는 북(조선)을 겨냥하여 반사회주의적대정책(anti-socialist hostile policy)을 극렬하게 밀고 나가려는 극우성향의 관리들이 포진하였고, 체니는 부통령의 권한을 이용하여 정책의 결정과 집행을 좌우하고 있었다. 북(조선)정권이 무너져야 '핵문제'가 해결된다고 떠들어댄 유엔주재 미국대사 출신의 극렬분자 존 볼튼(John R. Bolton)의 망발(『연합뉴스』 2007년 1월 17일)이나, 북(조선)이 너무 폐쇄적이어서 쉽지는 않겠지만 정권교체나 혁명으로 인한 붕괴가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떠들어댄 미국 존스 합킨스 대학교 교수이며 반사회주의선동가인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망발(『연합뉴스』 2006년 11월 8일)은 부쉬정부의 반사회주의적대정책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체니는 일주일에 한 차례씩 부쉬와 만나 이른바 '정책오찬(policy lunch)'을 나누는 기회를 이용하여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였다. 체니의 부통령실이 도널드 럼스펠드(Donald H. Rumsfeld)의 국방부와 공조하면서 조미직접협상을 가로막았던 시기에는 6자회담에 나간 국무부 관리들이 협상권한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다. (『워싱턴포스트』 2007년 2월 20일)

2005년 9월 15일 6자회담 폐막식에서 힐의 폐막성명을 긴급히 수정하여 9.19 공동성명을 파기하려고 훼방을 놓은 것은, 미국 중앙정보국 공작원의 신분을 언론에 드러낸 혐의로 2005년 10월에 사임하였던 부통령 비서실장 루이스 리비(I. Lewis Libby), 그리고 부통령실 국가안보담당 부보좌관(Deputy National Security Adviser)이었던 아론 프리드벅(Aaron Friedberg)의 소행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부쉬정부가 북(조선)에 대해서 이른바 '전면적 강경책(full-scale crackdown)'을 밀고 나가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 극우성향의 관리들이었다

힐이 읽어 내려간 폐막성명을 듣고 나서 북(조선)의 폐막성명을 발표할 차례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선 김계관 부상은 미리 준비했던 성명을 읽는 것을 그만두고 즉흥발언으로 차갑게 응답하였다. 미국 대표단이 워싱턴으로 돌아가려고 짐을 꾸리고 있던 이튿날, 북(조선) 대표단은 경수로를 제공하기 이전에 핵억지력(nuclear deterrence)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강한 어조로 작성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 성명이 미국 대표단의 폐막성명을 정면으로 논박한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워싱턴의 극렬분자들이 훼방을 놓은 탓에, 9.19 공동성명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이행불능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딕 체니 주변에 포진하고 북(조선)에 대한 '전면적 강경책'을 떠들어대는 극렬분자들이 6자회담 폐막성명을 긴급히 수정하여 북(조선)을 자극하였다고 해서, 9.19 공동성명이 파기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훼방은 북(조선)이 품고 있는 미국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을 재확인해주었을 뿐이다.

7. 제국주의금융제재의 시작과 끝

9.19 공동성명을 결정적으로 이행불능상태에 몰아넣은 훼방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다른 곳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특별행정구인 마카오(Macau)에 있는 중국계 은행 방코델타아시아(Banco Delta Asia)의 북(조선) 예금계좌로 집중되었던 부쉬정부의 제국주의금융제재가 그것이다. 마카오발 금융제재의 광풍은 2006년 9월 15일, 그러니까 9.19 공동성명이 채택되기 바로 나흘 전에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그날 미국 재무부는 북(조선)이 방코델타아시아를 통해 이른바 '불법자금'을 조달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던 것이다.

9.19 공동성명 발표와 미국 재무부의 발표가 나흘 간격으로 나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부쉬정부는 북(조선)에게 제국주의금융제재를 가하려는 흉계를 오래 전부터 품고 은밀하게 움직였고, 9.19 공동성명이 발표되는 때에 맞춰 제국주의금융제재의 광풍을 일으킨 것이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다.

부쉬정부는 2003년 8월에 열린 제1차 6자회담에서 진행된 중미양자협의에서 처음으로 북(조선)의 '불법자금 세탁'에 관한 혐의를 꺼냈다. 그때부터 미국 재무부가 방코델타아시아를 북(조선)의 '불법자금 조달창구'로 지목하였던 2005년 9월까지 이태 동안 부쉬정부는 무엇을 노리며 기다린 것일까?

북(조선)에게 제국주의금융제재를 가한 가해자가 미국이라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하지는 않은 말이다. 방코델타아시아는 중국영토에 있는 중국계 은행이므로, 그 은행의 북(조선) 예금계좌를 동결하는 행정조치를 발동한 것은 명백하게도 중국정부이다. 미국 재무부에게는 방코델타아시아를 상대로 행정조치를 발동할 권한이 없다. 자본주의언론시장에서는 거의 지적하지 않고 있으나, 북(조선)의 은행계좌를 동결한 제국주의금융제재는 부쉬정부가 주동하고 중국정부가 추종한 것이다.

2003년 8월부터 2005년 9월까지 부쉬정부가 노리고 기다린 것은 중국정부의 추종행위였다. 2003년 8월에 열린 제1차 6자회담에서 진행된 중미양자협의에서 부쉬정부가 처음으로 북(조선)의 '불법자금 세탁혐의'를 꺼내면서 지목한 주된 대상은, 소규모 은행인 방코델타아시아가 아니라 중국 4대 은행 가운데 하나인 중국은행(Bank of China)이다. 미국은 북(조선)이 대외결재에 이용하는 중국은행(Bank of China)을 통해 '불법자금'을 세탁해왔다는 '정보자료'를 중국정부에게 내보이면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중국정부는 북(조선)이 대외결재에 이용하는 중국의 몇몇 은행들에게 북(조선)의 대외결재에 관한 진상을 파악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진상을 파악했어도 북(조선)이 중국의 은행들을 통해서 '불법자금'을 세탁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 재무부가 북(조선)에게 제기한 '불법자금 세탁혐의'는 사실상 그들이 조작해낸 허구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마카오행정청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다.

방코델타아시아의 법률자문에 응하는 회사는 미국 법률회사인 헬러 얼만(Heller Ehrman)이다. 그 법률회사는 2006년 10월 18일 미국 재무부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 문서는, 마카오행정청이 조사하였으나 북(조선)이 방코델타아시아를 통해서 불법자금을 세탁한 증거를 찾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불법자금을 세탁하였다는 혐의를 적용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연합뉴스』 2006년 12월 26일)

북(조선)과 방코델타아시아의 금융거래에 관해서 가장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는 마카오행정청이 그처럼 무혐의를 인정한 것에 반하여, 미국 재무부는 자의적으로 제기한 혐의를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제국주의금융제재의 실무집행을 맡은 미국 재무차관 스튜어트 레비(Stuart Levey)의 말에 따르면, 부쉬정부가 혐의를 둔 북(조선)의 '불법행위'는 두 가지이다. 북(조선)이 방코델타아시아를 통해서 현금 수 백만 달러를 입출금하였다는 것과 그러한 입출금을 '묵인'해주는 대가로 방코델타아시아 직원들에게 사례금을 주었다는 것이다. (『연합뉴스』 2006년 12월 22일)

그러나 북(조선)이 방코델타아시아를 통해서 현금 수 백만 달러를 거래한 것이 '불법자금 세탁'이라는 증거는 없다. 증거가 없는데도, 북(조선)이 대외결재에 사용하는 거액현금을 불법자금으로 범죄시하는 것은 음해모략이다.

방코델타아시아와 거래하는 북(조선) 관계자들이 그 은행의 직원들에게 준 돈은 '불법자금 세탁'을 묵인해준 대가가 아니다. 미국 재무부 대변인 몰리 밀러와이즈(Molly Millerwise)가 밝힌 대로, 그 돈은 방코델타아시아가 "제때에 법적 절차를 밟지 않은" 북(조선)으로부터 받아낸 수수료이다. (『연합뉴스』 2006년 11월 3일) 미국 재무부가 억지를 부리는 대로 수수료를 받은 것을 불법행위라고 인정하더라도, 그 불법행위는 방코델타아시아가 저지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수수료를 '사례금'이라고 하면서 범죄시하는 것은 음해모략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국정부는 마카오행정청에게 요청하여 방코델타아시아에 있는 북(조선)의 예금계좌들을 동결하도록 조치하였다. 이것은 중국정부가 부쉬정부의 제국주의금융제재를 추종하였음을 뜻한다. 중국정부가 은행계좌 동결조치를 취하자, 1970년대부터 30여 년 동안 방코델타아시아와 금융거래를 해오던 북(조선)의 은행들과 무역회사들은 갑자기 금융거래창구를 잃었다. 신용결재가 아니라 현금으로 결재하는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중국정부가 부쉬정부의 제국주의금융제재를 추종한 행동 뒤에는 거대한 도박시장의 '돈줄'이 얽히고 설킨 사연이 있다. 지금 미국의 도박자본들은 마카오로 밀려들고 있다. 그래서 2006년에 마카오의 도박수입은 69억 8천만 달러로 급증하였고, 65억 달러의 도박수입을 올린 미국 라스베거스(Las Vegas)를 제치고 세계 제1의 도박시장으로 떠올랐다. (『월스트릿저널』 2007년 1월 24일) 마카오의 도박시장은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에게 수 십억 달러의 재정수입을 가져다주는 '돈줄'이다. 그런데 그 '돈줄'의 한 쪽 끝을 잡아당기는 것은 미국의 도박시장이다. 미국 도박시장의 해외투자를 통제하는 권한을 틀어쥔 곳이 네바다 도박위원회(Nevada Gaming Commission), 네바다주 도박통제부(Nevada State Gaming Control Board)와 뉴저지 카지노통제위원회(New Jersey Casino Control Commission)인데, 만일 부쉬정부가 그들을 통해서 미국 도박자본의 마카오 투자를 중단시켜 마카오 도박시장에 찬물을 끼얹는다면,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는 '돈줄'이 졸아드는 손해를 입을 수 있다. 중국정부가 부쉬정부의 제국주의금융제재를 추종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부쉬정부가 북(조선)에게 가한 제국주의금융제재는, 제국주의 미국의 반사회주의적대행위로서 두 가지 의미를 지닌 것이다.

첫째, 워싱턴의 극우성향의 관리들은 9.19 공동성명 자체를 거부하였으므로 제국주의금융제재를 9.19 공동성명이 이행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방해수단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의 의도대로, 제국주의금융제재가 시행되는 동안 9.19 공동성명은 이행불능상태에 빠졌다. 이행전망의 시계(視界)는 영점으로 나타났다.

둘째, 미국언론의 표현대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름만 들어도 '질색(loathe)'하는 부쉬는 제국주의금융제재를 가하면 북(조선)이 자기의 원칙을 포기하고 부쉬정부의 원칙을 따를 것으로 타산하였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바랐던 것은 북(조선)의 정치적 굴복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와 타산은 먹혀들지 않았고, 먹혀들 수도 없었다. 북(조선)의 사회주의반제투쟁이 미국의 반사회주의적대행위를 압도하였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제국주의금융제재를 가하면 북(조선)이 정치적으로 굴복하리라고 타산하였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2006년 10월 31일 베이징에서 열렸던 조, 중, 미 6자회담 수석대표 회담에서였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하고 있었던 크리스토퍼 힐은 라이스의 긴급지시를 받고 부랴부랴 일정을 중단하고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힐은 2005년 11월 9일부터 11일까지 제5차 6자회담 1단계 회의에서 김계관 부상을 만난 때로부터 거의 일년만에 그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회담을 마친 뒤 힐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북한이 반대하는 미국과 중국의 금융제재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실무협의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줄임) 6자회담에서는 미국의 금융제재에 대한 북한의 우려를 다루게 되는데, 아마도 실무협의단을 통해 다루어질 것이다." (『연합뉴스』 2006년 10월 31일)

조, 중, 미 수석대표 회담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합의를 이끌어냈는지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회담이 끝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평양을 방문한 잭 프릿처드(Charles L. Pritchard), 식프릿 헥커(Sigfried S. Hecker), 로벗 칼린(Robert Carlin), 존 루이스(John Lewis)가 언론에게 전한 바에 따르면, 북(조선)의 정부관리들은 수석대표 회담에서 중국정부가 방코델타아시아의 계좌동결을 풀고 부쉬정부는 이에 간섭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고 한다. (『연합뉴스』 2006년 11월 16일)

중국정부를 끌어들여 북(조선)의 대외결재창구를 영구히 막아버리려 하였던 부쉬정부의 제국주의금융제재는, 2007년 1월 16일부터 18일까지 6자회담의 틀을 벗어나 열린 베를린 회담에서 마침내 허물어졌다. 부쉬정부가 자기의 원칙을 포기하고 북(조선)의 원칙을 따름으로써 제국주의금융제재는 1년 6개월만에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이다. 2007년 2월 13일 제5차 6자회담 3단계 회의를 마친 직후 미국 대표단 숙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힐은 방코델타아시아와 관련된 금융제재 문제를 30일 안에 해결할 것이며, 이를 북(조선)과 중국에게 공약하였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 2007년 2월 13일)

부쉬정부의 제국주의금융제재는 한때 9.19 공동성명을 이행불능상태로 몰아넣었으나, 2.13 초기조치가 나오면서 이행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9.19 공동성명을 이행불능상태에서 구출할 수 있었던 것은 북(조선)이 부쉬정부의 제국주의금융제재를 허물어뜨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북(조선)이 제국주의금융제재를 허물어뜨리지 못했다면, 2.13 초기조치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며 9.19 공동성명은 여전히 이행불능상태에 빠져있었을 것이다.

8. 허물어지는 것과 재생되는 것

2.13 초기조치는 새로운 합의가 아니다. 그것은 1993년부터 14년 동안 북(조선)과 미국이 벌여오는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이 낳은 결과이다. 북(조선)과 미국이 벌이는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은 고비를 넘을 때마다 합의문서를 발표하였다. 1993년 6월 11일 뉴욕에서 발표한 조미공동선언(Joint Statement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에서 발표한 조미기본합의(Agreed Framework betwee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2000년 10월 12일 워싱턴에서 발표한 조미공동성명(DPRK-US Joint Communique)으로 이어진 조미 3대 합의가 그것이다.

주목하는 것은, 조미공동선언, 조미기본합의, 조미공동성명의 일치된 목표가 조미관계 정상화라는 점이다. 조미관계의 근본문제 곧 조미관계를 정상화하는 문제가 '핵문제'라는 현상을 뒤집어쓰고 나타났으므로, 조미관계가 조미 3대 합의에 따라 정상화되었다면 '핵문제'라는 말조차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조미 두 나라가 '핵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조미관계의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조미관계를 정상화하는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핵심문제는 조미 3대 합의의 일치된 목표 곧 조미관계의 정상화를 실현하느냐 못하느냐에 있다.

클린턴정부와 부쉬정부는 '핵문제'라는 현상만 붙들고 늘어지면서 조미관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외면하거나 거부해왔고, 특히 부쉬정부는 클린턴정부가 북(조선)과 합의한 조미 3대 합의를 사실상 부정하고, 북(조선)에 대한 반사회주의적대정책을 더욱 강화하면서 북(조선)을 정치적으로 굴복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반사회주의적대정책을 더욱 강화하면서 북(조선)을 정치적으로 굴복시키려던 부쉬정부의 기도는 결국 파탄되었고, 되레 북(조선)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하였다. 이를테면, 2.13 초기조치를 합의하는 과정에서 부쉬정부는 "북(조선)이 고농축우라늄을 이용한 핵개발을 포기한다"는 내용의 문구를 넣은 합의문 초안을 6자회담 참가국 대표들에게 건네면서 북(조선)의 정치적 굴복을 받아내려는 의사를 드러냈으나, 북(조선)이 강하게 반대는 바람에 포기하였다. (『연합뉴스』 2007년 2월 19일)

2.13 초기조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국은 양자간 현안을 해결하고 전면적 외교관계(full diplomatic relations)로 나아가기 위한 양자회담(bilateral talks)을 개시한다"고 명시한 것은, 북(조선)에 대한 반사회주의적대정책을 더욱 강화하면서 북(조선)을 정치적으로 굴복시키려던 부쉬정부의 기도가 파탄되었음을 뜻한다.

물론 조미관계의 정상화를 합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것은 조미 3대 합의와 9.19 공동성명에서 이미 명시한 사항이지만, 2.13 초기조치에서 조미관계를 정상화하기로 합의한 것은 이전에 이루어졌던 합의와 크게 다르다. 2.13 초기조치는 조미관계 정상화에 관한 합의내용을 실제로 이행하려는 의지를 총체적으로 반영하였다는 점에서 이전의 합의와 다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진전이 이루어졌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2.13 초기조치는 조미관계를 정상화하는 구체적인 계획을 협의하고 수립할 실무단(Working Group)을 30일 안에 소집할 것을 명시하였다. 이 실무단은 9.19 공동성명의 제2항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국은 상호주권을 존중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며 각자의 정책에 따라 관계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한다"고 명시한 공약을 이행하기 위한 행동계획을 내놓을 것이다. 이것은 제국주의 미국이 정치외교부문에서 북(조선)에게 적용한 반사회주의적대정책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뜻한다.

둘째, 2.13 초기조치는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테러지원국(state-sponsor of terrorism) 지정으로부터 해제하기 위한 과정을 개시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적성국교역법(Trading with Enemy Act) 적용을 끝맺기 위한 과정을 진전시킨다"고 명시하였다. 1950년 6월 한국(조선)전쟁이 일어난 직후 미국이 북(조선)에게 적용하였던 적성국교역법이란 미국과 북(조선)의 통상교역과 금융거래를 금지하고 북(조선)에 대한 경제지원을 제한하는 경제통상부문의 반사회주의적대정책이다.

미국이 북(조선)을 이른바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지 않고 북(조선)에게 적성국교역법을 적용하지 않는 전향적 조치는, 조미관계 정상화를 촉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방코델타아시아에 있는 북(조선) 예금계좌를 동결한 제국주의금융제재를 중단시키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북(조선)의 사회주의자력갱생(socialist self-reliance)을 압살하려는 제국주의경제제재를 전반적으로 중단시키는 전략적 의의를 갖는다. 이것은 제국주의 미국이 경제통상부문에서 북(조선)에게 적용한 반사회주의적대정책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뜻한다.

셋째, 2.13 초기조치는 "직접적으로 관련된 당사자들은 적절한 별도 연단(appropriate separate forum)에서 한(조선)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permanent peace regime)에 관한 협상을 갖는다"고 명시하였다. 한(조선)반도에서 정전협정(armistice)이 평화협정(peace treaty)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주한미국군사령부를 통하여 남(한국)의 안전을 지켜준다는 구실을 내걸고 실제로는 군사적으로 지배하는 신식민주의체제(neocolonial system)가 끊임없이 유지된다. 미국이 군사부문에서 북(조선)에게 적용한 반사회주의적대정책은 남(한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는 신식민주의예속정책과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한 쌍을 이루고 있다.

2006년 11월 18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린 하노이에서 진행된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쉬가 북(조선)이 핵을 포기할 경우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한국(조선)전쟁의 종전을 선언하는 문서에 공동서명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였던 것(『연합뉴스』 2006년 11월 30일)처럼, 부쉬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종전선언으로 대체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종전선언을 발표하려는 부쉬의 구상은 평화협정을 회피하려는 술책으로 보인다.

2.13 초기조치가 한(조선)반도의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갖는다고 명시한 것은, 북(조선)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협상에 미국을 끌어들이게 되었음을 뜻한다. 북(조선)이 한(조선)반도 평화협상에 미국을 끌어들이는 것은 북(조선)이 오랫동안 추구해왔던 전략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므로, 2.13 초기조치는 북(조선)의 그러한 전략적 목표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장차 한(조선)반도 평화협상이 시작되면 남(한국)과 중국도 참가할 가능성이 있지만, 오늘 6자회담이 진전되는 현실에서 드러난 것처럼 평화협상 역시 평화협정 체결과 종전선언 발표가 충돌하는 조미직접협상에 따라 진행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조미직접협상이 한(조선)반도 평화협상으로 진전하는 것은 북(조선)이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키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초기조치가 될 것이다. 이러한 초기조치의 이행은 제국주의 미국이 군사부문에서 북(조선)에게 적용한 반사회주의적대정책과 남(한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는 신식민주의체제가 함께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뜻한다.

넷째, 2.13 초기조치는 2007년 3월 19일에 제6차 6자회담을 개최하여 실무단의 보고를 듣고 다음 단계의 행동을 협의할 것을 명시하였다. 9.19 공동성명을 이행불능상태에 몰아넣었던 체니 부통령실에 포진한 극우성향의 관리들이 실무단의 구성합의를 반대하는 것(『워싱턴포스트』 2007년 2월 20일)은 실무단의 활동이 2.13 초기조치를 이행하는 결정적 요소임을 반증한다.

2006년 8일부터 13일까지 열렸던 6자회담은 제5차 회담이고, 2007년 3월 19일에 열릴 6자회담은 제6차 회담이다. 제5차 회담과 제6차 회담이 다른 점은, 제6차 회담부터 9.19 공동성명의 실질적 이행이 진전을 보게 된다는 데 있다. 1994년 10월 제네바에서 채택된 조미기본합의를 이행하는 문제는 클린턴이 서명한 대통령 담보서한으로도 보장되지 못한 채 결국 부쉬의 손으로 폐기되었으나,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는 문제는 북(조선)이 초기단계에서 이루어낸 전략적 승리로 보장될 것이다.

베를린 회담과 2.13 초기조치에서 북(조선)이 이룩한 초기단계의 전략적 승리는, 부쉬정부가 부정하였던 조미 3대 합의를 되살리기 시작하였다. 그런 뜻에서, 2.13 초기조치는 조미 3대 합의의 재생이다. 2006년 2월 13일 크리스토퍼 힐이 김계관 부상을 뉴욕으로 초청하였다고 밝힌 것은, 조미직접협상이 한층 진전되면서 조미 3대 합의가 재생되기 시작하였음을 알려주는 뚜렷한 증거이다.

만일 부쉬정부가 조미 3대 합의의 전략목표인 조미관계의 정상화를 계속 거부하였다면 조미직접협상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 뿐 아니라 6자회담도 무용지물이 되고, 따라서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한 2.13 초기조치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부쉬정부가 조미 3대 합의의 전략목표를 사실상 묵인함으로써, 조미직접협상과 6자회담이 모두 살아나고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북(조선)이 조미 3대 합의의 전략목표를 재확인하고 부쉬정부가 그것을 사실상 묵인한 것은 조미직접협상과 6자회담을 모두 살림으로써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한다. 조미 3대 합의의 전략목표는 뒤집을 수 없고, 역행할 수 없고, 취소할 수 없고, 파기할 수 없는 이행의 불가역성(irreversibility)을 갖게 되었다.

9. 글을 맺으며

20세기 중반 한(조선)민족은 국제사회에서 자기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였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그리고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국회의에서 전후 한(조선)민족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한 것은 소련, 미국, 영국이었다. 그 결정과정에 정작 당사자로 참가하였어야 할 한(조선)민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조선)민족은 자기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한 얄타회담과 모스크바 삼국회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국제사회에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세계사의 변방으로 밀려나 수모와 치욕을 겪었던 비극의 역사는, 오늘 북(조선)의 사회주의반제투쟁이 이룩한 승리에 의해 정반대로 뒤집어졌다. 북(조선)의 사회주의반제투쟁은 거만스럽게도 초강대국을 자처하는 제국주의 미국에 맞서 14년 동안 끈질기게 대결한 끝에 결국 자기의 원칙을 관철하고 조미관계 정상화를 향한 불가역적인 이행경로를 열어놓은 전략적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한(조선)민족이 겪었던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오늘의 전략적 승리는 정치적 기적으로 보인다.

앞으로 더 놀라운 정치적 기적을 일으킬 것이라는 점에서, 오늘의 전략적 승리는 한(조선)민족의 21세기 미래운명을 좌우하게 될 가장 커다란 요인이다. 북(조선)이 쟁취한 초기행동의 전략적 승리는 앞으로 몇 해 안에 최종행동의 전략적 승리로 상승, 발전하게 될 것이다. 한(조선)반도를 비핵화하려는 북(조선)의 사회주의반제투쟁은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07년 2월 20일 작성)